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
도시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이 길가에 서 있었는데, 아무도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다. 그는 결국 나무 위로 올라갔다.
누가복음 · 누가복음 19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3분
이야기
상황
여리고라는 도시에 삭개오가 살았어요. 삭개오는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어요. 그것도 우두머리였어요. 그때 그 땅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어요. 세금 걷는 일은 동네 사람이 맡았어요. 삭개오가 바로 그 일을 했어요. 더 걷어도 막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삭개오는 부자가 되었어요. 대신 이웃들이 그를 미워했어요. 길에서 인사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아무도 그의 집에 놀러 오지 않았거든요. 부자였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느 날 소문이 돌았어요. 예수가 이 도시를 지나간다는 소문이었어요. 삭개오는 그 사람이 보고 싶었어요. 왜 그랬는지 성경은 말해 주지 않아요. 그냥 궁금했을 수도 있어요. 삭개오는 집을 나섰어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다. 예수는 여리고라는 도시를 지나던 중이었다. 여리고는 요단 계곡의 낮고 따뜻한 오아시스 도시였다. 값비싼 향료의 원료가 나고, 상인들이 오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세관을 두기에 좋은 자리였다는 뜻이다. 그 세관의 책임자가 삭개오였다. 누가복음은 그를 '세리장'이라고 부른다. 신약에서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여기뿐이다. 그리고 그가 부자였다는 말을 곧바로 덧붙인다. 당시 세금은 로마가 직접 걷지 않았다. 걷을 권리를 넘겨받은 사람이 대신 걷었다. 정해진 액수를 위로 올려 보내고, 그 위에 얼마를 더 붙이든 자기 몫이었다. 이 구조 때문에 세리는 두 번 미움을 샀다. 점령군의 돈줄 노릇을 한다는 것이 하나였다. 이웃의 주머니에서 자기 몫을 챙긴다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게다가 세리는 외국인이 아니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삭개오가 왜 예수를 보려 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뿐이다. 그날 그는 사람들이 몰린 길로 걸어 나왔다.
무대는 여리고다. 사해 북쪽 요단 계곡에 자리한 이 도시는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이고, 겨울에도 따뜻하다. 헤롯 대왕이 겨울 궁전을 지은 곳이며, 향유의 원료가 되는 발삼 재배지가 왕실 수입원으로 관리되던 지역이기도 하다. 요단강을 건너오는 길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라 물자와 사람이 통과했다. 통행세와 관세를 걷는 자리로서 수익성이 높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여기에 근거한다. 누가복음이 삭개오에게 붙인 직함은 그리스어 '아르키텔로네스(architelōnēs)'다. '텔로네스(세금·통행료 징수인)' 앞에 '으뜸'을 뜻하는 접두어가 붙은 형태로, 신약 전체에서 이 한 곳에만 나온다. 그리스어 문헌 전반에서도 용례가 드물어, 정확히 어떤 직위였는지는 확정되지 않는다. 여러 징수인을 거느린 도급 책임자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조세 제도의 세부는 학계에서 논의가 갈린다. 공화정기 로마가 속주 세금 징수를 대규모 청부업자 집단(푸블리카니)에게 경매로 넘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제국 초기 유대에서는 인두세·토지세 같은 직접세를 로마 당국이 지방 유력자를 통해 관리했고, 텔로나이는 주로 통행세·관세 같은 간접세를 도급받아 걷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복음서의 세리를 곧바로 공화정기 푸블리카니와 동일시하는 서술은 이 점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확실한 것은 징수인이 초과 징수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구조였고, 그 구조가 원한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이다. 세리를 향한 사회적 평가를 설명할 때 랍비 문헌이 자주 인용된다. 세리의 법정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거나, 그가 다녀간 집을 부정하게 여겼다는 규정들이다. 다만 이 자료들은 2세기 이후에 편집된 것이므로, 1세기 여리고의 실제 관행에 그대로 투사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름도 눈여겨볼 만하다. '삭개오'는 히브리어 '자카이' 계열의 이름으로, '깨끗한' 또는 '결백한'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에스라 2:9와 느헤미야 7:14에 같은 형태의 가문 이름이 나온다. 유대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로마의 세금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장면의 긴장이며, 이름의 뜻과 그의 평판 사이의 간극은 오래전부터 주석가들이 지적해 온 대목이다. 배치도 우연이 아니다. 바로 앞 18장에서 재산이 많은 관원 한 사람이 예수를 찾아왔다가 소유를 정리하라는 말을 듣고 얼굴이 어두워진 채 돌아간다. 그 직후 누가는 부자를 한 명 더 등장시키는데, 이번에는 정반대의 결말이 나온다. 두 장면을 나란히 읽도록 설계한 구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독법이다.
사건
길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어요. 삭개오는 키가 작았어요. 사람들 등에 가려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아무도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어요. 삭개오는 앞으로 뛰어갔어요. 그리고 길가 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그때는 어른이 나무에 오르면 놀림을 받았어요. 그래도 삭개오는 올라갔어요. 잠시 뒤 예수가 그 나무 아래 멈췄어요.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어요. 예수는 삭개오의 이름을 불렀어요. 오늘 저녁은 삭개오네 집에서 먹겠다고 했어요. 삭개오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왔어요. 얼굴이 환해졌어요. 그런데 구경하던 사람들은 웅성거렸어요. 왜 하필 저 집에 가느냐는 것이었어요.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들 했어요.
문제는 길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군중의 태도다.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드는 사람이 뒤에 서 있는데, 아무도 앞을 내주지 않는다. 돈은 있었지만 자리는 없었던 셈이다. 그는 앞질러 달려가 길가의 나무에 올랐다. 돌무화과나무였다. 가지가 낮게 벌어져 오르기 쉬운 나무다. 다만 그 시대에 어른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뛰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체면을 버리는 행동에 가까웠다는 지적이 많다. 본문은 그의 속마음을 적지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는 드러난다. 그는 창피를 감수하고서라도 보려 했다. 예수는 그 나무 아래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는다. 이어진 말은 부탁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웠다. 오늘 묵어갈 곳이 삭개오의 집이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남의 집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는 일은 친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 사람 편에 서겠다는 공개 표시였다. 그래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하필 죄인으로 찍힌 자의 집에 들어간다는 불평이었다. 초대를 받은 쪽이 아니라 초대를 자청한 쪽이 예수였다는 점도 이 불평을 키웠을 것이다.
그리스어 본문에는 잘 알려진 모호함이 하나 있다. '무리 때문에 볼 수 없었으니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서, 키가 작았다는 말의 주어가 문법적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대다수 번역과 주석은 삭개오로 읽지만, 예수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소수 독법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또 여기 쓰인 명사 '헬리키아(hēlikia)'는 키와 나이를 모두 뜻할 수 있는 단어다. 다수 독법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본문이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매끄럽지 않다는 점은 알아 둘 만하다. 나무의 종이 특정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시코모레아(sykomorea)', 즉 돌무화과나무(Ficus sycomorus)는 줄기가 굵고 가지가 낮게 벌어져 오르기 쉬우며, 따뜻한 저지대에서 자란다. 요단 계곡과 해안 평야가 그 서식지이고, 고도가 높은 예루살렘 산지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여리고라는 무대와 이 수종이 맞아떨어진다는 점은, 지리적 세부에 관심을 둔 저자의 서술로 평가되곤 한다. 달려가는 행동과 나무에 오르는 행동을 '명예와 수치'의 문화 코드로 읽는 해석은 20세기 후반 이후 널리 퍼졌다. 지중해 사회를 명예 중심 문화로 모델화한 인류학 연구가 신약 해석에 도입된 결과다. 다만 이 모델을 1세기 유대 사회에 균질하게 적용하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지역과 계층에 따른 편차를 지운다는 지적이다. 이 이야기에서 그의 행동이 체면을 깎는 일이었다는 정도는 무리 없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식탁은 누가복음의 반복 모티프다. 이 책에서 예수는 계속 누군가와 밥을 먹고, 그때마다 상대가 논란이 된다. 5장에서 세리 레위의 집 잔치가 문제가 되고, 15장에서는 '저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함께 먹는다'는 비난이 세 개의 비유를 촉발한다. 여기서 군중이 내는 반응을 서술한 동사 '디아공귀조(diagongyzō, 수군거리다)'는 신약에서 딱 두 번, 15장의 그 장면과 이 장면에만 쓰인다. 두 대목을 짝으로 읽으라는 신호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단어는 70인역(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이 불평하는 장면에 쓰이던 계열의 말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이 만남에서 조건을 제시한 사람은 없다. 예수는 삭개오의 직업이나 과거를 언급하지 않고, 잘못을 뉘우치고 방향을 바꾸라고(교회 용어로는 '회개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본문의 순서상 자기 초대가 먼저 오고 삭개오의 선언이 뒤에 온다. 이 순서를 어떻게 읽느냐가 다음 막의 해석 논쟁으로 이어진다.
결과
삭개오는 사람들 앞에 섰어요.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어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웃에게 주겠다고 했어요. 더 걷은 돈은 네 배로 갚겠다고 했어요. 네 배는 정말 큰돈이에요. 그러면 부자로 살 수 없어요. 삭개오는 그걸 알면서 말했어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렇게 했어요. 예수는 그 말을 듣고 대답했어요. 이 집이 오늘 살아났다고 했어요. 그리고 삭개오도 남이 아니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밀어낸 것을 도로 뒤집은 말이에요. 그날 삭개오는 두 가지를 잃었어요. 돈의 절반과 오랜 미움이에요. 대신 이웃을 다시 얻었어요. 밀려났던 사람이 돌아온 날이었어요. 예수는 곧 예루살렘으로 떠났어요. 그 길이 마지막 길이 돼요.
삭개오는 그 자리에 서서 말했다. 내용은 두 가지였다. 가진 것의 절반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 몫으로 돌리겠다는 것이 하나였다. 그동안 부당하게 걷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물어 주겠다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네 배라는 숫자는 아무렇게나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시 법 관행에서 네 배는 도둑질에 물리는 가장 무거운 배상 수준에 가까웠다. 반면 스스로 잘못을 밝히고 갚는 경우에 대한 구약 규정은 훨씬 가볍다. 원금에 5분의 1을 더하면 되었다. 삭개오는 자기에게 가장 불리한 기준을 골라 말한 셈이다. 예수의 대답도 두 가지였다. 이 집이 오늘 건짐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였다. 이 사람도 여전히 아브라함 가문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뒤의 말이 특히 무겁다. 사람들은 이미 세리를 유대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낸 상태였다. 예수는 그 판정을 뒤집었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다니는 이유를 한 줄로 덧붙인다. 제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이라는 취지였다. 이 만남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직전에 놓여 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 하루 거리다. 누가복음에서 이 장면은 긴 여행기의 마지막 정거장이다. 다음 장면은 도시로 들어가는 행렬이고, 그 뒤가 마지막 한 주다.
이 대목의 그리스어 동사 두 개가 오랜 논쟁의 진원지다. 삭개오가 말하는 '주다'와 '갚다'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여 있다. 그리스어 현재형은 미래의 결심을 표현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미래적 현재), 습관적으로 해 오던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습관적 현재).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으로 읽으면 이 장면은 회심 이야기가 되고, 이미 그렇게 해 왔다는 해명으로 읽으면 군중의 낙인에 대한 반박이 된다. 두 독법의 근거는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 정리한다. 배상 규정의 배경은 이렇다. 출애굽기 22장은 양을 훔쳐 팔거나 잡은 경우 네 배로 갚게 한다. 로마법에서도 현행범으로 붙잡힌 절도(푸르툼 마니페스툼)에 네 배 배상이 부과되었다. 반대로 레위기 6:5와 민수기 5:7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갚는 경우 원금에 20퍼센트를 더하도록 정한다. 어느 계통을 배경으로 읽든, 그가 스스로 택한 기준이 자진 신고에 요구되는 수준보다 훨씬 높다는 점은 같다. 예수의 응답에서 '구원'으로 옮기는 그리스어 소테리아(sōtēria)는 무너진 상태에서 건져 냄을 뜻하는 폭넓은 말이다.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서술된 점을 눈여겨보는 해석이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개인이 아니라 가정 단위로 상황이 바뀌는 장면을 반복해서 그린다(행 16:31 등).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표현도 누가복음 안에서 계열을 이룬다. 3장에서 세례 요한은 혈통만 내세우는 태도를 경고하고, 13장에서 예수는 오랫동안 병으로 굽어 있던 여자를 '아브라함의 딸'이라 부르며 안식일 논쟁을 정면으로 받는다. 즉 이 호칭은 혈통 확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밀어낸 사람을 다시 그 안으로 불러들이는 선언으로 기능한다. 마지막 한 문장(눅 19:10)은 이 이야기의 요약이자 누가복음 전체의 요약으로 자주 인용된다. 자기를 가리켜 쓰는 호칭 '사람의 아들'과 함께, 제자리를 벗어난 것을 찾아내는 일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하는 구조다. 에스겔 34장에서 흩어진 양을 직접 찾아 나서겠다고 말하는 목자 이미지의 반향으로 읽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15장의 잃은 양·잃은 동전·집 나간 아들 이야기가 여기서 실제 인물 한 사람으로 구체화된다고 보는 독법도 같은 계열이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므나 비유(19:11 이하)도 이 장면과 함께 읽힌다. 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곧 나타날 줄로 기대했기 때문에 예수가 그 비유를 말했다고 적는다. 예루살렘 입성 직전, 기대가 최고조에 이른 지점에 배치된 조정 장치인 셈이다. 비유에 나오는 '왕권을 받으러 먼 나라로 간 귀인' 설정을 두고,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BC 4년 왕위 승인을 받으러 로마로 갔던 사건을 청중이 떠올렸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아켈라오의 궁도 여리고에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지만, 확정된 해석은 아니다. 후대 전승은 삭개오가 나중에 가이사랴라는 도시의 감독(그 지역 교회들을 총괄하던 직책)이 되었다고 전한다. 다만 이 전승은 4세기 이후 문헌에 등장하며, 역사적 근거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 세리
- 로마가 지배하던 지역에서 세금·통행료를 대신 걷던 사람. 로마는 징수 실무를 현지인에게 넘겼고, 정해진 액수만 올려 보내면 그 위에 붙인 금액은 징수인의 몫이 되는 구조였다. 감독은 느슨했고 뒤에는 점령군의 힘이 있었다. 그래서 세리는 '점령군의 하수인'이자 '이웃의 돈을 뜯는 사람'이라는 두 겹의 미움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이었다. 배신자라는 낙인이 붙은 이유다.
- 여리고
- 사해 북쪽, 해수면보다 낮은 오아시스 도시. 겨울에도 따뜻해 헤롯이 겨울 궁전을 지었고, 값비싼 향료의 원료가 재배되던 곳이다. 요단강을 건너오는 길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라 통행세를 걷기에 유리했다. 가난한 변두리가 아니라 돈이 흐르는 도시였다.
- 돌무화과나무
- 무화과와 비슷한 열매가 열리는 큰 나무. 줄기가 굵고 가지가 낮게 벌어져 어른도 쉽게 오를 수 있다. 따뜻한 저지대에서 자라며 요단 계곡이 대표적인 서식지다.
-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 그 시대 유대 사회에서 누구와 한 상에 앉느냐는 사적인 취향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인정한다는 공개 표시에 가까웠다. 그래서 예수가 어느 집에 들어가 식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번 논란이 되었다.
- 아브라함의 후손
- 유대인이 자기 정체성을 말할 때 쓰던 표현. 단순한 혈통 확인이라기보다 '이 공동체의 정식 구성원'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세리에게 이 말을 붙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미 그를 명단에서 지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 네 배 배상
- 당시 법 관행에서 네 배는 절도에 물리는 가장 무거운 수준의 배상이었다. 반면 스스로 잘못을 밝히고 갚을 때의 구약 규정은 원금에 5분의 1을 더하는 정도였다. 삭개오가 말한 기준은 자진 신고에 요구되는 수준보다 훨씬 높다.
흔한 오해
❌삭개오는 어린아이거나 아이처럼 왜소한 사람이었다.
⭕성인 남성이고, 여러 징수인을 거느린 책임자였으며, 본문이 직접 부자라고 적는다. 키가 작다는 서술이 어린이 그림책과 동요를 통해 퍼지면서 생긴 인상에 가깝다. 덧붙이면 그리스어 문장에서 '키가 작았다'의 주어가 문법적으로 완전히 확정되지는 않는다는 소수 견해도 있다.
❌세리는 로마에서 파견된 외국인 관리였다.
⭕같은 지역에서 나고 자란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미움이 훨씬 컸다. 낯선 정복자가 아니라 이웃이 이웃에게 돈을 걷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먼저 잘못을 뉘우쳤고, 그 대가로 예수가 그의 집에 갔다.
⭕본문의 순서는 반대다. 예수가 먼저 이름을 부르고 그 집에 묵겠다고 말한 뒤에 삭개오의 선언이 나온다. 예수가 그의 직업이나 과거를 지적하는 장면은 이 이야기에 없다. 그 순서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아래에서 두 입장으로 나뉜다.
❌세리는 예외 없이 도둑이었다.
⭕제도가 초과 징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사료로 뒷받침된다. 다만 개별 징수인이 실제로 얼마나 더 걷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세리를 향한 멸시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랍비 문헌도 2세기 이후의 것이라, 1세기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조심스럽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간절히 노력하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다.
⭕나무에 오른 노력은 이야기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예수가 걸음을 멈추고 먼저 이름을 불렀다는 대목이고, 본문은 그가 어떻게 이름을 알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노력만 강조하면 '자격을 갖추면 받아들여진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 본문이 뒤집으려 한 것이 바로 그 자격 심사였다는 독법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삭개오는 돈이 아주 많았어요. 그런데 곁에 아무도 없었어요. 예수는 그 집에 먼저 찾아갔어요. 착해지면 오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오늘 가겠다고 했어요. 삭개오가 달라진 건 그다음이에요. 여러분 곁에 아무도 없는 친구가 있나요? 먼저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있나요?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순서다. 삭개오가 달라진 뒤에 예수가 그 집에 간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 집에 가겠다고 한 뒤에 삭개오가 달라진다. 기독교가 '은혜'라는 말로 설명해 온 구도가 여기에 있다. 받을 자격을 갖춰서 받는 것이 아니라, 받고 난 뒤에 달라진다는 순서다. 다만 이 본문을 순서 문제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다. 삭개오의 변화는 감정이나 결심이 아니라 숫자로 표현된다. 절반, 그리고 네 배. 그가 말한 대로 하면 생활 수준이 완전히 달라진다. 누가복음은 돈을 다루는 방식이 바뀌지 않은 변화를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또 하나. 여기서 회복된 것은 그의 재산이 아니라 그의 자리다. 그는 도시에서 가장 돈이 많았지만 길에서 아무도 비켜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 그는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을 '저 사람은 이미 끝났다'고 판정하는 일은 누가 하는가. 그리고 그 판정이 뒤집히는 순간은 대체로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누가복음은 신약 27권 가운데 돈과 소유를 가장 집요하게 다루는 책으로 꼽힌다. 마리아의 노래에서 배부른 자가 빈손으로 돌아가고, 평지의 가르침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되며, 어리석은 부자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삭개오 이야기는 그 흐름의 도착점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회복은 재산의 재분배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방향 전환은 언제나 소유가 움직이는 방식으로 확인된다. 동시에 이 장면은 누가복음의 다른 축, 곧 '누가 이 공동체 안에 있는가'라는 물음과 맞물린다. 목자, 사마리아인, 과부, 이방인, 세리. 자격 심사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계속 앞자리로 불려 나온다. 삭개오에게 붙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호칭은 그 물음에 대한 이 책의 대답을 압축한다. 명단을 작성하는 주체가 군중이 아니라는 선언인 셈이다. 해석사에서 이 본문은 회심 이야기의 표본으로 오래 사용되었다. 특히 개신교 설교 전통에서 그렇다. 20세기 후반 이후 제기된 '해명 독법'은 그 전제를 흔들었고,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따라 나왔다. 우리가 이 본문을 회심 이야기로 읽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낙인찍힌 사람이 실제로 나쁜 사람이었어야 이야기가 더 편해지는 것은 아닌가. 두 독법이 서로 다른 지점에 놓아 두는 것도 다르다. 회심 독법에서는 변화의 가능성이, 해명 독법에서는 집단이 만든 낙인의 폭력성이 전면에 온다. 어느 쪽이 본문의 원래 의도였는지 그리스어 문법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 다만 두 독법 모두 같은 자리에 도착한다는 점은 짚어 둘 만하다. 이야기가 끝날 때 삭개오는 나무 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삭개오의 선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방향을 바꾼 것인가, 억울함을 밝힌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회심으로 보는 입장 (전통적 독법)
예수의 방문을 계기로 삭개오가 그 자리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기로 선언했다고 읽는다. '주겠다', '갚겠다'는 말은 앞으로의 결심이다.
- 그리스어 현재형이 임박한 결심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용례가 있다는 점
- 예수가 이어서 '오늘 이 집이 건짐을 받았다'고 말해, 그날 무언가가 바뀌었음을 전제한다는 점
- 바로 앞 18장의 부자 관원이 소유를 놓지 못해 돌아선 것과 이 장면이 대비를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는 점
- 누가복음이 방향 전환과 재물 처분을 반복해서 연결한다는 점
대다수 교단의 설교 전통과 전통적 주석에서 널리 유지되는 독법
해명으로 보는 입장 (변호 독법)
삭개오는 이미 재산의 절반을 나누고 초과 징수를 배상해 온 사람이며, 군중의 낙인이 부당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읽는다.
- 두 동사가 습관적으로 해 오던 행위를 가리키는 현재형으로 읽히는 것이 문법적으로 더 자연스럽다는 주장
- 본문 어디에도 예수가 그의 죄를 지적하거나 회개를 요구하는 말이 없다는 점
- '제자리에서 밀려난 자'는 도덕적 악인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배제된 사람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
- 이렇게 읽으면 잘못을 저지른 쪽이 삭개오가 아니라 그를 단정한 군중이 되어, 누가복음의 다른 장면들과 구도가 맞아떨어진다는 주장
20세기 후반 이후 일부 신약학자들이 제기했고, 지금도 소수 견해에 속한다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예수의 초대가 삭개오의 어떤 조건 충족보다 먼저 왔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또 이야기의 결말이 그를 공동체 안으로 되돌려 놓는 데 있다는 점, 그리고 그 회복이 돈이 흐르는 방향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도 공통으로 인정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그리스어 현재형만으로는 결심인지 습관인지 확정할 수 없다. 본문이 삭개오의 과거 행실을 직접 서술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읽든 빈칸을 독자가 채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