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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잔치

잔치가 한창인데 손님에게 낼 술이 동났다. 오늘로 치면 결혼식 피로연 중간에 음식이 떨어진 셈이고, 그 집안은 두고두고 마을의 이야깃거리가 될 참이었다.

요한복음 · 요한복음 2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3

jesusmary

이야기

  1. 상황

    갈릴리에 가나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나사렛 북쪽 히르벳 카나를 지지하는 고고학적 견해와, 순례 전통이 오래 이어진 케프르 켄나를 지목하는 견해가 나뉜다. 두 곳 다 나사렛에서 걸어 오갈 만한 거리에 있다.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어요. 나사렛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어요. 그곳에서 결혼 잔치가 열렸어요. 그때 결혼 잔치는 하루로 끝나지 않았어요. 여러 날 동안 이어졌어요. 온 마을 사람이 모여서 먹고 마셨지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예수도 초대를 받아서 왔어요. 며칠 전부터 함께 다니던 사람들도 왔어요. 그런데 잔치 중간에 큰일이 생겼어요. 손님들에게 낼 포도주가 다 떨어진 거예요. 포도주는 어른들이 마시는 음료예요. 그 시대 잔치에는 꼭 있어야 했어요. 술이 떨어지면 잔치를 연 집이 부끄러워졌어요. 사람들이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잔치를 준비한 집은 무척 당황했을 거예요. 마리아가 그 사실을 먼저 알아챘어요.

    갈릴리 지방의 가나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나사렛 북쪽 히르벳 카나를 지지하는 고고학적 견해와, 순례 전통이 오래 이어진 케프르 켄나를 지목하는 견해가 나뉜다. 두 곳 다 나사렛에서 걸어 오갈 만한 거리에 있다.라는 마을에서 결혼 잔치가 열렸다. 요한복음은 이 일이 사흘째 되던 날에 있었다고만 적는다. 누구의 결혼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어머니가 그 자리에 있었다. 예수도 며칠 전부터 함께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과 함께 초대를 받았다. 그 시대의 결혼 잔치는 하루짜리 행사가 아니었다. 마을 규모에 따라 며칠에서 일주일까지 이어졌다. 사실상 동네 전체가 손님이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는 일은 신랑 쪽 집안의 몫이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은 체면이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크게 좌우하는 사회였다. 잔치에서 대접이 끊기는 것은 단순한 실수로 끝나지 않았다. 그 집안이 마을 앞에서 감당해야 할 몫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표시가 되었다. 포도주에 대해서도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그 시대에 포도주는 특별한 날에만 꺼내는 사치품이 아니었다. 물이 늘 안전하지는 않던 지역이었다. 포도주는 물에 타서 묽게 마시는 일상 음료에 가까웠다. 잔치에서는 그것이 넉넉해야 손님을 제대로 대접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술이 떨어졌다는 말은, 오늘로 치면 피로연 중간에 마실 것과 음식이 한꺼번에 동났다는 뜻에 가깝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그 일이 벌어졌다. 왜 떨어졌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는다. 손님 수를 잘못 헤아렸을 수도 있고, 형편이 빠듯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그것이 몹시 곤란한 상황이었다는 점.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가 그 사실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주방 사정을 알 만한 자리에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많다. 다만 그 이유 역시 본문은 적지 않는다.

    무대인 가나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나사렛 북쪽 히르벳 카나를 지지하는 고고학적 견해와, 순례 전통이 오래 이어진 케프르 켄나를 지목하는 견해가 나뉜다. 두 곳 다 나사렛에서 걸어 오갈 만한 거리에 있다.의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유력한 후보는 두 곳이다. 나사렛 북쪽 약 13킬로미터의 히르벳 카나는 1세기 취락 흔적과 지형 조건 때문에 고고학 쪽에서 지지를 받고, 나사렛 북동쪽 약 6킬로미터의 케프르 켄나는 중세 이후 순례 전통이 정착된 곳이다. 근래에는 나사렛 북쪽의 또 다른 지점을 제안하는 발굴 보고도 나왔다. 어느 쪽이든 나사렛에서 하루 안에 오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은 공통된다.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시간 표시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이다. 요한복음 1장은 '이튿날'이라는 표현을 반복하며 날짜를 세듯 서술을 이어 가는데, 그 마디들을 이어 붙이면 이 책의 서두가 대략 한 주간 분량으로 읽힌다. 창세기의 첫 주간과 겹쳐 읽는 해석이 오래전부터 있었고, 사흘째라는 표현을 부활과 연결해 읽는 시도도 있다. 다만 날짜 계산이 딱 떨어지지 않아 이 독법이 저자의 의도인지 후대 독자의 재구성인지는 논란이 남아 있다. 혼인 잔치의 세부에 관해서는 자료의 한계를 함께 말해 두는 편이 정직하다. 여러 날 이어지는 잔치, 신랑 집안의 접대 의무, 손님들이 선물이나 물품으로 잔치에 기여하는 관행 같은 설명은 상당 부분 후대 랍비 문헌(미쉬나·탈무드)과 지중해 지역 인류학 연구에 기댄 재구성이다. 1세기 갈릴리 시골 마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확실한 쪽은 문화의 큰 틀이다. 이 지역은 개인의 성취보다 집단의 체면이 우선하는 명예-수치 사회였고, 공개된 자리에서의 실패는 개인이 아니라 집안 전체의 문제로 계산되었다. 포도주의 성격도 짚어 둘 만하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포도주는 대체로 물을 섞어 마셨고, 그리스·로마 문헌에는 물과 술의 비율을 두고 취향과 예법을 논하는 대목이 남아 있다. 다만 희석 비율이 지역과 상황마다 달랐고, 1세기 유대 지역의 관행을 하나의 수치로 확정할 만한 자료는 없다. 원액을 그대로 마시는 것을 야만적으로 여기는 서술이 있는가 하면, 취기를 문제 삼는 서술도 성경 안팎에 함께 존재한다. 이 두 사실 가운데 한쪽만 들어 이 본문을 음주 논쟁의 근거로 쓰는 일이 잦은데, 본문 자체는 그 논쟁을 하려고 쓰인 글이 아니다.

  2. 사건

    마리아는 예수에게 다가갔어요. 포도주가 없다고 조용히 알렸어요. 예수의 대답은 뜻밖이었어요. 지금은 자기가 나설 때가 아니라고 했어요. 어머니를 부르는 말투도 조금 거리가 있었어요. 그런데 마리아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말했어요. 예수가 부탁하면 다 들어 주라고요. 마당에는 큰 돌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어요. 손을 씻는 물을 담아 두는 항아리였어요. 하나에 물이 백 리터쯤 들어갔어요. 두 팔로 안아야 할 만큼 컸어요. 예수는 거기에 물을 채우라고 했어요. 일꾼들은 물을 길어 왔어요. 항아리 여섯 개를 끝까지 채웠어요. 그다음에 예수가 또 말했어요. 조금 떠서 잔치 책임자에게 가져가라고요. 일꾼들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어머니는 예수에게 사정을 알린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짧은 말이었다.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그에게 말했다는 사실 자체가 요구에 가까웠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다. 그는 어머니를 '여자'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그러고는 그 일이 자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자기가 나설 시점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인다. 한국어로 옮겨 놓으면 차갑게 들린다. 다만 원문의 호칭 자체는 무례한 말이 아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말로 드문 표현이라, 거리를 두는 어조로 읽힐 뿐이다. 어머니의 반응이 더 흥미롭다. 그는 물러서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대신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 둔다. 그가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따라 달라는 당부였다. 거절에 가까운 대답을 듣고도 일이 진행될 것을 전제한 셈이다. 왜 그렇게 확신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마당에는 돌을 깎아 만든 큰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장식이 아니라 용도가 있는 물건이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은 식사 전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손과 그릇을 물로 씻었다. 그 물을 담아 두는 항아리였다. 하나에 대략 80리터에서 120리터가 들어갔다고 본문은 적는다. 여섯 개를 합치면 500리터를 훌쩍 넘는 양이다. 예수는 그 항아리를 물로 채우게 한다. 일꾼들은 아귀까지 가득 채웠다. 다음 지시는 더 단순했다. 조금 떠서 잔치를 맡아 진행하던 사람에게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언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본문은 묘사하지 않는다. 주문도 없고 손짓도 없다. 물을 채웠고, 떠 갔고, 받은 사람이 맛을 봤다. 남아 있는 것은 그 순서뿐이다.

    이 대목에서 원어의 결을 살펴볼 만한 지점이 세 군데 있다. 첫째는 호칭이다. 예수가 어머니를 부른 그리스어 '귀나이(gynai)'는 여성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고, 그 자체로 무례하거나 냉담한 말이 아니다. 문제는 용례다. 당시 문헌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이 말로 부르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다수의 주석은 이것을 모욕이 아니라 관계의 층위를 바꾸는 표현으로 읽는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어머니는 이름 없이 두 번만 등장하는데, 이 잔치 장면과 십자가 아래 장면(요 19:26)이다. 두 번 다 같은 호칭이 쓰이고, 이 반복을 책의 처음과 끝을 묶는 구성으로 읽는 분석이 널리 인용된다. 둘째는 되묻는 말이다. 직역하면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무엇이냐'에 가까운 이 표현은 히브리어 관용구를 그리스어로 옮긴 형태로, 구약에도 여러 번 나온다(삿 11:12, 왕상 17:18, 왕하 3:13). 뜻의 폭이 넓다는 점이 중요하다. 강한 적대에서 '그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정도의 거리 두기까지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 어느 쪽인지는 번역자마다 판단이 갈린다. 셋째는 '때'다. 여기 쓰인 '호라(hōra)'는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표지어다. 이 책에서 그의 '때'는 반복해서 언급되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와 죽음의 시점을 가리키는 말로 수렴한다(요 12:23, 13:1, 17:1). 그렇다면 이 장면의 거절은 단순히 '지금은 곤란하다'는 시간 조율이 아니라, 책 전체의 구조와 얽힌 진술이 된다. 첫 표적요한복음이 기적을 부르는 말. 힘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이다. 표지판이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기적은 대체로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의 출발점 노릇을 한다.을 앞두고 이미 마지막 장면이 언급되는 셈이다. 돌항아리에 대한 고고학 정보도 덧붙일 만하다. 1세기 유대 사회에는 돌로 만든 그릇은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보는 정결 규정 이해가 퍼져 있었고, 그래서 흙 그릇 대신 석기를 쓰는 관행이 있었다. 예루살렘 북쪽 하르 호츠빔 일대와 갈릴리의 레이나에서 실제 석기 제작 공방 유적이 발굴되었다. 요한복음이 이 세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1세기 유대 지역의 실제 관습에 익숙한 전승을 담고 있다는 근거로 자주 제시된다. 용량 표기는 '메트레테스'라는 단위로 되어 있고, 항아리 하나에 두세 단위가 들어간다고 적혀 있다. 1메트레테스를 39~40리터 안팎으로 추산하면 전체는 대략 480리터에서 700리터 사이가 된다. 잔치가 끝난 뒤에도 남을 양이다. 이 과잉이 이 이야기의 요점 가운데 하나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모인다. 항아리가 왜 하필 여섯 개인지에 대해서는 상징 해석이 오래 제시되어 왔다. 완전수 일곱에서 하나 모자란 수라는 독법이 대표적이다. 매력적인 읽기지만, 요한복음이 다른 곳에서 숫자에 이런 방식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증거가 뚜렷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본문 자체는 개수를 세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3. 결과

    책임자가 그것을 맛보았어요. 어디서 났는지는 몰랐어요. 물을 떠 온 일꾼들만 알고 있었지요. 책임자는 신랑을 불렀어요. 그리고 이상하다고 말했어요. 보통은 좋은 것을 먼저 낸다고요. 그런데 이 집은 반대라고요. 제일 좋은 것이 마지막에 나왔다고요. 신랑은 무슨 말인지 몰랐을 거예요. 자기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예수는 앞에 나서지 않았어요. 칭찬은 신랑이 받았어요.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몇 명뿐이었어요. 마리아와 일꾼들, 그리고 함께 온 사람들이지요. 요한복음은 이것을 첫 번째 표적요한복음이 기적을 부르는 말. 힘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이다. 표지판이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기적은 대체로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의 출발점 노릇을 한다.이라고 불러요. 표적은 신호라는 뜻이에요. 무언가를 가리켜 보이는 표시예요.

    맛을 본 사람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물을 길어 온 일꾼들만 알고 있었다. 그는 신랑을 불러 한마디 한다. 보통은 좋은 것을 먼저 내는 법이라고 했다. 손님들의 취기가 오르면 그다음에 값이 덜 나가는 것을 내놓는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 집은 순서가 거꾸로라는 말이었다. 감탄인지 농담인지 알기 어려운 어조다. 확실한 것은 그가 신랑을 칭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작 신랑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장면의 구조가 특이하다.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무대 뒤에 있다. 공은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 사건을 아는 사람은 어머니와 일꾼 몇 명, 그리고 함께 온 이들뿐이다. 모여든 군중도 없고, 자기가 한 일이라는 선언도 없다. 요한복음은 이 일을 자기 책이 기록하는 첫 번째 '표적요한복음이 기적을 부르는 말. 힘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이다. 표지판이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기적은 대체로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의 출발점 노릇을 한다.'이라고 부른다. 표적은 힘을 과시하는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이다. 이 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처음 드러났다고 본문은 적는다. 함께 다니던 이들이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는 말도 뒤따른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는다. 잔치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한 사람과 성전에서 판을 뒤집는 사람이 한 장 안에 나란히 놓인 셈이다. 한편 이 잔치에 함께 왔던 사람들은 며칠 전 그를 따라나선 이들이었다. 아직 조직도 이름도 없는 느슨한 무리였다. 이들이 어떻게 '열둘'이라는 고정된 집단으로 정리되는지가 다음 이야기다.

    요한복음이 기적을 부르는 말은 '세메이온(sēmeion)', 곧 표적요한복음이 기적을 부르는 말. 힘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이다. 표지판이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기적은 대체로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의 출발점 노릇을 한다.이다. 공관복음이 주로 쓰는 '뒤나미스(dynamis, 능력의 행위)'와 대비된다. 표지판이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듯, 이 책에서 기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장치로 배치된다. 그래서 앞의 열두 장을 '표적의 책'이라 부르고, 각 표적 뒤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내는 대화나 담화가 따라붙는 것이 이 책의 일반적인 구성이다. 다만 이 첫 표적에는 그런 해설이 붙지 않는다. 사건은 짧게 서술되고 곧장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표적을 일곱 개로 세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지만, 세는 방식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물 위를 걷는 장면을 표적에 넣을지, 21장의 물고기 잡이를 포함할지에 따라 목록이 달라진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도 함께 기억할 만하다. 이 장면에서 쓰인 '영광(독사, doxa)'이라는 말도 요한복음에서는 독특하게 쓰인다. 이 책에서 영광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승리의 순간이 아니라 십자가다. 잔치에서 처음 드러났다는 그 영광이 마지막에 어디로 가는지를 이미 앞 대목의 '때'가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해석사에서 가장 오래된 독법은 종말 잔치와의 연결이다. 예언서들은 회복의 날을 묘사할 때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기름진 음식과 오래 묵은 술로 잔치가 벌어지는 장면을 반복해서 그린다(암 9:13, 욜 3:18, 사 25:6). 500리터가 넘는 과잉은 이 이미지와 겹친다. 여기에 더해, 정결례에 쓰던 물을 담은 그릇에서 잔치의 술이 나왔다는 구성을 옛 체계에서 새 국면으로의 이행으로 읽는 해석이 오래 이어져 왔다. 다만 이 독법을 '유대교는 물, 기독교는 포도주' 같은 도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 근래 연구에서 꾸준히 제기된다. 저자와 등장인물 대부분이 유대인이며, 본문 어디에도 정결례 관습 자체를 비난하는 문장은 없기 때문이다. 종교사 비교에서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전승이 자주 언급된다. 특정 축제일에 신전의 샘이나 빈 항아리에서 포도주가 나왔다는 기록이 여러 지역에 남아 있고, 이 이야기가 그 모티프를 의식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반대로 세부가 상당히 다르고(여기서는 신전이 아니라 시골 잔치이며, 기존의 물이 바뀐다), 요한복음의 상징 체계가 유대 예언 전통 쪽에 훨씬 밀착해 있다는 점을 들어 직접 차용을 부정하는 견해도 강하다. 어느 쪽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역사성 문제도 열려 있다. 이 사건은 네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공관복음의 침묵을 이 이야기가 후대의 신학적 구성이라는 근거로 보는 연구자가 있고, 요한복음이 다른 계열의 지역 전승 — 가나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나사렛 북쪽 히르벳 카나를 지지하는 고고학적 견해와, 순례 전통이 오래 이어진 케프르 켄나를 지목하는 견해가 나뉜다. 두 곳 다 나사렛에서 걸어 오갈 만한 거리에 있다.라는 구체적 지명, 석기 항아리 같은 1세기적 세부 — 을 담고 있다는 점을 들어 독립 전승의 흔적으로 보는 연구자가 있다. 본문이 이 사건을 어떤 장르의 기록으로 제시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가나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나사렛 북쪽 히르벳 카나를 지지하는 고고학적 견해와, 순례 전통이 오래 이어진 케프르 켄나를 지목하는 견해가 나뉜다. 두 곳 다 나사렛에서 걸어 오갈 만한 거리에 있다.
그때의 결혼 잔치
하루 행사가 아니었다. 며칠에서 일주일까지 이어지는 마을 단위의 행사였고, 손님을 먹이고 대접하는 일은 신랑 쪽 집안의 몫이었다. 준비가 중간에 끊기는 것은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집안 전체의 체면 문제로 계산되는 사회였다.
돌항아리와 정결례
당시 유대 사람들은 식사 전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손과 그릇을 물로 씻는 관습을 지켰다. 이를 정결례라 부른다. 돌로 만든 그릇은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여겨져 널리 쓰였고, 실제로 1세기 석기 제작 공방 유적이 예루살렘 인근과 갈릴리에서 발굴되었다.
그 시대의 포도주
특별한 날의 사치품이라기보다 일상 음료에 가까웠다. 물이 늘 안전하지는 않던 지역이었고, 대개 물을 섞어 묽게 마셨다. 다만 희석 비율이 얼마였는지는 지역과 상황마다 달라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고, 취함을 경계하는 서술도 성경 안팎에 함께 존재한다.
표적
요한복음이 기적을 부르는 말. 힘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이다. 표지판이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기적은 대체로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의 출발점 노릇을 한다.
잔치를 맡은 사람
그리스어로는 '아르키트리클리노스'. 음식과 술이 나가는 순서와 자리 배치를 관리하던 역할이다. 잔치를 연 집안 사람일 수도, 그 일을 맡아 하던 상급 하인일 수도 있다. 본문은 그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흔한 오해

예수가 만든 것은 사실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스였다.

본문은 발효 여부를 논하지 않는다. 여기 쓰인 그리스어 '오이노스'는 일반적으로 발효된 포도주를 가리키고, 잔치 책임자의 말도 손님들의 취기가 오른 뒤의 관습을 언급한다. 다만 당시 포도주를 물에 타서 묽게 마시는 일이 흔했다는 점 역시 사실이다. 포도주스 해석은 대체로 후대의 금주 논쟁 속에서 제기된 것으로, 본문 자체에서 곧장 나오는 결론은 아니다. 음주에 관한 입장 차이는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 정리했다.

예수가 어머니에게 무례하게 대답했다.

원문의 호칭은 여성을 부르는 일반적인 말이라 그 자체로 모욕이 아니다. 다만 아들이 어머니에게 쓰는 표현으로는 드물어서, 관계의 층위를 바꾸는 거리 두기로 읽는 해석이 많다. 한국어 번역에서 유독 차갑게 들리는 것은 두 언어의 존대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예수가 평생 처음 행한 기적이다.

요한복음이 밝히는 것은 '이 책이 기록하는 표적들 가운데 첫 번째'라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의 기적담은 신약 바깥의 후대 문헌(도마의 유아기 복음 등)에 나오지만, 신약의 네 복음서는 그런 이야기를 싣지 않는다.

잔치에 술이 떨어진 건 단순한 준비 부족이었다.

그 시대 기준으로는 꽤 심각한 일이었다. 손님 접대는 집안이 마을 앞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었고, 중간에 끊기면 두고두고 회자되는 실패로 남았다. 다만 왜 떨어졌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손님을 잘못 헤아렸다는 추측도, 형편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본문에 근거가 있지는 않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 묘사가 없다. 본문에는 주문도, 손짓도, 변화의 순간에 대한 서술도 없다. 물을 채웠고, 떠서 가져갔고, 받은 사람이 맛을 봤다는 순서만 적혀 있다. 이 절제된 서술 자체를 이 이야기의 특징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잔치에서 술이 떨어졌어요. 누가 죽거나 다친 일이 아니었어요. 그냥 창피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게다가 자랑도 하지 않았어요. 칭찬은 신랑이 다 받았어요. 도와준 사람은 뒤에 있었지요. 여러분도 그런 적이 있나요?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를 도와준 적이요.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지적되는 것은 사건의 크기다. 사람이 죽어 가는 자리도, 병이 낫는 자리도 아니었다. 잔치에서 술이 떨어졌을 뿐이다. 요한복음이 첫 표적요한복음이 기적을 부르는 말. 힘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키는 신호라는 뜻이다. 표지판이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기적은 대체로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의 출발점 노릇을 한다.으로 하필 이 일을 골랐다는 점에 많은 해석이 걸려 있다. 종교가 다루는 영역이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장면으로 읽는 쪽이 있다. 곤란해진 집안의 체면을 조용히 세워 준 사건으로 읽는 쪽도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서술의 태도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알고 있던 사람은 어머니와 일꾼 몇 명뿐이다. 잔치 책임자는 엉뚱하게 신랑을 칭찬한다. 도움은 있었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화면 밖에 있는 구조다. 양도 지나치다. 500리터가 넘는 술은 그 잔치에 필요한 양을 훨씬 넘어선다. 필요한 만큼이 아니라 남을 만큼이라는 점을 오래된 해석들은 주목해 왔다. 남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해결된 문제도 해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목숨이 걸린 일도 아니었다. 그저 부끄러움을 면하게 해 준 일이었다. 그것은 작은 일일까, 큰일일까.

이 본문의 해석은 크게 세 갈래로 갈린다. 첫째는 종말 잔치 독법이다. 예언서가 회복의 날을 그릴 때 반복해서 쓰는 이미지 — 흘러넘치는 새 포도주와 성대한 잔치 — 를 이 장면이 소규모로 앞당겨 보여 준다고 읽는다. 과도한 분량이 이 독법의 핵심 근거다. 둘째는 대체 또는 성취 독법이다. 정결례에 쓰던 물을 담은 그릇에서 잔치의 술이 나왔다는 구성을, 옛 체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표시로 읽는다. 오래된 독법이지만, 이것을 '유대교 대 기독교'의 도식으로 단순화하면 본문에 없는 대립을 만들어 낸다는 비판이 근래에 꾸준히 제기된다. 셋째는 계시 독법이다. 요한복음 자체가 이 사건을 그의 정체가 처음 드러난 자리로 정리하므로, 잔치의 곤란은 배경일 뿐 초점은 그가 누구인가에 있다고 본다. 이 장면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차지하는 자리를 두고는 교파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 천주교와 정교회 전통에서는 그가 부탁을 전하고 일꾼들에게 지시하는 장면을, 사람들의 필요를 아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보여 주는 성경적 근거 가운데 하나로 읽어 왔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그가 한 말이 결국 사람들을 예수 쪽으로 돌려세우는 문장이라는 점, 그리고 예수가 먼저 거리를 두는 대답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 장면을 중재 역할의 근거로 삼는 데는 신중하다. 두 전통 모두 이 대화가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이 자주 끌려 나오는 자리에 대해 한마디 덧붙일 만하다.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셔도 되는가 하는 논쟁에서 이 이야기는 양쪽 모두에게 인용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가 그 질문에 답하려고 이 장면을 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본문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술의 성격이 아니라 양과 순서,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이 그 논쟁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실제로 교단마다 다른 결론을 내려 왔고, 그 갈래는 아래에 정리했다.

이 장면을 그리스도인의 음주 문제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절제 안에서 허용된다고 보는 입장

성경이 금하는 것은 술 자체가 아니라 취해서 자기와 남을 해치는 상태이며, 이 본문 역시 잔치의 술을 문제 삼지 않는다고 본다.

  • 이 장면에서 예수도 그의 어머니도 술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
  • 구약의 여러 대목이 포도주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언급한다는 점(시 104:15 계열)
  • 신약이 경계하는 대상을 취함으로 특정하는 구절이 있다는 점(엡 5:18)
  • 예배 중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성찬)에 실제 포도주를 써 온 오랜 전통

천주교·정교회, 성공회와 루터교를 비롯한 유럽 개신교 다수

삼가거나 금하는 편이 낫다고 보는 입장

성경이 허용의 한계를 정해 두었더라도, 오늘의 상황에서는 아예 마시지 않는 쪽이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는 선택이라고 본다.

  • 술이 사람을 넘어뜨린다는 경고가 성경에 반복해서 나온다는 점(잠 20:1, 23:29~35 계열)
  • 자기 자유보다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는 쪽을 택하라는 바울의 원칙(롬 14장, 고전 8장)
  • 알코올 의존과 그로 인한 가정·사회적 피해라는 현실적 판단
  • 19세기 말 이후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금주·금연을 신앙 실천의 일부로 가르쳤던 역사적 배경

한국 개신교 다수 교단, 미국 복음주의 일부, 절제운동 전통을 이어받은 교파

공통점 양쪽 모두 취해서 자기와 남을 해치는 상태를 문제로 본다는 점, 그리고 이 본문이 음주 규범을 정하려고 쓰인 글이 아니라는 점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차이는 성경이 그은 선을 오늘의 생활에 어떻게 옮길 것인가에서 생긴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1세기 포도주의 도수와 희석 비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자료마다 추정이 다르다. 금주를 개인의 선택으로 볼지 공동체가 함께 지킬 규범으로 볼지도 교단과 지역에 따라 갈린다. 이 앱은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