논쟁
그리스도인도 이혼하고 재혼할 수 있나?
그리스도인의 이혼과 재혼을 두고 기독교 안에서도 입장이 갈린다. 결혼을 원칙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언약으로 보아 이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과, 배우자의 부정이나 유기, 가정폭력처럼 결혼 생활이 회복 불가능하게 파탄난 경우에는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는 입장이 함께 있다. 어느 쪽이든 이혼을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결혼의 모습으로 보지는 않지만, 이혼과 재혼을 겪은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돌봐야 한다는 목회적 태도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결혼한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을 이혼이라고 해요. 이혼한 사람이 다시 결혼하는 것은 재혼이라고 해요. 그리스도인도 이혼하고 재혼할 수 있을까요?
교회마다 생각이 달라요. 어떤 교회는 결혼을 절대 풀 수 없는 약속이라고 봐요. 그래서 이혼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천주교가 그래요. 대신 다른 방법을 써요. 처음부터 결혼이 제대로 안 됐다고 확인해 주는 절차예요. 이걸 '혼인무효'라고 해요. 이혼과는 완전히 달라요.
다른 교회들은 조금 더 너그러워요.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어요. 배우자가 가정을 아예 떠나 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배우자에게 심하게 맞는 경우도 있어요. 이럴 때는 이혼과 재혼을 허락하는 교회도 많아요.
교회들 생각이 달라도 한 가지는 같아요. 이혼한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혼은 그 자체로 아픈 일이에요. 교회는 그 사람을 위로하고 돌봐야 해요.
이혼과 재혼을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기독교 안에서도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 온 주제다. 신약성경에서 이 질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답하는 본문은 마태복음 19장 3~9절(마 19:3-9)이다. 바리새인들이 이혼이 정당한지 묻는다. 예수예수 예수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란 유대인 랍비로, 짧은 공생애 동안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다가 로마 총독 아래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 제자들이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전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남녀를 짝지어 하나 되게 하셨다고 답한다. 그러니 사람이 그 결합을 함부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모세모세 출애굽히브리 노예로 태어나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자랐고, 말을 잘 못한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결국 한 민족을 이끌고 광야 40년을 건넌 사람.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사람들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원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본문에서 예수는 음행한 연고가 있는 경우만은 예외로 남긴다(자체 풀이). 문제는 이 예외를 얼마나 좁게, 또는 넓게 읽느냐다.
첫 번째 입장은 결혼을 원칙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언약으로 본다. 음행한 연고를 좁게 해석해, 이미 유효하게 성립한 결혼이라면 이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천주교가 대표적이다. 천주교는 이혼 대신 '혼인무효'(annulment)라는 별도 제도를 둔다. 이는 기존 결혼을 없던 일로 만드는 절차가 아니다. 혼인 서약 당시 유효한 혼인의 요건(자유로운 동의 등)이 갖춰지지 않았음을 뒤늦게 확인해 선언하는 절차다. 즉 '이혼했다'가 아니라 '애초에 교회법상 유효한 혼인이 성립한 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혼인무효가 선언되면 신자는 교회 안에서 다시 결혼할 수 있다. 일부 보수 개신교단도 이혼과 재혼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이 입장에 가깝다.
두 번째 입장은 이혼과 재혼의 사유를 목회적으로 더 넓게 인정한다. 음행한 연고를 성적 부정 전반을 포괄하는 넓은 예외로 읽는다. 여기에 더해 고린도전서 7장 15절(고전 7:15)도 근거로 받아들인다. 이 구절에서 바울바울 초대교회한때 신자들을 잡아 가두고 스데반의 처형에 동의했던 사람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방향을 잃고 다시 얻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남은 삶을 썼다은 믿지 않는 배우자가 스스로 결혼 생활을 떠나 버리는 경우를 말한다. 이때 믿는 배우자가 거기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한다(자체 풀이). 여기서 더 나아가는 흐름도 있다. 가정폭력처럼 배우자와 자녀의 안전이 위협받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결혼 생활이 사실상 회복 불가능하게 파탄났다고 본다. 다수 개신교단은 이런 상황까지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는 쪽으로 목회 판단을 넓혀 왔다. 장로교·감리교를 비롯한 다수 개신교단이 이 입장에 가깝다.
정교회는 이 두 입장 사이 어디쯤에 있다. 결혼의 이상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경륜'(oikonomia, 인간의 연약함을 감안하는 목회적 관용의 원리)에 따라 재혼을 제한적으로 허용해 왔다. 다만 두 번째·세 번째 결혼식은 첫 결혼식과 달리 화려한 요소를 뺀, 더 절제된 참회의 예식으로 치른다.
두 입장 모두 이혼이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결혼의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이혼과 재혼을 겪은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위로하고 돌봐야 한다는 태도에도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음행한 연고 외에 구체적으로 어디까지를 정당한 사유로 볼 것인지는 신학 안에서도 결론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두 입장의 구체적인 근거는 아래에 정리했다.
이 논쟁의 뿌리는 신약이 아니라 구약과 유대교 전통에 있다. 신명기 24장 1~4절은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내보낼 수 있다고 규정한다(자체 풀이). 문제는 이 '수치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구약 본문 자체에서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수 시대 랍비 전통 안에서도 이를 두고 두 학파가 갈렸다고 전해진다. 삼마이 학파는 이를 성적 부정에 한정된 좁은 사유로 해석했고, 힐렐 학파는 아내가 음식을 태우는 것 같은 사소한 잘못까지 포함하는 넓은 사유로 해석했다고 알려져 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어떤 이유로도 이혼이 정당한지 묻는 장면은 바로 이 랍비 논쟁을 배경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흥미로운 점은 '음행한 연고' 예외 조항이 마태복음에만 등장하고(마 5:32, 19:9), 마가복음 10장 11~12절과 누가복음 16장 18절에는 이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두고 신학자들의 설명이 갈린다. 어떤 학자는 마가·누가가 예외를 생략한 것이 예수의 원래 가르침이 예외 없는 절대적 금지였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어떤 학자는 마태가 자신의 유대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당시 통용되던 랍비적 논의를 반영해 예외를 명시적으로 덧붙인 것이라고 본다. 두 설명 모두 학계에서 지지자를 갖고 있고, 결론이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았다.
'음행한 연고'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의 정확한 범위도 논쟁거리다. 좁게 보는 쪽은 이를 레위기 18장이 금하는 근친 관계처럼 애초에 무효인 결합이나, 약혼 기간 중 발각된 부정에 한정된 특수한 사유로 읽는다. 넓게 보는 쪽은 이를 간음을 포함한 성적 부도덕 전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읽는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이 구절이 허용하는 이혼의 범위가 크게 달라진다.
천주교의 혼인무효 제도는 1983년 교회법(Code of Canon Law) 1141조 이하에 근거를 두고 있고, 유효하게 성립되고 완성된 혼인은 죽음 외에는 해소될 수 없다는 원칙을 전제한다. 다만 천주교 교회법 안에는 '바울로 특전'(Pauline privilege, 1143조 이하)이라는 별도 조항도 있다. 이는 비신자 사이의 혼인에서 한쪽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한 뒤 비신자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경우, 신앙을 위해 그 혼인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이다. 고린도전서 7장 15절을 교회법으로 제도화한 사례로 꼽힌다. 혼인무효 심사 절차는 2015년 교황 프란치스코의 교령 「미티스 유덱스」(Mitis Iudex Dominus Iesus)를 통해 심리 기간과 절차가 크게 간소화됐다.
종교개혁은 이 지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결혼을 성사(sacrament)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사회 제도로 재정의했다. 그러면서 간음과 배우자의 유기(遺棄)를 이혼과 재혼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했다. 이는 오늘날 다수 개신교단이 이혼·재혼에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신학적 뿌리로 흔히 지목된다.
정교회의 접근은 '아크리베이아'(엄격한 원칙 적용)와 '경륜'(oikonomia, 목회적 관용)이라는 두 원리의 긴장 속에서 이해된다. 4세기 신학자 대바실리우스의 교회법 규정에서부터 재혼을 완전히 금하지 않고 일정한 참회 기간을 거치게 하는 관행이 확인되며,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정교회는 이 원리에 따라 최대 세 번째 결혼까지는 주교의 허락을 받아 축복할 수 있다고 보지만, 네 번째 결혼은 허용하지 않는다. 재혼 예식에서는 화관을 씌우는 등 축제적 요소를 줄이고 참회를 강조하는 기도문을 사용해, 결혼이 여전히 하나님의 원래 뜻에는 못 미치는 '차선'임을 예식 자체로 드러낸다.
오늘날 다수 개신교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사유(가정폭력, 배우자의 중독, 정서적 학대 등)까지 목회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할 수 있는지를 계속 논의하고 있다. 이는 성경 본문의 문자적 범위를 넘어서는 목회적 확장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라는, 성경 해석과 목회 신학이 만나는 지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이혼과 재혼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결혼을 원칙적으로 해소할 수 없다고 보는 입장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가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을 금한 것으로 보고, 그 예외를 좁게 해석한다. 결혼을 하나님이 맺어 준, 원칙적으로 해소 불가능한 언약으로 이해해 이혼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애초에 유효한 혼인이 성립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혼인무효 제도를 별도로 둔다.
- 마태복음 19:3-9 — 예수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결합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답하고,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사람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었을 뿐이라고 말한 대목(자체 풀이)
- 결혼의 항구성을 강조해 온 교회 전통과 천주교 교회법(1141조 이하)
천주교, 일부 보수 개신교단
사유를 넓게 인정하는 목회적 입장
'음행한 연고'를 성적 부정 전반을 포괄하는 넓은 예외로 읽고, 고린도전서 7장 15절의 유기 사유도 함께 인정한다. 가정폭력처럼 결혼 생활이 회복 불가능하게 파탄난 경우까지 목회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한다.
- 고린도전서 7:15 — 믿지 않는 배우자가 스스로 떠나는 경우 믿는 배우자가 거기에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한 바울의 말(자체 풀이)
- 결혼 생활의 안전과 회복 가능성을 함께 고려하는 현대 목회신학의 흐름
다수 개신교단(장로교·감리교 등)
공통점 이혼이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결혼의 모습은 아니라고 보는 점, 그리고 이혼과 재혼을 겪은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돌봐야 한다는 목회적 태도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음행한 연고' 외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유까지 이혼과 재혼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신학 안에서도 결론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