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
동생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보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틀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도착했을 때 장례는 이미 끝나 있었다.
요한복음 · 요한복음 11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4분
이야기
상황
예루살렘 가까운 마을에 남매 셋이 살았어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남동생 나사로예요. 예수와 아주 친한 사이였어요. 제자도 아니고 그냥 친구였어요. 어느 날 나사로가 크게 아팠어요. 누나들은 급히 사람을 보냈어요. 예수에게 소식을 전하려고요. 그런데 예수는 바로 오지 않았어요. 있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렀어요. 왜 그랬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아요. 예수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늦었어요. 나사로는 이미 죽었어요. 무덤에 넣은 지 나흘이나 지났어요. 집에는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 가득했어요.
예루살렘 성문에서 걸어서 한 시간이 안 되는 곳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 마르다와 마리아, 남동생 나사로가 살았다. 요한복음은 이 집을 예수가 아끼던 집으로 소개한다. 제자도 아니고 몰려다니던 군중도 아니었다. 그냥 친구였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누이들은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했다. 전갈에는 부탁이 붙어 있지 않았다. 아끼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이 전부였다. 굳이 와 달라고 적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도 있던 자리에서 이틀을 더 머물렀다. 본문은 이 지체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적는다. 짧은 설명이 하나 붙어 있기는 하다. 이 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이다. 다만 그 한마디가 이틀의 공백을 다 채워 주지는 않는다. 당시 그는 요단강 건너편에 있었다.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뒤 피해 있던 참이었다. 베다니로 간다는 것은 그 도시 코앞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제자들이 말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마는 결국 같이 가서 죽자는 식으로 말했다고 기록된다. 체념인지 각오인지는 문장만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그가 마을에 닿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에 안치된 지 나흘이 지나 있었다. 조문객들은 예루살렘에서 건너와 아직 집에 머물고 있었다. 애도 기간이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무대는 베다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킬로미터, 감람산 동쪽 비탈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요한복음은 거리를 십오 스다디온이라고 굳이 명시해 두는데(3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이 수치는 예루살렘의 조문객이 수시로 오갈 수 있었다는 상황을 설명하는 장치로 읽힌다. 뒤에 이어질 전개, 즉 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 곧장 예루살렘 지도부에 보고되는 흐름이 이 거리 위에 놓여 있다. 오늘날 이 마을의 아랍어 지명 알에이자리야는 나사로의 이름에서 왔다. 이름부터 짚어 두면, 나사로는 히브리어 엘아자르(엘르아살)의 그리스어 축약형이고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이다. 이름의 뜻과 이야기의 내용이 겹친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우연으로 보는 쪽과, 서술자가 의도적으로 골라 쓴 이름으로 보는 쪽이 갈린다. '나흘'은 이 장의 핵심 장치다. 후대 유대 문헌에는 영혼이 사흘 동안 시신 곁에 머물다가 나흘째에 떠난다는 관념이 나타난다. 다만 그 자료(창세기 라바 등)는 3세기 이후에 편집된 것이라, 1세기에 이미 널리 통용되던 생각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나흘이라는 시점이 '되돌릴 수 없음'을 표시한다는 데는 대체로 견해가 모인다.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 세 권을 함께 부르는 말)에 나오는 소생 기사들과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하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숨을 거둔 직후였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례 행렬 도중이었다. 요한복음은 그 시간표를 훨씬 뒤로 밀어 놓는다. 이틀의 지체는 해석이 갈리는 대목이다. 서술 자체의 필요, 즉 나흘이라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문학적 구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본문에 적힌 대로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신학적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도 있다. 요단강 건너편(베레아 지역)에서 베다니까지의 이동 거리가 하루 이상 걸린다는 점을 들어, 어차피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일정을 요한이 신학적으로 재배치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본문은 이 가운데 어느 쪽도 확정해 주지 않는다. 연대 위치도 짚어 둘 만하다. 요한복음의 구조에서 이 사건은 마지막 유월절 직전에 놓인다. 유월절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대 최대 절기로, 순례객이 예루살렘에 몰리는 때였다. 즉 이 이야기는 가장 사람이 많고 정치적으로 예민한 시기의 문턱에서 벌어진다.
사건
마르다가 마을 밖까지 뛰어나왔어요. 그리고 예수에게 말했어요.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요." 마리아도 나중에 똑같은 말을 했어요. 두 사람 다 많이 슬펐어요. 원망이 섞인 말이었을 거예요. 예수는 무덤으로 가자고 했어요. 가는 길에 예수도 울었어요. 사람들이 수군거렸어요. 아픈 사람도 고쳐 주던 분이 왜 늦었냐고요.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굴이었어요. 입구는 큰 돌로 막혀 있었어요. 예수가 돌을 치우라고 했어요. 마르다가 말렸어요. 나흘이나 지나서 냄새가 날 거라고요. 그래도 사람들은 돌을 옮겼어요.
소식을 들은 마르다가 마을 밖까지 나와 그를 맞았다. 첫마디는 원망에 가까웠다. 제때 도착했더라면 동생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뒤이어 나온 마리아도 같은 취지의 말을 반복한다. 두 사람이 그동안 나흘 내내 그 말을 되뇌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다. 마르다는 죽은 사람이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유대 사회의 한 갈래가 갖고 있던 생각으로, 세상 끝에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을 일으킨다는 기대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었다. 예수의 대답은 그 시점을 앞으로 당긴다. 살아남과 생명은 언젠가 올 사건이 아니라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묶여 있다는 취지였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대목 가운데 하나다. 무덤으로 가는 길에 예수는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본문은 그가 속에서 격한 감정을 느꼈고, 결국 울었다고 적는다. 원문에 쓰인 낱말은 단순한 슬픔보다 훨씬 거친 감정을 가리킨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반응도 갈렸다. 그를 아꼈던 모양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고, 눈먼 사람도 고쳤다면서 왜 이 사람은 못 살렸느냐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굴이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그가 돌을 치우라고 하자 마르다가 막아선다. 나흘이 지났으니 냄새가 날 것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만류였다. 그럼에도 돌은 옮겨졌다. 예수는 소리 내어 기도했다. 본문은 그 기도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둘러선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한 것이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무덤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죽은 이의 이름을 불렀다. 밖으로 나오라는 부름이었다.
이 장의 대화 구조는 요한복음이 즐겨 쓰는 방식 그대로다. 상대가 한 층위에서 알아듣고, 예수가 그 단어를 다른 층위로 끌고 간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난다'는 종말의 기대를 말한다. 이는 당시 바리새파 계열이 공유하던 견해로, 사두개파는 이를 부정했다(행 23:8). 즉 마르다의 대답은 개인의 신념이라기보다 당대의 표준적 신앙 언어에 가깝다. 예수의 응답은 그 미래 시제를 현재로 끌어온다. 요한복음의 일곱 개 '나는 ~이다' 진술 가운데 하나가 여기 놓이며, 학계에서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요한 특유의 시간관을 압축한다. 세상 끝에 일어날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만 요한복음에도 마지막 날을 말하는 구절들이 함께 남아 있어(요 6:39 등), 이 두 시간관의 관계를 어떻게 볼지는 오래된 논쟁거리다. 감정을 묘사한 그리스어 낱말이 특히 많이 논의된다. 사용된 동사 엠브리마오마이(embrimaomai)는 본래 말이 콧김을 내뿜는 소리에서 온 말로, 분노나 격한 억누름을 뜻한다. 한국어 성경들이 '비통히 여기다', '심령에 통분히 여기다' 등으로 옮기는 대목이다. 문제는 그 감정의 대상이다. 죽음 자체를 향한 분노로 읽는 견해, 둘러선 사람들의 불신을 향한 것으로 읽는 견해, 당시의 과장된 곡(哭) 관습에 대한 반응으로 읽는 견해가 나란히 존재한다. 뒤이어 나오는 짧은 문장, 곧 그가 울었다는 서술은 한국어와 영어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로 자주 꼽히며, 여기 쓰인 동사는 통곡이 아니라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쪽에 가깝다. 주변 사람들의 곡소리를 가리킬 때 쓴 동사와 다른 단어라는 점이 자주 지적된다. 소리 내어 한 기도에 대해서는 비판적 독법도 있다. 본문 스스로 그것이 둘러선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한 기도였다고 밝히기 때문에, 서술자가 장면을 신학적으로 구성한 흔적으로 보는 견해다. 반대로 이를 공개 재판정에서의 진술처럼 이해해, 이 일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증인들 앞에서 분명히 하려는 절차로 읽는 견해도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격 대비도 자주 언급된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는 음식 준비에 분주한 인물로, 마리아는 앉아서 듣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요한복음 11장에서도 마르다가 먼저 뛰어나오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다가 뒤늦게 나온다. 두 책이 독립적으로 같은 성격 묘사를 공유한다는 점을 들어, 이 남매에 대한 전승이 복수의 계열에 존재했다고 보는 근거로 삼는 연구가 있다. 한편 마르다의 고백은 공관복음에서 베드로가 하는 고백과 내용상 대응한다는 지적도 있다. 요한복음이 그 자리에 여성을 놓았다는 점은 여성 인물의 비중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된다.
결과
잠시 뒤 나사로가 걸어 나왔어요. 몸에는 아직 천이 감겨 있었어요. 얼굴도 천으로 덮여 있었어요. 예수가 풀어 주라고 했어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어떤 사람은 무서워졌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어요. 높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어요. 높은 사람들은 회의를 열었어요. 그리고 예수를 없애기로 했어요. 사람을 살린 일이 도리어 큰 위험이 된 거예요. 나사로도 위험해졌어요. 그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이 이야기 다음부터 예수의 마지막 한 주가 시작돼요.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몸에는 아직 장례용 천이 감겨 있었고 얼굴도 덮여 있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라고 했다. 살아난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마지막 동작을 주변 사람들의 손에 맡긴 셈이다. 요한복음은 나사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적지 않는다. 그가 겪은 나흘에 대해서도 한 줄이 없다. 이 침묵은 이 이야기가 나사로의 체험담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반응은 갈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상당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일을 종교 지도부에 보고했다. 이어지는 장면이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이다. 산헤드린이라 불리던 유대 최고 의결기구가 소집된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종교·사법 문제를 다루던 기구였다. 회의의 걱정은 신학이 아니라 정치였다. 사람들이 계속 몰리면 로마가 개입해 성전과 민족을 짓밟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결론을 정리한다. 한 사람이 대신 죽는 편이 민족 전체가 무너지는 것보다 낫다는 취지였다. 이 회의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진다. 요한복음의 서술은 여기서 방향을 튼다.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이 곧 그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 다음 장에는 나사로까지 없애려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되살아난 사람이 다시 표적이 된 것이다. 이 지점부터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입성과 마지막 주간으로 넘어간다.
이 사건이 요한복음에만 나온다는 사실은 이 본문을 둘러싼 가장 큰 질문이다. 마태·마가·누가 세 권 어디에도 나사로를 살린 기사가 없다. 규모로 보면 예수의 활동 가운데 가장 극적인 축에 드는 사건이고,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처형당하는 직접적 계기로까지 서술되는데, 다른 세 권은 이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설명은 여러 갈래로 제시되어 왔다. 첫째, 자료 계열의 차이로 보는 설명이다. 공관복음의 서술은 갈릴리 활동에 무게가 실려 있고 예루살렘 주변의 마지막 며칠만 다룬다. 반면 요한복음은 유대 지역 전승에 접근할 수 있는 계열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 나사로 사건은 요한 계열에만 보존된 자료가 된다. 둘째, 이른바 '보호를 위한 익명 처리' 가설이다. 초기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점에 나사로와 그 가족이 아직 살아 있었고, 그들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어 이름과 사건을 빼거나 익명으로 처리했다는 설명이다. 요한복음이 가장 늦게(AD 90~110년경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제서야 실명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가설이지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추정에 머문다. 셋째, 요한의 신학적 구성으로 보는 설명이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 가운데 마지막이자 절정에 놓이고,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책의 주제를 한 장면에 응축한다. 그런 정연함 자체를 구성의 흔적으로 보는 견해다. 이 견해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비유를 함께 거론한다. 그 비유의 거지 이름도 나사로이며, 마지막 문장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로 끝난다. 이름과 주제가 겹치는 이 비유가 요한복음의 서사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반대 방향으로, 실제 사건이 있었기에 그런 비유가 회자되었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하며 어느 쪽도 입증되지 않았다. 넷째, 공관복음 자체가 소생 기사를 갖고 있다는 점도 고려된다. 야이로의 딸(막 5장)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장)이 그것이다. 즉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유형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의 창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요한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라는 특정 사건이 다른 세 권에 없는 것이다. 한때 관련 자료로 거론된 문헌이 하나 있다. 1958년 모턴 스미스가 발견했다고 발표한 이른바 '비밀 마가복음' 단편으로, 베다니에서 죽은 청년을 무덤에서 불러내는 유사한 장면이 담겼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원본 문서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어, 오늘날 이 자료를 근거로 삼는 논의는 신중하게 다뤄진다. 용어 하나를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부활'과 구별된다. 나사로는 이전과 같은 몸으로 돌아왔고, 언젠가 다시 죽었을 것이다. 이를 소생(resuscitation)이라 부르고, 다시 죽지 않는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부활(resurrection)이라 부른다. 요한복음의 서술이 이 차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은 세부 묘사에서 드러난다는 지적이 있다. 나사로는 천에 감긴 채 나오고 누군가 풀어 주어야 하지만, 20장의 빈 무덤 장면에서는 천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서사 구조를 보면, 요한복음은 성전에서 상인을 쫓아낸 사건을 2장에 배치하고, 처형 결정의 계기로 이 사건을 놓는다. 공관복음은 반대로 성전 사건을 마지막 주간에 놓고 그것을 계기로 삼는다. 역사적으로 어느 쪽이 실제 도화선이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으며, 두 배열 모두 각 책의 구성 논리와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 베다니
- 예루살렘 동쪽 약 3킬로미터에 있던 작은 마을. 걸어서 한 시간이 안 걸린다. 이 거리 때문에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 곧바로 예루살렘 지도부에 전해질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지역의 아랍어 지명 알에이자리야는 나사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 나흘
- 장례 뒤 나흘이 지났다는 서술은 시간 정보 이상의 의미로 읽힌다. 후대 유대 문헌에는 영혼이 사흘간 시신 곁에 머물다 나흘째에 떠난다는 관념이 나오는데, 이 자료가 3세기 이후 편집된 것이라 1세기에도 통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나흘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표시로 기능한다는 데는 대체로 견해가 모인다.
- 표적
- 요한복음은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른다. 힘을 과시한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표적이 대체로 일곱 개로 세어지며, 나사로 사건은 그 마지막에 놓인다.
- 산헤드린
- 로마의 지배 아래 유대 사회의 종교·사법 문제를 다루던 최고 의결기구.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았다. 오늘날의 대법원과 종교 지도부를 합친 성격에 가깝지만, 사형 집행 권한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 장례용 천
- 당시 유대인의 매장은 시신에 향료를 넣고 아마포로 감은 뒤 바위를 파낸 굴에 안치하는 방식이었다. 얼굴은 따로 천으로 덮었다. 무덤 입구는 큰 돌로 막았다. 화장이나 관에 넣는 매장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 마지막 날의 부활
- 세상 끝에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을 일으킨다는 기대. 당시 유대 사회 안에서도 견해가 갈렸다. 바리새파 계열은 이를 받아들였고 사두개파는 인정하지 않았다. 마르다가 이 기대를 언급하는 것은 개인적 신념이라기보다 당대의 일반적 신앙 언어에 가깝다.
흔한 오해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것이 곧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이다.
⭕둘은 구분된다. 나사로는 이전과 같은 몸으로 돌아왔고 언젠가 다시 죽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를 소생이라 부른다. 반면 부활은 다시 죽지 않는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의 서술도 두 장면을 다르게 그린다. 나사로는 천에 감긴 채 나와 누군가 풀어 주어야 했다.
❌예수가 늦은 것은 소식을 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본문은 소식을 들은 뒤에도 있던 자리에서 이틀을 더 머물렀다고 명시한다. 이 지체는 서술자가 숨기지 않고 적어 둔 요소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문학적 구성으로 보는 견해, 본문에 적힌 신학적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 어차피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고 보는 견해가 갈린다.
❌죽은 사람을 살린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마가복음 5장의 야이로의 딸, 누가복음 7장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이야기가 있다. 다른 세 복음서에 없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유형이 아니라 나사로라는 특정 사건이다. 이 부재를 어떻게 설명할지가 오래된 논점이다.
❌이 사건 뒤 사람들이 모두 믿게 되어 일이 잘 풀렸다.
⭕본문의 결말은 반대에 가깝다. 믿게 된 사람도 있었지만, 일부는 이를 지도부에 알렸고 그 회의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진다. 다음 장에는 나사로까지 없애려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살아난 사람이 다시 표적이 된 셈이다.
❌예수가 무덤 앞에서 운 것은 나사로를 살릴 수 없어서였다.
⭕본문의 순서를 보면 그는 곧 무덤을 열게 한다. 눈물의 이유를 본문은 설명하지 않는다. 원문에 쓰인 낱말이 슬픔보다 격한 감정을 가리킨다는 점 때문에, 죽음 자체에 대한 분노로 읽는 해석, 둘러선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반응으로 읽는 해석 등이 함께 제시된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예수는 늦게 왔어요. 그런데 무덤 앞에서 울었어요. 힘이 있는 사람이 먼저 울었다는 게 이상하지요. 슬퍼하는 사람 옆에서 같이 우는 일과,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 중에 어느 쪽이 더 큰 위로일까요? 여러분이 슬펐을 때는 어느 쪽이 더 힘이 되었나요?
이 장면에서 가장 자주 멈춰 서게 되는 곳은 무덤이 열리는 순간이 아니다. 그 앞에서 예수가 우는 대목이다. 잠시 뒤 상황을 뒤집을 사람이 왜 먼저 울었을까. 본문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두 자매의 첫마디도 오래 남는다. 둘 다 같은 말을 한다.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이것은 신앙 고백이 아니라 원망에 가깝다. 요한복음은 그 말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적어 두었다. 결말도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한 사람이 살아난 대가로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이 앞당겨진다. 살아난 사람마저 다시 위험해진다. 이 이야기를 '좋은 일이 일어났다'로 요약하기 어려운 이유다. 남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늦게 온 것과 오지 않은 것은 같은 일일까.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함께 우는 것 중에서, 사람에게 실제로 남는 것은 어느 쪽일까.
해석의 갈래는 크게 셋으로 정리된다. 첫째는 시간의 문제로 읽는 독법이다. 마르다는 살아남을 '마지막 날'로 미뤄 두었고, 예수의 응답은 그것을 현재로 끌어온다. 학계에서 '실현된 종말론'이라 부르는 요한복음 특유의 관점으로, 세상 끝에 일어날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다만 같은 책 안에 마지막 날을 말하는 구절도 남아 있어, 이 긴장을 편집 층위의 흔적으로 볼지 의도된 이중 구조로 볼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둘째는 서사의 축으로 읽는 독법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은 일곱 표적의 마지막이자 수난 이야기의 도화선이다. 생명을 주는 행위가 죽음을 불러오는 구조 자체가 이 책의 논리를 압축한다는 것이다. 이 독법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을 반어로 읽는다. 정치적 계산으로 한 말이 결과적으로 이 책이 말하려는 바를 그대로 진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감정의 문제로 읽는 독법이다. 신의 아들로 그려지는 인물이 무덤 앞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장면은 요한복음 안에서도 이례적이다. 초대교회 시기에는 이 대목이 예수의 인성을 두고 벌어진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신성만 강조하는 해석에 맞서, 그가 실제로 슬퍼했다는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한편 이 본문의 역사적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서 두 입장으로 정리한다. 어느 입장을 취하든 남는 물음이 있다. 이 이야기가 죽음을 없앤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사로는 다시 죽었을 것이고, 그를 무덤에서 부른 사람도 곧 처형된다. 그렇다면 이 장면이 뒤집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회당에서 밀려나 상실을 겪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함께 놓고 읽으면, 이 질문의 무게가 조금 달라진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 사건을 어떤 성격의 기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역사적 사건을 전하는 독립 전승으로 보는 입장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유대 지역 전승에 접근할 수 있었던 요한 계열에만 보존된 자료로 본다.
- 마을 이름과 예루살렘까지의 거리, 매장 방식 등 지리·관습 묘사가 구체적이라는 점
-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격 대비가 누가복음 10장과 독립적으로 일치한다는 점
- 공관복음도 소생 기사를 갖고 있어 이 유형 자체가 요한의 창작은 아니라는 점
- 초기 복음서 기록 시점에 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어 이름을 밝히기 어려웠다는 가설
전통적 해석과 보수적 신약학 진영에서 주로 제시된다
신학적으로 구성된 서사로 보는 입장
역사적 사건의 재현이라기보다, 이 책의 주제를 한 장면에 응축하기 위해 구성된 서사로 본다.
- 가장 극적인 사건인데도 다른 세 복음서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
- 일곱 표적의 절정에 정확히 배치되는 구성적 정연함
- 누가복음 16장 비유의 인물 이름과 주제가 겹친다는 점
- 소리 내어 한 기도가 청중을 위한 것이라고 본문 스스로 밝히는 점
역사비평 계열 연구에서 주로 제시된다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이 장면이 요한복음의 구조에서 결정적 전환점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생명을 주는 행위가 곧 죽음의 결정으로 이어지는 배치가 저자의 의도적 구성이라는 점도 공통으로 인정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다른 세 복음서가 왜 이 사건을 다루지 않았는지는 확정된 답이 없다. 자료 계열의 차이, 당사자 보호, 문학적 구성 등 여러 설명이 제시되었으나 어느 쪽도 결정적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