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가 사람을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어졌다고 표현할 때 쓰는 말이며, 정확히 무엇을 닮았다는 뜻인지는 신학 안에서도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된다.
일상 비유
고대 왕이 자신이 직접 다스리기 힘든 먼 지역에 자기 얼굴을 새긴 석상을 세워 그 땅이 왕의 것임을 나타냈던 관습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 경우 사람은 하나님이 세상에 세운, 하나님을 대신해 이 땅을 돌보는 존재로 이해된다.
비유의 한계 그러나 석상은 생명이 없는 물건이지만 사람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비유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또한 이 비유는 '형상 = 땅을 다스리는 대리자 지위'라는 한 가지 설명 방식에 치우쳐 있어서, '형상 = 이성과 영혼을 닮음'이나 '형상 =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 맺는 능력'처럼 신학 전통 안에 함께 있는 다른 설명들을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
성경은 사람을 만들 때 하나님이 자기 모습을 닮게 만들자고 하셨다고 전해요(창세기 1장). 이때 쓰인 '형상'은 '닮은 모습'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몸이 없다고 하니, 겉모습이 닮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럼 무엇을 닮았다는 걸까요?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능력, 세상을 잘 돌보는 능력 같은 것을 닮았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옛날 왕들은 자기가 직접 갈 수 없는 먼 땅에 자기 얼굴을 새긴 돌을 세워 뒀대요. "여기는 내 땅이다"라는 뜻이었어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을 대신해 이 세상을 돌보는 자리에 있다는 뜻으로 설명되기도 해요. 그런데 돌은 살아 있지 않지만 사람은 살아 있으니, 이 비유도 완전히 맞지는 않아요.
창세기 1장 26~27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짓기로 하고, 그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고 전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 구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다만 정확히 '무엇을' 닮았다는 것인지는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아서, 이를 어떻게 채워 넣을지는 신학사 안에서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다뤄져 왔다.
이 표현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고대 근동의 왕권 관습에서 빌려 온다. 당시 왕들은 자신이 직접 다스리기 힘든 먼 지역에 자기 얼굴을 새긴 석상('형상')을 세워, 그 땅이 왕의 통치 아래 있음을 나타냈다. 이 배경을 근거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리고 돌보는 지위에 있다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기능적 견해). 그러나 이 비유는 완전하지 않다. 석상은 생명이 없는 물건이지만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이며, 이 비유는 '형상 = 다스리는 지위'라는 한 가지 설명에 치우쳐 있어서 신학 전통이 함께 이야기해 온 다른 설명들을 다 담지 못한다.
실제로 신학사에는 이와 다른 두 갈래의 설명도 함께 있다. 하나는 형상을 사람의 이성과 자유의지 같은 영적 능력 자체에 있다고 보는 설명(실체적 견해)으로,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으로 이 입장을 체계화했다. 다른 하나는 형상을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 맺는 상태, 곧 의로움에 있다고 보는 설명(관계적 견해)으로, 종교개혁자 장 칼뱅이 이를 강조했다. 칼뱅은 특히 사람이 원죄원죄원죄는 최초의 인류가 지은 잘못 때문에 그 뒤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 아래 놓인다고 보는 기독교의 가르침이다.로 타락한 뒤 이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는 점을 함께 강조했다.
천주교·정교회는 아퀴나스의 실체적 견해에 가까운 전통을 이어 왔고, 개신교 개혁주의 전통은 칼뱅의 관계적 견해를 강조해 왔다. 한편 현대 구약학은 교단과 상관없이 고대 근동 문헌과의 비교를 통해 기능적 견해를 함께 제시한다. 다수 현대 신학자는 이 세 설명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이성·관계·역할이라는 세 측면을 함께 포함하는 통합적 이해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흔한 오해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이 죄를 지은 뒤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9장 6절은 노아 홍수 이후에도 살인을 금하는 근거로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든다.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며, 다만 얼마나 손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학 전통마다 강조점이 다르다.
창세기 1장 26절의 '형상'(첼렘, tselem)과 '모양'(데무트, demuth)이라는 두 히브리어 단어는 오랫동안 해석사의 논쟁거리였다. 2세기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는 두 단어를 구분해, '형상'은 사람이 창조될 때 본래 지니고 태어난 것(이성과 자유의지 등)이고, '모양'은 사람이 성령과 협력하며 자라가야 할 목표(하나님과의 온전한 닮음)라고 설명했다. 이 구분은 형상은 타락 후에도 남고 모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방식으로 신학적 문제를 풀어내는 데 유용했지만, 현대 히브리어 문법 연구는 두 단어가 창세기 본문 안에서 사실상 같은 뜻을 가리키는 평행 표현(히브리 시가에 흔한 동의어 반복)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오늘날 다수 구약학자는 이레나이우스식 구분을 원문의 문법적 근거보다는 후대의 신학적 필요에서 나온 해석으로 본다.
20세기 후반 이후 구약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해석은 고대 근동의 왕권 이데올로기와의 비교에서 나왔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헌은 왕을 신의 '형상'으로 부르며, 왕이 신을 대신해 땅을 다스리는 존재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일부 구약학자들은 창세기 1장이 이 왕권 언어를 모든 사람에게 확장 적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고대 근동에서는 왕 한 사람만 신의 형상으로 불렸지만, 창세기는 모든 사람(남자와 여자 모두)이 그 지위를 갖는다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창세기 1장 28절이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는 대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이 왕권 비유가 형상 개념의 전부를 설명하는지, 아니면 여러 측면 가운데 하나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서방 신학의 실체적 견해와 관계적 견해 사이의 긴장은 중세와 종교개혁기를 거치며 계속 다뤄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활용해 형상을 인간 영혼의 지성적 능력(이성)에 위치시켰고, 이 능력은 타락 이후에도 본질적으로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보았다(다만 그 올바른 사용 능력은 약화되었다고 설명한다). 반면 장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형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적 의로움에 있다고 보아, 타락으로 인해 이 형상이 훨씬 심각하게, 사실상 그 핵심이 파괴되다시피 손상되었다고 강조했다. 이 차이는 이후 인간 이성과 타락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로 볼 것인가에 관한 서방과 개혁주의 신학의 오랜 강조점 차이로 이어졌다.
현대 신학에서는 인간 예외주의에 대한 재검토와 맞물려 형상 개념을 새롭게 조명하는 논의도 있다. 예컨대 형상을 개별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공동체성, 특히 창세기 1장 27절의 남녀 창조와 연결한 해석) 자체에서 찾으려는 시도, 또는 형상을 다른 피조물에 대한 책임 있는 청지기적 역할과 연결해 생태신학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런 새로운 시도들은 전통적인 실체적·관계적·기능적 견해를 대체하기보다, 그 위에 새로운 강조점을 더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신학 논의 안에서 함께 다뤄진다.
관련 성구
역사적 형성 과정
- -600창세기 본문의 형성(정확한 저작 연대는 학설이 갈린다) — 창세기 1장이 최종 형태로 정리된 시기는 학설이 갈리지만, 다수 구약학자는 고대 근동에서 왕이나 신상을 '형상'으로 부르던 관습이 이 표현의 배경에 있을 것으로 본다.
- 180이레나이우스의 형상과 모양 구분 —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가 창세기 1장 26절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해, 형상은 사람에게 본래 주어진 것이고 모양은 사람이 자라가며 완성해야 할 것이라는 해석 틀을 제시했다.
- 1270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적 영혼, 곧 지성과 의지에 있다고 설명하며 이후 서방 신학의 대표적 해석(실체적 견해)으로 자리 잡았다.
- 1559칼뱅의 『기독교강요』(최종판) — 장 칼뱅이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있는 의로움과 거룩함에 있다고 설명하며(관계적 견해), 인간의 타락으로 이 형상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강조했다.
교파별 차이
- 천주교·정교회(아퀴나스 계열 전통) — 형상을 인간의 이성·자유의지 같은 영적 능력 자체에 있다고 보는 '실체적(구조적) 견해'를 특히 강조한다.
- 개신교 개혁주의 전통(칼뱅 계열) — 형상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 의로움에 있다고 보는 '관계적 견해'를 강조하며, 타락 이후 이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고 본다.
- 현대 구약학(교단을 가로지르는 학술적 흐름) — 고대 근동의 왕권 이데올로기와 비교해, 형상을 사람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리는 지위와 역할로 보는 '기능적 견해'를 제시한다.
- 다수 현대 신학자 — 위 세 견해를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이성·관계·역할을 함께 포함하는 통합적 이해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흔한 오해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하나님과 겉모습이 똑같다는 뜻이다.
⭕전통 신학은 하나님이 몸이 없는 영이라고 보므로, '형상'은 외모의 닮음이 아니라 이성·도덕성·관계 능력·다스리는 지위 같은 비물질적 차원의 닮음으로 이해된다. 다만 어느 측면을 더 강조하는지는 신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죄를 지은 뒤 완전히 사라졌다.
⭕창세기 9장 6절은 노아 홍수 이후에도 살인을 금하는 근거로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든다.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이해이며, 다만 얼마나 손상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