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
도시 사람들이 짐을 싸서 도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물도 귀한 마른 땅에, 낙타털 옷을 걸치고 메뚜기를 먹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 마가복음 1장, 마태복음 3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3분
이야기
상황
예수가 어른이 되었을 때예요. 요단강이라는 강가에 한 사람이 있었어요. 이름은 요한이에요. 요한은 도시에 살지 않았어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들판에서 지냈어요. 낙타털로 만든 거친 옷을 입었어요.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보러 몰려왔어요. 요한은 큰 소리로 말했어요. 지금까지 살던 방향을 바꾸라고요. 곧 아주 큰 일이 일어난다고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은 강으로 들어갔어요. 물에 몸을 담그는 건 약속의 표시였어요. 다시 시작하겠다는 약속이었어요.
예수가 서른 살 무렵이던 시기, 요단강 가의 메마른 광야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에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낙타털 옷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로 끼니를 때웠다고 복음서는 적는다. 그가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을 돌리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때가 코앞이니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동의한 사람들은 강물에 들어가 몸을 담갔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다루던 문제를, 요한은 도시 바깥의 강가에서 다루고 있었던 셈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살펴보러 내려온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을 맞은 요한의 태도는 정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그들을 독을 가진 뱀의 새끼들에 빗대어 불렀다고 기록된다.
마가복음은 출생 이야기도 족보도 없이 이 장면에서 곧장 시작한다. 첫머리에 인용된 예언 구절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본문이 겹쳐진 형태로, 길을 준비하는 전령에 관한 말라기·출애굽기 계열의 표현 위에 광야에서 길을 내라는 이사야 40장의 대목이 붙어 있다. 사해 근처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서에도 같은 이사야 구절을 자기 집단의 광야 생활에 적용한 대목이 있어, 이 해석 자체가 요한만의 독창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타털 옷과 가죽 띠라는 복장 묘사는 열왕기하 1장 8절이 엘리야를 묘사한 방식과 겹치고, 말라기서 마지막 대목이 엘리야의 재등장을 예고한다는 점과 이어진다. 즉 이 묘사는 그의 기행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독자에게 보내는 신호에 가깝다. 메뚜기 역시 기이한 식단이라기보다, 레위기 11장이 먹어도 되는 것으로 분류한 몇 안 되는 곤충에 속한다. 요한의 세례가 성전 제사 체계를 대체하려는 시도였는지, 아니면 그 체계 안에 머물면서 임박한 심판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는지는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린다.
사건
어느 날 예수도 그 강가에 왔어요. 예수는 자기도 세례를 받겠다고 했어요. 요한은 깜짝 놀랐어요. 순서가 거꾸로라고 생각했거든요. 자기가 오히려 받아야 한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예수는 그대로 하자고 했어요. 왜 그랬는지는 길게 말하지 않았어요. 예수가 물에서 올라올 때였어요. 하늘이 갈라졌다고 성경은 적어요. 비둘기처럼 생긴 무언가가 내려왔어요.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들렸어요. 목소리는 예수를 자기 아들이라고 불렀어요. 아주 마음에 든다고도 했어요.
그 줄에 예수가 섰다. 마태복음은 요한이 이를 말렸다고 적는다.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오히려 받아야 할 처지인데 어떻게 그에게 세례를 주느냐는 반응이었다. 예수는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만 짧게 답했고,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을 마가복음은 하늘이 찢겼다는 동사로 표현한다.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무언가가 내려왔다고 적는다. 이어서 목소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자기 아들이며 자기 마음에 든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장면을 누가 보고 들었는지는 복음서마다 서술이 다르다. 예수 한 사람의 체험처럼 적은 책이 있고, 곁에 있던 사람들도 알아들은 공개적 선언처럼 적은 책이 있다.
마가복음 1장 10절이 쓴 동사는 '찢다'에 해당하는 말이다. 같은 어근이 이 책에서 다시 나타나는 곳은 예수가 죽는 순간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막 15:38)이며, 두 장면이 책의 처음과 끝에서 짝을 이룬다는 분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목소리의 인칭도 갈린다. 마가와 누가는 예수를 직접 부르는 2인칭으로, 마태는 주변에 알리는 3인칭으로 적는다. 이 차이를 개인적 체험과 공적 선언 가운데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의 편집 의도로 읽는 견해가 많다. 목소리의 내용은 왕의 즉위를 선언하는 시편 2편, 그리고 이사야 42장의 종에 관한 대목과 어휘가 겹친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왕의 즉위와 고난받는 종이라는 두 이미지가 한 문장에 포개진 셈이다. 비둘기가 왜 등장하는지에는 정설이 없다. 창세기 1장에서 물 위를 덮고 있던 영, 홍수 이야기의 비둘기, 후대 랍비 문헌의 비유 등이 제안되지만, 예수 이전 유대 문헌에서 비둘기를 성령의 고정된 상징으로 쓴 용례는 찾기 어렵다. 한편 역사 연구자들은 이 사건 자체의 역사성을 비교적 높게 평가한다. 후대 교회가 지어냈다고 보기엔 설명하기 곤란한 요소 — 요한이 시행하는 쪽에 서 있다는 점, 그 의식이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 — 를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 방식을 '당혹의 기준'이라 부른다.
결과
이 일이 있고 나서 예수는 길을 떠났어요. 얼마 뒤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요한은 강가에 그대로 남았어요. 그리고 힘센 사람에게도 잘못을 지적했어요. 그 사람 이름은 헤롯이에요. 헤롯은 화가 나서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어요. 요한은 결국 감옥에서 죽임을 당해요. 요한은 늘 이렇게 말했대요. 자기는 주인공이 아니라고요. 뒤에 올 사람을 알려 주는 사람이라고요.
세례 직후 예수는 광야로 들어갔고, 얼마 뒤 갈릴리에서 공개 활동을 시작한다. 네 복음서 모두 예수의 이야기를 이 지점에서 출발시킨다. 요한 쪽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그는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의 혼인 문제를 공개적으로 걸고넘어졌다. 그 일로 붙잡혀 갇혔다가 결국 처형된다. 요한복음에는 그가 자기 몫이 줄어들고 상대의 몫이 커지는 편이 맞다고 말한 대목이 실려 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다른 장면도 남아 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이 사람을 보내, 예수가 정말 자기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 맞는지 물었다는 대목이다. 확신에 차 외치던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것은 질문이었다.
요한은 성경 밖 자료에도 이름이 남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헤롯 안디바가 요한을 처형했다고 적으면서, 장소를 사해 동쪽 요새 마캐루스로, 이유를 군중이 몰리는 데 대한 정치적 불안으로 서술한다. 혼인 문제를 지적하다 갇혔다는 복음서의 설명과는 초점이 다르다. 둘을 서로 어긋나는 기록으로 볼지, 공적 명분과 실제 동기의 차이로 볼지는 해석에 달렸다. 요세푸스는 또 요한의 세례를 이미 바르게 살기로 한 사람이 몸을 씻는 절차로 설명하는데, 이는 죄 사함과 곧장 연결하는 복음서의 서술과 결이 다르다. 요한의 운동이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흔적도 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여러 해가 지난 뒤 에베소에서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오늘날 이라크·이란 일대의 소수 종교 집단인 만다야교도 요한을 중요한 인물로 존중하지만, 이 집단의 기원이 1세기까지 곧장 닿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복음서들이 요한을 반복해서 예수보다 낮은 자리에 배치하는 서술 방식 자체를, 두 운동이 한동안 나란히 경쟁했을 가능성의 흔적으로 읽는 연구자들도 있다. 요한이 처형된 시점은 대체로 AD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 사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도는 확정되지 않았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 세례
- 물에 몸을 담그거나 물을 붓는 의식. 신약이 쓰인 그리스어 낱말은 원래 '물에 담근다'는 뜻이었다. 이 의식은 요한이 새로 만든 것이 아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이미 몸을 물에 담가 정결한 상태로 돌아가는 관습이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 주변과 각 지역에는 그 용도로 만든 계단식 물웅덩이(미크베)가 있었다. 요한의 방식은 몇 가지가 달랐다. 필요할 때마다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이었고, 스스로 들어가는 대신 다른 사람이 시행했으며, 성전이 아니라 도시 밖 강에서 이뤄졌다. 무엇보다 삶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결단과 묶여 있었다.
- 회개
- 교회에서 자주 쓰는 말이라 무겁게 들리지만, 신약의 그리스어 낱말은 '생각을 바꾼다', '방향을 돌린다'는 뜻에 가깝다.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는 감정보다,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행동 쪽에 무게가 있는 단어다.
- 광야
- 모래 사막이 아니라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돌투성이 마른 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광야는 노예 상태를 벗어난 뒤 한 무리가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동시에 도시 권력의 감시가 덜 미치는 곳이어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기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 요단강
-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건너 들어갔다고 기록된 강. 그 강물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일이 '처음부터 다시 들어감'의 재연으로 읽히는 이유다.
- 헤롯 안디바
-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된 헤롯 대왕의 아들이다. 예수 이야기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이 여러 명 나와 헷갈리기 쉽다. 안디바는 왕이 아니라 분봉왕(로마가 영토를 나눠 맡긴 지방 통치자)으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다.
- 세례냐 침례냐
-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이 의식의 이름과 방식이 갈린다. 온몸을 물에 완전히 잠기게 하고 `침례`라 부르는 쪽은 침례교와 그리스도의교회 계열이 대표적이며, 요단강에서 몸을 담근 장면과 `물에 담근다`는 원어의 뜻을 근거로 든다. 머리에 물을 붓거나 뿌리는 방식으로 `세례`라 부르는 쪽은 장로교·감리교·성공회·천주교가 대표적이며, 물이 넉넉지 않은 곳에서도 시행하던 초기 교회의 기록(디다케 7장)을 근거로 든다. 아기 때 받게 할지도 갈린다.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교단(장로교·감리교·성공회·루터교·천주교)은 가족 단위로 받았다는 신약의 기록과 구약 할례의 연속성을 근거로 들고, 본인이 결정할 나이까지 기다리는 교단(침례교·오순절 일부)은 본인의 신앙 고백이 먼저라는 점을 든다. 다만 어느 쪽이든 이 의식이 한 번뿐이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통과의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이 앱이 판단하지 않는다.
흔한 오해
❌세례 요한은 예수의 제자 요한, 요한복음을 쓴 요한과 같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다. 신약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여럿 나온다.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활동하다 처형된 인물이고, 제자 요한은 갈릴리의 어부 출신으로 예수를 따라다닌 인물이다.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생긴 혼동이다.
❌요한은 세상을 등지고 혼자 지내던 괴짜였다.
⭕복장과 식단은 특이하지만, 그는 숨어 산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대규모로 불러 모은 운동의 지도자였다. 권력자가 위협을 느껴 가둘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다. 낙타털 옷과 가죽 띠라는 묘사도 기행의 증거라기보다, 옛 예언자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려는 서술 장치로 읽힌다.
❌메뚜기를 먹었다는 건 사실 열매나 콩깍지를 잘못 옮긴 것이다.
⭕본문이 쓴 낱말은 곤충을 가리키고, 레위기 11장은 특정 메뚜기 종류를 먹어도 되는 것으로 분류한다. 이 지역에서 메뚜기는 실제로 식용된 기록이 있다. 열매로 보려는 해석은 후대에 나온 것으로, 본문에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
❌물로 씻는 의식은 기독교가 처음 만든 것이다.
⭕당시 유대교에는 이미 몸을 물에 담가 정결한 상태로 돌아가는 관습이 있었다. 기독교의 세례는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익숙하던 의식의 의미를 바꿔 쓴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요한이 한 일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일이었어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했지요. 그런데 감옥에 갇혔을 때는 흔들렸어요. 정말 그 사람이 맞느냐고 물어봤거든요. 확신하던 사람도 흔들릴 수 있어요. 여러분은 흔들릴 때 누구에게 물어보나요?
요한은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모은 다음,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 쪽으로 넘긴 인물로 그려진다. 자기 이름으로 남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를 흔들림 없는 사람으로 미화하지도 않는다. 감옥에서 그가 보낸 것은 확신의 선언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본문은 그가 왜 흔들렸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기다리던 그림과 눈앞의 현실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흔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확신에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나는 이 순서를, 실패로 읽어야 할까 아니면 사람의 자리로 읽어야 할까.
복음서들은 요한을 일관되게 '앞선 사람'의 자리에 배치한다. 그 배치가 사실의 기술인지, 초기 교회가 자기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택한 서술 전략인지는 나눠 볼 수 있는 문제다. 역사적으로 그는 독자적 운동의 지도자였고, 그 운동은 그의 죽음 뒤에도 얼마간 이어졌다. 예수가 그 운동 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은 예수에 관해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인정되는 사실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는 두 겹의 초상이 있는 셈이다. 다른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존재했던 예언자라는 신학적 초상과, 자기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았던 1세기 갱신 운동의 지도자라는 역사적 초상이다. 둘을 어떻게 겹쳐 읽을지는 독자가 어느 물음을 들고 본문에 들어오느냐에 달려 있다.
죄가 없다고 고백되는 예수가 왜 죄와 연결된 의식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연대와 동일시로 보는 입장
자기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의식을 받으러 온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서기 위해 받았다고 본다.
- 마태복음이 요한의 반대를 굳이 기록했다는 점 자체가, 이 질문을 초기 교회도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
- 신약의 다른 문서들이 예수를 사람의 처지에 온전히 들어온 인물로 서술한다는 점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설명
공적 활동의 위임식으로 보는 입장
이 장면의 초점은 죄 문제가 아니라, 공개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임명에 있다고 본다.
- 직후에 이어지는 목소리의 내용이 왕의 즉위를 선언하는 시편 2편의 어휘와 겹친다는 점
- 네 복음서가 모두 예수의 공적 활동을 이 사건 직후부터 서술하기 시작한다는 구성
역사적 참여로 보는 입장
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예수가 실제로 요한의 갱신 운동에 참여했고 한때 그 영향 아래 있었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 후대 교회에 불리한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당혹의 기준)
- 복음서마다 요한의 비중을 조금씩 줄이는 방향으로 서술이 조정되는 경향
역사비평 계열 연구자들
공통점 세 입장 모두 이 사건을 예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는 분기점으로 본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본문은 예수의 동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마태복음만 짧은 한마디를 덧붙이는데, 원어를 직역하면 '올바름을 온전히 채운다'에 가깝고 그 뜻이 무엇인지부터 해석이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