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다
밤새 노를 저었는데 배는 좀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새벽이 오기 직전, 지친 사람들 눈에 무언가가 물 위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태복음 · 마태복음 14장, 마가복음 6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4분
이야기
상황
빵 몇 개로 수천 명이 배부르게 먹은 날이 있었어요. 그날 저녁 이야기예요. 예수는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웠어요.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했지요. 자기는 혼자 산으로 올라갔어요. 조용히 기도하고 싶었거든요. 제자들은 배를 저어 나갔어요. 그런데 바람이 세게 불었어요. 바람은 배 앞쪽에서 불어왔어요. 아무리 저어도 배가 뒤로 밀렸어요. 그 호수는 갑자기 사나워지는 곳이에요. 제자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어요. 물을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밤이 다 가도록 노를 저었어요. 팔에 힘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늘은 아직 캄캄했어요. 배는 여전히 호수 한가운데 있었어요. 예수는 산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어요.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는 빈 들에 모인 큰 무리를 먹였다. 그날 저녁, 그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낸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모두 그가 제자들을 서둘러 보냈다고 적는다. 남은 무리를 돌려보낸 뒤 그는 혼자 산으로 올라갔다. 기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두 책 모두 짧게 덧붙인다. 왜 굳이 제자들만 먼저 보냈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요한복음은 같은 장면 직전에,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적는다. 그 흐름과 이어서, 무리와 제자들을 급히 떼어 놓은 조치로 읽는 해석이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런 배경을 말하지 않는다. 무대가 되는 갈릴리 호수는 이름과 달리 바다가 아니다. 남북 약 21킬로미터, 동서 약 13킬로미터의 담수호이고, 수면이 해수면보다 200미터 넘게 낮은 함몰지에 놓여 있다. 이 지형 때문에 주변 언덕에서 찬 공기가 쏟아져 내리면 잔잔하던 물이 순식간에 뒤집힌다. 제자 가운데 여럿은 이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물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날 밤은 달랐다.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와 배가 나아가지 못했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멀리서 그들이 노를 젓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고 적는다. 그리고 시각을 '밤 사경'이라고 표시한다. 밤을 넷으로 나눈 마지막 구간, 대략 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 사이다. 저녁에 출발했으니 아홉 시간 넘게 물 위에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목적지는 아직 멀었고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세 권이 이 장면을 싣는다. 마가복음 6장 45~52절, 마태복음 14장 22~33절, 요한복음 6장 16~21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없다. 누가복음의 결락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이다. 마가복음 6장 45절부터 8장 26절까지에 해당하는 대목 전체가 누가복음에 통째로 빠져 있고, 연구자들은 이를 '큰 생략'이라 부른다. 물 위를 걷는 장면은 그 구간의 첫머리에 놓여 있다. 이유는 확정되지 않았다. 누가가 사용한 마가복음 사본에 해당 부분이 없었다고 보는 견해, 무리를 먹인 기록이 두 번 반복되는 것처럼 겹치는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함께 빠졌다고 보는 견해, 두루마리 분량을 맞추기 위한 편집으로 보는 견해가 나란히 제시된다. 자료 관계에 대한 다수설은 마가복음의 형태가 가장 이르고 마태복음이 이를 확장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서술은 마가와 겹치는 요소가 있으면서도 문체와 세부가 달라, 마가를 참고한 것으로 볼지 별개의 전승으로 볼지가 갈린다. 지리에도 오래된 문제가 하나 있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을 벳새다 쪽으로 보냈다고 적는데, 배가 실제로 닿은 곳은 게네사렛이다(막 6:53). 벳새다는 호수 북동쪽이고 게네사렛은 북서쪽 평야다. 바람에 밀려 항로를 벗어난 것으로 설명하는 독법이 있고, 마가가 서로 다른 전승을 이어 붙인 흔적으로 보는 독법이 있다. 이 책의 저자가 팔레스타인 지리에 밝지 않았다는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호수의 제원도 장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 약 21킬로미터, 동서 약 13킬로미터, 최대 수심 약 43미터의 담수호이며 수면 고도는 해수면보다 약 210미터 낮다. 서쪽 산지와 동쪽 골란 고원 사이의 깊은 함몰지에 놓여 있어, 기온 차가 벌어지는 시간대에 협곡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짧은 시간에 큰 파도를 만든다. 요한복음은 이때 배가 25~30스타디온 나가 있었다고 적는데, 대략 4.5~5.5킬로미터에 해당한다. 호수 폭을 생각하면 거의 한가운데다. '밤 사경'이라는 시각 표시도 눈여겨볼 만하다. 유대식 관행은 밤을 셋으로 나누었고, 넷으로 나누는 것은 로마식이다. 마가복음이 로마식 구분을 쓴다는 점은 이 책의 독자층을 논할 때 종종 근거로 인용된다. 마지막으로 구약 배경이 있다. 히브리 성경에서 바다는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은 혼돈을 표상한다. 욥기 9장 8절은 하늘을 펼치고 바다의 물결을 밟는 이를 말하고, 시편 77편 19절은 바닷속으로 난 길을 말한다. 시편 107편에는 폭풍에 시달리던 뱃사람들이 부르짖자 물결이 가라앉는 장면이 나온다. 물 위를 걷는다는 서술은 이 언어 세계 안에서 특정한 무게를 지닌 표현이었다.
사건
새벽이 오기 전이었어요. 누군가 물 위로 걸어오고 있었어요.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았어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어요. 그때 그 사람이 말을 걸었어요. 자기라고 알려 주었어요. 겁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목소리의 주인은 예수였어요. 베드로가 배 안에서 대답했어요. "그럼 저도 그리로 걸어가 볼래요." 예수가 오라고 했어요. 베드로는 뱃전을 넘었어요. 그리고 정말 물 위를 걸었어요. 그런데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물결도 높이 솟았어요. 베드로는 갑자기 무서워졌어요. 발이 물속으로 빠지기 시작했어요. 베드로는 살려 달라고 외쳤어요. 예수가 바로 손을 뻗었어요. 그리고 베드로를 붙잡아 주었어요. 예수가 물었어요. 왜 마음이 흔들렸느냐고요.
제자들이 먼저 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물 위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유령이라고 생각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여기서 '판타스마'라는 그리스어를 쓴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이 두 장면뿐이다. 당시 지중해 뱃사람들 사이에는 바다에서 혼령을 보면 좋지 않은 일이 따른다는 통념이 있었다. 밤새 지쳐 있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구조가 아니라 또 하나의 위협이었다.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다가오던 이가 먼저 말을 건넨다. 자기 자신이라고 밝히고, 겁먹을 것 없다는 취지의 말을 덧붙인다. 여기서 마가복음에는 한 줄이 더 있다. 그가 제자들 곁을 지나가려 했다는 문장이다. 구하러 온 사람이 왜 지나치려 했는가는 오래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다음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인데, 정작 마태복음에만 있다. 베드로가 배 안에서 되묻는다. 정말 당신이라면 나에게도 물 위로 오라고 해 보라는 것이었다. 확인을 요구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거는 말이었다. 예수가 오라고 하자 베드로는 뱃전을 넘어 물을 딛고 걸었다. 몇 걸음까지였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본문이 표시하는 것은 전환의 계기다. 그가 바람을 보았고, 무서워졌고,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에서 나오는 동안 시선은 앞에 있었지만 바람 쪽으로 옮겨 가는 순간 발밑이 무너졌다는 순서다. 베드로는 짧게 도움을 청했다. 예수는 곧바로 손을 뻗어 그를 붙들었고, 어째서 마음이 갈라졌느냐는 취지로 물었다. 나무람이었는지 안타까움이었는지 본문은 말해 주지 않는다.
어휘부터 짚을 만하다. '유령'으로 옮기는 판타스마(phantasma)는 신약에서 이 병행 장면 두 곳에만 나온다. 요한복음은 이 단어를 쓰지 않고 제자들이 두려워했다고만 적는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바다는 죽은 자의 영역과 가깝게 상상되었고, 물 위에서 형체를 보는 것은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는 점이 배경 설명으로 자주 인용된다. 마가복음 6장 48절의 '그들 곁을 지나가려 하셨다'는 이 본문에서 가장 논쟁적인 한 줄이다. 여기 쓰인 동사 파렐테인(parelthein)을 두고 두 갈래 독법이 있다. 하나는 항해 상황에 따른 실무적 독법이다. 앞질러 가서 반대편 물가에서 맞으려 했다거나, 배 곁을 스쳐 지나 방향을 잡아 주려 했다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이 동사가 신현(神顯) 용어라는 독법이다. 신현은 신이 사람 앞에 자기를 드러내는 장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어 구약(70인역)에서 하나님이 모세 앞을 지나가는 장면(출 33장)과 엘리야 앞을 지나가는 장면(왕상 19장)에 같은 계열의 동사가 쓰인다. 이 독법에 따르면 '지나가려 했다'는 회피가 아니라 자기를 보이는 방식이다. 현재는 후자를 지지하는 쪽이 다수지만, 확정된 문제는 아니다. 예수가 자기를 밝히는 말에 쓰인 표현도 논의 대상이다. 그리스어 에고 에이미(egō eimi)는 일상어로는 그저 '나다'라는 뜻이다. 동시에 이 표현은 70인역에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밝히는 대목(출 3:14 계열)과 겹친다. 요한복음이 이 표현을 반복해서 신학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요 8:58 등)이 상징 독법의 근거로 제시되지만, 마가복음의 용법은 평범한 자기 확인일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으로 읽든 문장 자체는 같기 때문에, 이 다툼은 본문만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 베드로 삽화(마 14:28~31)는 마태복음에만 있다. 마태복음에는 이런 식으로 베드로만 따로 등장하는 자료가 여럿이다. 반석 발언(마 16:17~19), 물고기 입에서 나온 성전세(마 17:24~27),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느냐는 질문(마 18:21)이 그렇다. 이를 두고 마태복음 공동체가 베드로 전승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근거로 보는 견해가 있고, 마태가 베드로를 제자 일반의 전형으로 세워 독자가 자기를 겹쳐 보게 만든 문학적 장치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두 견해는 배타적이지 않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쓴 말도 어휘 확인이 필요하다. '믿음이 적은'으로 옮기는 올리고피스토스(oligopistos)는 마태복음이 제자들에게 네 차례 쓰는 단어(명사형까지 넣으면 다섯 번)이고, 신약의 다른 책에서는 누가복음에 한 번 나올 뿐이다.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적다는 말이다. 즉 이 표현은 질책이면서 동시에 상대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의심하다'로 옮기는 디스타조(distazō) 역시 신약에서 마태복음 두 곳에만 나오는데, 하나가 여기고 다른 하나는 부활 이후 산 위 장면이다(마 28:17). 그 장면에서도 절하는 사람들 가운데 흔들리는 이들이 있었다고 적힌다. 두 번 모두 경배와 의심이 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점이 자주 지적된다.
결과
두 사람이 배에 올라탔어요. 그러자 바람이 잠잠해졌어요. 배 안이 아주 조용해졌어요. 제자들은 예수 앞에 몸을 굽혔어요. 그리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이 있어요. 이 이야기는 성경에 여러 번 실려 있어요. 그중 한 책은 끝이 달라요. 거기서는 아무도 절하지 않아요. 그냥 너무 놀라기만 해요. 무슨 일인지 아직 모르거든요. 같은 밤인데 이야기 끝이 다른 거예요. 배는 아침에 물가에 닿았어요. 사람들이 다시 몰려왔어요. 그날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어요. 베드로 이야기도 남아요. 베드로는 이날 물에 빠졌어요. 하지만 혼자 빠지지 않았어요. 손 하나가 바로 왔거든요. 베드로는 나중에도 여러 번 넘어져요.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기도 하고요.
두 사람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여기서부터 책마다 마무리가 갈린다. 마태복음에서는 배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몸을 굽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고 말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이렇게 분명하게 입에 올리는 것은 이 장면이 처음이다. 흔히 첫 고백, 그러니까 예수가 누구인지 처음으로 분명히 말한 대목으로 꼽히는 베드로의 발언은 두 장 뒤에 나온다. 마가복음의 마무리는 정반대다. 절도 없고 고백도 없다. 제자들이 몹시 놀랐다고만 적고, 곧이어 이유를 덧붙인다. 그들이 빵을 나눈 사건이 무슨 뜻인지 아직 깨닫지 못했고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수천 명이 먹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지적이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그리는 책인데, 이 문장이 그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요한복음의 마무리는 또 다르다. 제자들이 그를 배에 태우려 하자 배가 곧 목적지에 닿았다고 적는다. 여기에도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은 없다. 같은 사건이 세 권에 실려 있고 세 권의 끝이 다 다르다. 어느 하나가 틀렸다는 뜻이라기보다, 각 책이 이 장면으로 하려던 말이 달랐다는 뜻으로 읽힌다. 자기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으로 쓴 책이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으로 쓴 책이 있다. 배는 게네사렛 쪽 물가에 닿았고,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면서 이야기는 이어진다. 베드로 쪽 실마리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앞장서고, 흔들리고, 붙들리는 이 순서는 그가 예수를 모른다고 말하게 되는 밤까지 몇 차례 더 반복된다.
마태복음 14장 33절의 반응은 위치가 중요하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몸을 굽히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이 장면은, 마태복음에서 제자 집단이 처음으로 그 호칭을 발화하는 자리다. 두 장 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마 16:16)은 이 발화의 반복이자 개인화인 셈이 된다. 반면 마가복음에서는 사람이 예수의 정체를 온전히 발설하는 장면이 십자가 아래 로마군 백부장의 말까지 미뤄진다. 같은 사건 앞에서 두 책이 배치한 반응의 차이는, 각 책이 정체를 언제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에 관한 서로 다른 전략을 보여 준다. 마가복음 6장 52절의 마무리는 이 책의 편집 의도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된다. '마음이 굳어 있었다'에 쓰인 동사 포로오(pōroō)는 굳은살이 박이듯 감각이 무뎌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마가복음은 같은 계열의 표현을 예수를 반대하는 이들에게도 쓰고(막 3:5), 제자들에게도 쓴다(막 8:17). 즉 이 책에서 몰이해는 바깥의 특징이 아니라 안쪽의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마가복음 8장 14~21절에서 예수는 빵 사건을 두고 제자들에게 연달아 되묻는데, 그 대목은 물 위를 걷는 장면의 마무리를 다시 꺼내 놓는 장치로 읽힌다. 요한복음의 처리는 결이 또 다르다. 요한복음 6장 21절은 제자들이 그를 배에 맞아들이려 하자 배가 곧 목적지에 이르렀다고 적는다. 이 문장을 또 하나의 기적으로 읽을지, 도착 사실을 압축한 서술로 읽을지는 갈린다. 요한복음에서 이 장면은 독립된 사건이라기보다 뒤에 이어지는 긴 연설의 도입부에 가깝다. 무리를 먹인 일과 물 위의 밤이 지나간 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설명하는 긴 말을 시작하고, 그 말 때문에 많은 사람이 떠난다. 한편 마태복음은 이 사건 뒤에 게네사렛 도착과 치유 장면을 짧게 붙이고 곧바로 정결 규정을 둘러싼 논쟁으로 넘어간다. 물 위의 장면이 서사 전체에서 정점이 아니라 통과 지점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배치를 근거로, 이 이야기의 기능이 기적의 크기를 과시하는 데 있지 않고 제자들의 인식 단계를 표시하는 데 있다고 보는 분석이 많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 복음서
- 예수의 활동과 죽음, 그 이후를 기록한 신약성경의 첫 네 권.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이다. 네 권이 같은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오류라기보다 각 책의 관심과 독자가 달랐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 갈릴리 호수
- 한국어 성경에서 '바다'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담수호다. 남북 약 21킬로미터, 동서 약 13킬로미터 크기이며 수면이 해수면보다 약 210미터 낮다. 주변 지형 때문에 바람이 협곡을 타고 내려오면 짧은 시간에 큰 파도가 인다. 예수의 제자 여럿이 이 호수의 어부였다.
- 밤 사경
- 밤을 넷으로 나눈 마지막 구간. 대략 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 사이다. 유대식 관행은 밤을 셋으로 나누었고 넷으로 나누는 것은 로마식이므로, 이 표기 자체가 마가복음의 독자층을 논할 때 근거로 쓰인다.
- 고대인에게 바다란
- 지중해 세계에서 바다는 사람이 다스릴 수 없는 영역, 혼돈과 죽음에 가까운 공간으로 여겨졌다. 히브리 성경에서도 바다를 잠재우고 그 위를 다니는 것은 신의 일로 서술된다. 물 위를 걷는다는 표현은 그런 언어 배경 위에 놓여 있다.
- 베드로
- 본래 이름은 시몬이고,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바위'라는 뜻의 별명으로 더 널리 불린다. 제자 무리를 대표해 먼저 나서는 인물이자, 복음서에서 가장 자주 넘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 바로 앞 이야기
- 세 복음서 모두 이 장면 직전에 큰 무리를 먹인 사건을 배치한다. 마가복음은 두 사건을 붙여 읽으라고 대놓고 표시해 둔다. 제자들이 물 위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로 '빵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을 든다.
흔한 오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지는 장면은 성경 전체가 전하는 잘 알려진 사건이다.
⭕이 삽화는 마태복음에만 있다. 같은 사건을 싣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베드로가 배에서 나갔다는 서술 자체가 없고,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이 통째로 빠져 있다. 워낙 유명해서 네 권 모두에 있다고 여겨지기 쉬운 대목이다.
❌폭풍을 잠잠하게 한 사건과 같은 이야기다.
⭕서로 다른 두 장면이다. 앞선 사건(막 4장)에서 예수는 배 안에 함께 타고 있었고 뒷자리에서 자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그는 처음부터 배에 없었고, 배 밖에서 다가온다. 두 장면 모두 갈릴리 호수의 밤이라 겹쳐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믿음이 적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 쓰인 그리스어 올리고피스토스는 믿음이 '작은' 상태를 가리킨다. 없음이 아니라 적음이다. 마태복음이 제자들을 향해 반복해서 쓰는 표현이며, 상대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채 그 크기를 지적한다.
❌사실은 수면 아래 모래톱이나 얕은 여울을 걸었을 뿐이다.
⭕이런 자연주의적 설명은 19세기 이후 여러 형태로 제기됐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본문이 배가 물 한가운데 있었다고 명시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건으로 읽는 쪽과 신학적 서술로 읽는 쪽 모두 '숨은 자연 현상 찾기'를 본문의 관심과 어긋나는 접근으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믿으면 물 위도 걸을 수 있다'이다.
⭕마태복음의 서술은 오히려 가라앉는 지점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베드로 삽화 없이, 제자들이 끝내 알아듣지 못했다는 문장으로 이 장면을 닫는다. 같은 사건의 마무리가 책마다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교훈으로 정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베드로는 용감했어요. 배에서 먼저 나왔으니까요. 그런데 무서워지자 가라앉았어요. 잘하다가 실패한 거예요. 하지만 혼자 가라앉지 않았어요. 소리치자 손이 왔어요.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베드로는 계속 예수를 따라가요. 여러분도 무서워서 못 한 일이 있나요? 아니면 하다가 그만둔 일이 있나요? 그때 옆에 누가 있었나요?
이 이야기는 흔히 성공담으로 인용된다. 믿으면 물 위도 걸을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서술은 걷는 장면보다 가라앉는 장면에 더 많은 줄을 쓴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베드로 삽화를 아예 싣지 않고, 제자들이 아직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문장으로 이 밤을 닫는다. 같은 사건인데 두 책의 끝이 정반대라는 점은 그 자체로 읽을 거리다. 한 책은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으로 이 장면을 썼고, 다른 책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썼다. 성경 안에서도 이 밤이 하나의 결론으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남는 질문은 몇 가지다. 확신이 있어서 나서는 것과, 나선 뒤에 확신이 흔들리는 것 중 무엇이 더 흔한가. 무언가를 시작해 놓고 중간에 겁이 난 적이 있다면, 그때 필요한 것은 더 큰 확신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실패한 쪽으로 그려졌을까.
이 본문의 해석사에는 몇 갈래가 뚜렷하다. 첫째는 신현 독법이다. 신현은 신이 사람 앞에 자기를 드러내는 장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다 물결을 밟는 이를 말하는 욥기의 표현, 하나님이 모세와 엘리야 앞을 '지나가는' 장면과 같은 계열의 동사를 쓴 마가복음 6장 48절, 그리고 '나다'라는 자기 확인 표현이 그리스어 구약의 신명과 겹친다는 점이 근거로 묶인다. 이 독법에서 이 장면은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정체의 노출이다. 둘째는 교회론 독법이다. 초대교회 이래 배는 공동체의 상징으로 읽혔다. 밤새 바람에 밀리는 배는 박해와 곤경 속의 공동체, 새벽이 다 되어서야 다가오는 인물은 늦은 것처럼 보이는 도움으로 해석되었다. 교회 건물의 긴 회중석을 가리키는 서양 건축 용어 '네이브(nave)'가 라틴어 '배(navis)'에서 왔다는 설명이 이 독법과 함께 자주 인용되지만, 이 어원 자체는 확정된 것이 아니다. 셋째는 편집비평 독법이다. 편집비평은 각 복음서 저자가 전해 받은 자료를 어떻게 배치하고 손질했는지를 따지는 연구 방법을 말한다. 마가복음이 제자들의 몰이해를 반복해서 배치한다는 점에 주목해, 이 장면의 결말을 저자의 의도적 구성으로 읽는다. 이 독법에서 독자는 제자들과 함께 헤매도록 설계되어 있고, 정체를 알아보는 일은 십자가 이후로 미뤄진다. 넷째는 마태복음 고유의 제자론 독법이다. 베드로 삽화가 마태에만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마태가 베드로를 반복해 개별 인물로 세운다는 사실을 함께 놓고, 이 인물을 신자의 전형으로 읽는다. 걷다가 가라앉고, 그 상태에서 붙들리는 순서가 마태복음 안에서 되풀이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료 형성에 관한 가설이 하나 있다. 20세기 초 양식비평 계열에서 제기된 것이다. 양식비평은 이야기가 문서로 기록되기 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단계의 형태를 재구성하려는 연구 방법이다. 이 가설은 이 이야기가 원래 부활 이후의 나타남 기사였다가 공적 활동 기간 안으로 옮겨졌다고 보는 견해다. 근거로는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 '나다'라는 자기 확인이 필요했다는 점, 요한복음 21장처럼 부활 이후 이야기에도 배와 호수가 등장한다는 점이 제시된다. 반론은 단순하다. 전해지는 어떤 부활 기사에도 물 위를 걷는 요소가 없고, 이동을 뒷받침할 본문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이 가설은 소수설로 분류된다. 이 갈래들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쪽을 앞세우느냐에 따라 이 밤의 주인공이 달라진다. 물 위를 걸어온 이인지, 뱃전을 넘었다가 가라앉은 사람인지, 아니면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배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인지.
이 장면을 어떤 성격의 사건으로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실제로 일어난 일로 보는 입장
시간과 장소가 있는 사건으로 읽는다. 예수가 실제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왔고, 마태복음이 전하는 베드로의 짧은 물 위 걸음도 실제 있었던 일로 본다.
- 세 권이 독립적으로 보이는 세부(시각 표시, 거리, 도착지)를 함께 전한다는 점
- 마가복음이 제자들의 반응을 미화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남겨 두었다는 점
- 예수의 다른 활동 기록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도 서사 안에서 사실 보고 형식으로 서술된다는 점
전통적 해석. 개신교 보수 진영과 천주교·정교회의 전통 신학에서 널리 유지된다
신학적 서술로 구성된 장면으로 보는 입장
물리적 사건의 보고라기보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구약의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 형태로 구성한 서술로 읽는다.
- 바다를 밟고 다니는 이미지가 히브리 성경에 이미 있고, 본문의 어휘가 그것과 겹친다는 점
- '지나가려 했다'는 동사가 신현 장면의 관용 표현과 같은 계열이라는 점
- 마가·마태·요한의 마무리가 서로 달라, 각 저자의 신학적 의도가 서술에 강하게 개입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점
역사비평 계열 연구와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에서 주로 제시된다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이 장면의 핵심이 '누가 다가오고 있었는가'라는 정체 물음에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본문이 능력의 크기보다 알아봄과 알아보지 못함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대비가 각 복음서의 전체 구성과 맞물린다는 점도 공통으로 인정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구약의 바다 이미지가 이 이야기의 형성에 어느 정도로 작용했는지, 마가복음의 '지나가려 했다'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요한복음 6장 21절의 도착 장면을 또 하나의 이적으로 볼지 압축된 서술로 볼지는 본문만으로 확정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