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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시험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 앞에 누군가 나타나, 발치의 돌을 가리켰다. 빵으로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 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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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 상황

    예수는 어른이 된 뒤 강에서 세례를 받았어요. 세례는 물로 씻는 의식이에요. 그다음에 예수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들로 갔어요. 그곳은 바위와 마른 흙뿐이었어요. 나무도 물도 거의 없었어요. 예수는 거기서 사십 일을 지냈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요. 배가 몹시 고팠어요. 바로 그때 누군가 찾아왔어요. 성경은 그를 마귀라고 불러요. 마귀는 예수의 마음을 흔들어 보려고 했어요.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의 일이다. 세례는 물에 몸을 담그는 의식으로, 새로 시작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복음서는 예수가 그 자리에서 곧장 광야모래사막이 아니다. 유대 광야는 바위와 마른 흙,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구릉지대다. 비가 적어 농사는 못 짓지만 양과 염소를 치며 지나다닐 수는 있는 땅이었다. 성경에서 이곳은 도망친 사람들이 숨는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 등장한다.로 들어갔다고 적는다. 유대 광야는 예루살렘 동쪽, 요단 계곡 쪽으로 급하게 떨어지는 메마른 구릉지대다. 사람도 물도 거의 없고 낮과 밤의 기온 차가 크다. 그는 그곳에서 40일성경에서 40은 준비와 시험의 기간을 표시하는 관용적 숫자로 자주 쓰인다. 홍수의 40일, 모세가 산에 머문 40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그 예다. 정확한 일수를 세는 기록인지, 관용 표현인지는 본문마다 판단이 갈린다.을 보냈고, 그동안 먹지 않았다. 왜 하필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갔는지 본문은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모두, 그를 그리로 이끈 것이 성령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말.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를 광야로 이끈 주체로 서술된다. 즉 복음서는 이 굶주림을 우연한 고생이 아니라 의도된 과정으로 그린다.이었다고 적는다. 성령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 굶주림은 사고가 아니라 예정된 일정이었다는 뜻이 된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직전에 놓인 준비 기간인 셈이다. 40일이 끝날 무렵 그는 극도로 허기진 상태였다. 그때 한 존재가 찾아온다. 본문은 그를 '마귀' 또는 '시험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가 고른 시점이다. 가장 약해진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을 앞에 두고 대화가 시작된다.

    무대는 유대 광야모래사막이 아니다. 유대 광야는 바위와 마른 흙,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구릉지대다. 비가 적어 농사는 못 짓지만 양과 염소를 치며 지나다닐 수는 있는 땅이었다. 성경에서 이곳은 도망친 사람들이 숨는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 등장한다.다. 예루살렘과 사해 사이 약 30킬로미터 구간에서 고도가 1,200미터 가까이 떨어지는 지형으로, 연 강수량이 매우 적어 농경이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이 지역은 도망자와 은둔자의 공간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세례 요한의 활동 무대도 이 일대였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 서술에서 준비와 시험의 기간을 표시하는 관용적 단위로 쓰인다. 홍수의 40일성경에서 40은 준비와 시험의 기간을 표시하는 관용적 숫자로 자주 쓰인다. 홍수의 40일, 모세가 산에 머문 40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그 예다. 정확한 일수를 세는 기록인지, 관용 표현인지는 본문마다 판단이 갈린다., 모세가 산에 머문 40일,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40년이 대표적이다. 특히 마지막 것과의 대응은 이 본문을 읽는 오래된 열쇠였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을 것과 물을 두고 계속 흔들렸고, 예수는 40일 동안 같은 종류의 문제 앞에 선다. 자료 문제도 짚을 만하다. 마가복음은 같은 사건을 단 두 절로 처리한다(막 1:12~13). 광야에 있었고 들짐승과 함께 있었으며 천사들이 그를 도왔다는 정도이고, 대화 내용은 없다. 세 차례의 문답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며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학계는 이런 공통 어록 자료를 설명하기 위해 Q자료(독일어 Quelle, '자료')라는 가설상의 문서를 상정해 왔다. 다만 Q라는 실물 문서가 발견된 적은 없고, 누가가 마태를 직접 참고했다고 보는 대안 이론도 계속 제기되므로 결론이 난 문제는 아니다. 또 하나 자주 제기되는 물음은 목격자 문제다. 광야에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이 대화는 어떻게 전해졌는가. 예수 자신이 나중에 제자들에게 들려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처음부터 신학적 의미를 담아 구성한 서술로 보는 견해가 있다. 본문 자체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어휘 하나를 덧붙이면, 여기 쓰인 그리스어 '페이라조(peirazō)'는 '시험하다'와 '유혹하다'를 모두 뜻할 수 있다. 품질을 확인하려는 검증일 수도, 넘어뜨리려는 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국어 번역이 '시험'과 '유혹'으로 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2. 사건

    마귀가 첫 번째로 말했어요. "돌을 빵으로 바꿔 보세요." 굶은 사람에게는 아주 솔깃한 말이었어요.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대신 아주 오래된 책의 한 구절로 답했어요. 먹는 것만으로 사람이 사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어요. 마귀는 예수를 높은 건물 꼭대기에 세웠어요. "여기서 뛰어내려 보세요. 다치지 않게 지켜 줄 거예요." 예수는 이번에도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을 상대로 시험을 걸면 안 된다고 답했어요. 마지막으로 마귀는 온 세상을 보여 주었어요. "나한테 한 번만 무릎을 꿇으세요. 그러면 이걸 다 드릴게요." 예수는 또 거절했어요. 무릎을 꿇을 분은 한 분뿐이라고 했어요. 마귀는 더 할 말이 없었어요.

    첫 번째 제안은 배고픔을 겨냥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발밑의 돌을 먹을 것으로 만들어 보라는 요구였다. 조건이 붙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얼마 전 세례 자리에서 그를 아들이라 부르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고 앞 장이 적는데, 시험하는 자는 바로 그 말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한 셈이다. 예수는 자기 말로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신명기구약의 다섯 번째 책.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이 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받은 긴 고별 연설 형식이다. 예수가 이 장면에서 든 세 구절이 모두 이 책의 6~8장에서 나온다는 점이, 이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의 한 대목을 들어 답한다. 사람을 지탱하는 것이 음식만은 아니라는 취지의 구절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말이 그에 못지않다는 내용이 뒤에 이어진다. 두 번째로 그는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운다. 그리고 뛰어내려 보라고 한다. 이번에는 상대도 성경을 인용했다. 천사들이 붙들어 주어 다칠 일이 없다고 노래한 시편 91편의 한 대목이다. 성경 구절이 무기로 쓰이는 장면이다. 예수는 같은 방식으로 되받는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을 상대로 시험을 걸어 확인하려 들지 말라는 조항이 있다. 광야모래사막이 아니다. 유대 광야는 바위와 마른 흙,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구릉지대다. 비가 적어 농사는 못 짓지만 양과 염소를 치며 지나다닐 수는 있는 땅이었다. 성경에서 이곳은 도망친 사람들이 숨는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 등장한다.에서 물이 없다며 조상들이 신을 몰아세웠던 사건을 두고 남긴 규정이었다. 세 번째는 규모가 다르다. 그는 예수를 아주 높은 곳으로 데려가 세상의 온갖 왕국과 그 화려함을 한눈에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넘기겠다고 제안한다. 조건은 하나,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었다. 이 제안이 흥미로운 이유는 목적지가 같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결국 예수를 왕으로 부르게 된다. 달라지는 것은 거기까지 가는 길이다. 예수는 다시 신명기를 든다. 몸을 굽혀 섬길 상대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못 박아 둔 규정이었다. 여기서 대화는 끝난다.

    세 차례의 문답에는 눈에 띄는 규칙성이 있다. 예수가 인용한 세 구절이 모두 신명기구약의 다섯 번째 책.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이 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받은 긴 고별 연설 형식이다. 예수가 이 장면에서 든 세 구절이 모두 이 책의 6~8장에서 나온다는 점이, 이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6~8장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신명기광야모래사막이 아니다. 유대 광야는 바위와 마른 흙,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구릉지대다. 비가 적어 농사는 못 짓지만 양과 염소를 치며 지나다닐 수는 있는 땅이었다. 성경에서 이곳은 도망친 사람들이 숨는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 등장한다. 40년을 끝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받은 긴 고별 연설 형식의 책이고, 6~8장은 그 가운데 광야 경험을 되짚는 대목이다. 각 인용이 겨냥하는 지점도 대응된다. 첫 번째 구절(신 8:3 계열)은 만나를 먹이며 굶주림을 겪게 한 이유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나온다. 두 번째(신 6:16 계열)는 맛사에서 물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몰아세운 사건을 언급한다. 세 번째(신 6:13 계열)는 다른 신에게 몸을 굽히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흔들렸던 세 지점 — 굶주림, 시험을 걸어 확인하려는 태도, 우상 — 이 그대로 다시 제시되고, 이번에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구조다. 초대교회 이래 이 본문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다시 밟는 장면'으로 읽어 온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인용 대 인용이라는 구도도 이 장면의 특징이다. 두 번째 시험에서 상대는 시편 91편을 끌어온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이 받는 보호를 노래하는 본문인데, 시험하는 자는 그것을 '그러니 확인해 보라'는 요구로 바꿔 쓴다. 성경 구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쓰는 방식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본문이 스스로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해석사에서 자주 인용된다. 지리적 세부는 확정되지 않은 것이 많다. '성전 꼭대기'로 옮기는 그리스어 프테리기온(pterygion)은 '작은 날개' 또는 '끝부분'을 뜻하는 말로, 성전 복합 건물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지 특정되지 않는다. 남동쪽 모퉁이의 높은 축대, 성전 지붕의 난간, 왕의 주랑 등이 후보로 거론될 뿐이다. 높은 산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실제 지구상에는 모든 나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이 없기 때문에, 이 장면을 물리적 이동으로 볼 것인지 환상으로 볼 것인지가 오래 논의되어 왔다. 누가복음은 이 대목에서 '순식간에' 보여 주었다고 적어, 시각적 제시에 가깝게 서술한다. 호칭도 정리해 둘 만하다. 히브리어 '사탄'은 원래 법정이나 분쟁에서 반대편에 서는 자, 즉 고발자를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욥기 1장에 나오는 표현도 정관사가 붙은 직함 형태다. 그리스어 '디아볼로스'는 '중상하는 자, 헐뜯는 자'라는 뜻이고, 이 단어가 라틴어를 거쳐 영어 devil이 된다.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지는 것은 후대의 일이며, 그 과정을 어떻게 볼지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3. 결과

    마귀는 결국 떠났어요. 예수는 광야모래사막이 아니다. 유대 광야는 바위와 마른 흙,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구릉지대다. 비가 적어 농사는 못 짓지만 양과 염소를 치며 지나다닐 수는 있는 땅이었다. 성경에서 이곳은 도망친 사람들이 숨는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 등장한다.에 혼자 남았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돌아갔어요. 거기서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아픈 사람도 고쳐 주었어요. 배고픈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인 날도 있었어요. 예수는 자기 배를 채우려고 힘을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썼어요. 그 차이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에요.

    세 번째 거절 뒤 시험하는 자는 물러간다. 마태복음은 그 뒤 천사들이 와서 예수를 돌봤다고 짧게 덧붙인다. 40일성경에서 40은 준비와 시험의 기간을 표시하는 관용적 숫자로 자주 쓰인다. 홍수의 40일, 모세가 산에 머문 40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그 예다. 정확한 일수를 세는 기록인지, 관용 표현인지는 본문마다 판단이 갈린다. 동안 아무도 없던 자리에 비로소 도움이 도착한 셈이다. 누가복음의 마무리는 조금 다르다. 마귀가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동안 물러났을 뿐이라고 적어, 이것이 끝이 아님을 남겨 둔다. 실제로 누가복음은 뒤에서 유다가 배신을 결심하는 장면에 다시 사탄을 등장시킨다. 광야모래사막이 아니다. 유대 광야는 바위와 마른 흙,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구릉지대다. 비가 적어 농사는 못 짓지만 양과 염소를 치며 지나다닐 수는 있는 땅이었다. 성경에서 이곳은 도망친 사람들이 숨는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 등장한다.에서 시작된 일이 마지막 주간까지 이어지는 구조인 셈이다. 광야에서 나온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가 흔히 '공생애'라고 부르는 활동 기간이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보면, 광야에서 거절했던 세 가지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는 굶주린 무리를 먹이고, 위험 앞에서 사람들을 건지고, 결국 왕이라 불린다. 다만 셋 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지름길로 얻은 것도 아니었다.

    이 사건의 서술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차이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의 순서다. 마태복음은 빵 → 성전 꼭대기 → 높은 산의 나라들 순으로, 누가복음은 빵 → 나라들 → 성전 꼭대기 순으로 배열한다. 첫 번째는 두 책이 같고, 뒤의 둘이 뒤바뀐 형태다. 두 배열 모두 각 책의 전체 구조와 맞물린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은 예루살렘을 축으로 삼는 작품이다. 복음서가 성전에서 시작해(사가랴의 분향) 성전에서 끝나고, 중반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긴 여행기이며, 속편인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한다. 이 구조에서 시험의 절정을 예루살렘 성전에 두는 배열은 자연스럽다. 반대로 마태복음에서 '산'은 반복되는 무대다. 산 위의 설교, 변화의 산, 그리고 마지막 파송이 이루어지는 갈릴리의 산까지 이어진다. 세상의 모든 왕국을 두고 벌어지는 장면을 산 위에 배치하면, 마지막 장에서 하늘과 땅의 권한을 다 받았다고 말하며 온 세상 민족에게로 가라고 지시하는 산 장면과 짝을 이룬다. 그렇다면 원래 순서는 무엇이었나. 다수 학자들은 마태의 순서를 원형에 가깝게 보고 누가가 재배열했다고 추정하지만, 반대 방향의 주장도 있으며 확정할 방법은 없다. 애초에 고대의 서술은 사건을 시간 순으로 배열하는 것을 필수 규범으로 여기지 않았다. 주제에 따라 재배치하는 것은 당시 전기 문학에서 흔한 기법이었고, 두 저자 모두 같은 세 요소를 전달하되 자기 책의 논리에 맞게 놓았다고 이해하는 쪽이 일반적이다. 한편 이 장면이 실제로 어떤 성격의 사건이었는지는 해석이 갈린다. 이는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서 두 입장으로 정리한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광야
모래사막이 아니다. 유대 광야는 바위와 마른 흙,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구릉지대다. 비가 적어 농사는 못 짓지만 양과 염소를 치며 지나다닐 수는 있는 땅이었다. 성경에서 이곳은 도망친 사람들이 숨는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 등장한다.
마귀·사탄
히브리어 '사탄'은 원래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반대편에 서는 자, 고발하는 자'를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그리스어 '디아볼로스'는 '헐뜯는 자'라는 뜻이고, 이 말이 영어 devil의 어원이 된다. 한국어 성경은 문맥에 따라 '마귀'와 '사탄'을 섞어 쓴다.
신명기
구약의 다섯 번째 책.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이 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받은 긴 고별 연설 형식이다. 예수가 이 장면에서 든 세 구절이 모두 이 책의 6~8장에서 나온다는 점이, 이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40일
성경에서 40은 준비와 시험의 기간을 표시하는 관용적 숫자로 자주 쓰인다. 홍수의 40일, 모세가 산에 머문 40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그 예다. 정확한 일수를 세는 기록인지, 관용 표현인지는 본문마다 판단이 갈린다.
성령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말.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를 광야로 이끈 주체로 서술된다. 즉 복음서는 이 굶주림을 우연한 고생이 아니라 의도된 과정으로 그린다.

흔한 오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순서가 다른 것은 둘 중 하나가 틀렸다는 뜻이다.

고대의 전기 서술은 사건을 시간 순으로 늘어놓는 것을 필수 규범으로 삼지 않았다. 주제에 맞춰 배치를 바꾸는 것은 당시 흔한 기법이었고, 두 책은 같은 세 요소를 전하되 각자의 구성에 맞게 배열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원래 순서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시험의 내용은 '나쁜 짓을 하라'는 것이었다.

세 제안은 표면적으로 악한 일이 아니다. 굶주린 사람이 먹는 것, 보호받는 것,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셋을 얻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선악의 갈림길보다 경로의 갈림길에 가깝게 읽힌다.

예수는 신이니까 시험은 형식적인 절차였고, 실제로 흔들릴 일은 없었다.

이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도 오래 논쟁된 지점이다. 죄를 지을 가능성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입장과, 실제로 넘어질 수 있는 상태에서 견딘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함께 있다. 다만 본문 자체는 극도의 굶주림과 실제 대화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신약의 다른 문서(히 4:15)도 그가 실제로 시험을 겪었다고 서술한다.

광야는 사람이 절대 갈 수 없는 죽음의 사막이었다.

유대 광야는 예루살렘에서 걸어서 하루면 닿는 거리에 있다. 목자들이 가축을 몰고 다니던 곳이고, 세례 요한처럼 그곳에 머물며 활동한 사람도 있었다. 멀고 신비로운 장소가 아니라, 도시 바로 옆에 있는 텅 빈 땅이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예수는 배가 아주 고팠어요. 돌을 빵으로 바꿀 수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예수는 자기를 위해 힘을 쓰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 주었어요. 힘이 있는 사람이 그 힘을 언제 쓰고 언제 참는지가 중요해요. 여러분은 하고 싶은 걸 참아 본 적이 있나요? 그때 왜 참았나요?

이 장면을 '유혹을 이겨 낸 이야기'로만 읽으면 절반만 읽는 셈이 된다. 제안된 세 가지는 모두 나쁜 것이 아니었다. 빵, 안전, 그리고 통치. 실제로 복음서를 계속 읽어 보면 예수는 사람들을 먹이고, 죽음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건지고, 마지막에는 왕이라고 불린다. 목적지는 제안과 다르지 않다. 달라지는 것은 거기까지 가는 길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대답하는 방식이다. 세 번 모두 자기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오래전에 기록된 문장을 인용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매여 있느냐로 답한 셈이다.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옳은 목적지에 잘못된 길로 도착하는 것은 도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언가를 할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쓰지 않기로 하는 판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본문의 해석사에는 크게 세 갈래의 독법이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재현 독법이다. 광야모래사막이 아니다. 유대 광야는 바위와 마른 흙,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메마른 구릉지대다. 비가 적어 농사는 못 짓지만 양과 염소를 치며 지나다닐 수는 있는 땅이었다. 성경에서 이곳은 도망친 사람들이 숨는 장소이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반복해 등장한다. 40년 동안 흔들렸던 지점들이 광야 40일성경에서 40은 준비와 시험의 기간을 표시하는 관용적 숫자로 자주 쓰인다. 홍수의 40일, 모세가 산에 머문 40일,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이 그 예다. 정확한 일수를 세는 기록인지, 관용 표현인지는 본문마다 판단이 갈린다. 안에서 다시 제시되고, 이번에는 다른 결과에 이른다고 읽는다. 인용된 세 구절이 모두 신명기구약의 다섯 번째 책.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이 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받은 긴 고별 연설 형식이다. 예수가 이 장면에서 든 세 구절이 모두 이 책의 6~8장에서 나온다는 점이, 이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6~8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이 독법의 가장 강한 근거다. 둘째는 아담 대비 독법이다. 부족함이 없던 정원에서 넘어진 첫 사람과,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견딘 사람을 나란히 놓는 방식이다. 누가복음이 이 장면 바로 앞에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배치한 점을 근거로 든다. 다만 이 대비는 마태복음의 구성에서는 뚜렷하지 않다. 셋째는 메시아 방식 논쟁 독법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로마의 지배를 끝낼 정치적 해방자에 대한 기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독법은 세 제안을 그 기대에 맞춘 경로 — 먹고사는 문제의 즉각적 해결, 눈앞에서 보여 주는 극적인 기적, 정치 권력 — 로 보고, 이 장면을 그 경로를 처음부터 배제하는 선언으로 읽는다. 한편 이 사건에서 파생된 신학 논쟁이 하나 있다. 예수가 실제로 넘어질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신성을 가진 이상 죄를 지을 가능성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입장은, 그럼에도 시험은 실재했으며 그 결과가 정해져 있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반대로 실제로 가능성이 열려 있지 않았다면 시험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은, 히브리서가 그도 모든 면에서 시험을 겪었다고 서술한 점을 근거로 든다. 두 입장 모두 주요 교단 안에 존재하며, 어느 쪽도 공의회(교회 대표들이 모여 교리를 결정하던 회의)에서 정리된 문제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을 신학적 구성물로 읽는 견해도 있다. 목격자가 없는 대화라는 점, 세 장면이 정확히 신명기 세 구절과 짝을 이룬다는 점을 근거로, 초기 공동체가 예수의 정체와 사역(공적 활동)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서사 형태로 구성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사건의 역사성을 부정하기보다, 본문이 무엇을 하려는 글인지를 다르게 규정한다.

광야의 시험을 어떤 성격의 사건으로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실제로 일어난 외적 대면으로 보는 입장

인격적 존재인 마귀가 실제로 나타나 예수와 대화를 나눈, 시간과 장소가 있는 사건으로 읽는다.

  • 본문이 장소 이동과 대화를 구체적으로 서술한다는 점
  • 복음서 곳곳에서 마귀·귀신이 일관되게 인격적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
  • 신약의 다른 문서(히 2:18, 4:15)가 예수의 시험을 실제 경험으로 전제한다는 점

전통적 해석. 개신교 보수 진영과 천주교·정교회의 전통 신학에서 널리 유지된다

내적 갈등 또는 신학적 서술로 보는 입장

겉모습을 갖춘 존재와의 대면이라기보다, 예수가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두고 겪은 내면의 씨름을 이야기 형태로 서술한 것으로 읽는다.

  • 광야에 목격자가 없었으므로 대화가 그대로 전달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 모든 나라를 한눈에 보는 장면처럼 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묘사가 있다는 점
  • 세 장면이 신명기 세 구절과 정확히 짝을 이루는 구성적 정연함

역사비평 계열 연구와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에서 주로 제시된다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이 장면이 예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기 전에 그 방향이 정해졌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세 제안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할 것인가에 관한 선택지였다는 점도 공통으로 인정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마귀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는지, 세 장면이 물리적 이동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본문 자체가 그 부분을 설명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