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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 재앙

노예로 부리던 사람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왕에게, 도망쳤다가 돌아온 남자가 매번 똑같은 말을 하러 찾아왔다. 아홉 번을 거절해도 그는 열 번째까지 돌아왔다.

출애굽기 · 출애굽기 7~12장 · 출애굽 · 읽는 시간 약 4

mosesaaronpharaoh

이야기

  1. 상황

    모세와 형 아론이 이집트 왕 앞에 섰어요. 왕의 이름은 파라오예요. 모세는 오래전 이집트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어요. 모세가 말했어요. '제 백성을 보내 주세요.' 파라오는 싫다고 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힘든 일을 하는 노예였거든요. 그들이 없으면 나라 일이 멈출 판이었어요. 아론이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어요. 그런데 파라오의 마술사들도 자기 지팡이로 똑같이 흉내를 냈어요. 파라오는 콧방귀를 뀌었어요.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해도 파라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어요. 그는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 왕 파라오 앞에 서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 백성을 보내 광야에서 예배하게 하라.'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전과 도시를 짓는 값싼 노동력이었고, 순순히 놓아줄 이유가 없었다. 아론이 지팡이를 던지자 뱀으로 변했지만, 파라오의 마술사들도 자기네 술법으로 똑같이 흉내를 냈다. 이어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는 첫 번째 재앙이 닥쳤는데도 파라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 장면은 앞으로 아홉 번 더 되풀이될 패턴의 축소판이었다. 요구, 표징, 흉내, 거절.

    출애굽기 7장은 이 대결을 '표징과 이적'(오토트 우모프팀)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아론의 지팡이가 '탄닌'(큰 뱀 또는 괴물)이 된 사건은 이집트 왕관에 붙은 코브라 장식 우라에우스, 곧 왕권과 보호를 상징하는 표식을 겨냥한 장면으로 읽는 해석이 있다. 파라오의 '하르툼밈'(주술사·학자 집단)이 처음 두 표징 - 지팡이의 뱀, 나일강의 피 - 을 흉내 낼 수 있었다는 서술은, 이 대결이 처음엔 대등해 보였다는 인상을 주려는 문학적 장치로 읽힌다. 파라오는 고대 이집트 신학에서 살아 있는 신(호루스의 화신)으로 여겨졌으며, 이 대결의 무대 자체가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신 대 신의 구도로 짜여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출 12:12 참고). 첫 재앙에서 나일강이 '피로 변했다'는 표현을 두고, 상류의 붉은 진흙 침전물이나 유해 조류의 대증식 같은 자연현상과 연결하는 독법과, 자연현상을 넘어서는 사건으로 보는 독법이 갈린다.

  2. 사건

    재앙은 하나씩 이집트를 덮쳤어요. 개구리, 벌레, 파리, 병든 가축, 종기, 우박, 메뚜기, 캄캄한 어둠까지 아홉 가지나 이어졌어요. 사람들은 점점 더 힘들어졌어요. 파라오는 힘들 때마다 '알았다, 가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재앙이 멈추면 곧바로 마음을 바꿨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느 순간부터 재앙을 피해 갔어요. 모세는 마지막으로 가장 무서운 경고를 전했어요. '오늘 밤,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이 죽을 것이다.'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 줬어요.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바르라고 했어요. 그리고 떠날 짐을 챙겨 두라고 했어요.

    아홉 가지 재앙이 차례로 이집트를 덮쳤다. 개구리, 벌레, 파리 떼, 가축의 떼죽음, 종기, 우박, 메뚜기, 그리고 사흘간 이어진 어둠이었다. 재앙이 심해질 때마다 파라오는 내보내겠다고 말했다가, 재앙이 멎으면 곧바로 말을 바꿨다. 네 번째 재앙인 파리 떼부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고센 땅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나일강 삼각주 동쪽 지역. 네 번째 재앙(파리 떼)부터 이 지역만 피해를 비켜 갔다는 구분이 본문에 나타난다.만 피해 갔다는 구분이 본문에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가장 끔찍한 경고를 전했다.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이 한밤중에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해야 할 일이 주어졌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떠날 채비를 갖춘 채 서서 급히 먹으라는 지시였다.

    학자들은 아홉 가지 재앙을 흔히 세 개씩 세 묶음으로 나누어 구조를 읽는다. 각 묶음의 첫째와 둘째 재앙 앞에서는 파라오가 미리 경고를 받고, 셋째 앞에서는 경고 없이 곧바로 재앙이 임한다는 관찰이다. 재앙의 소재 - 나일강, 개구리, 곤충, 가축, 우박, 메뚜기, 태양 - 은 각각 이집트 종교의 특정 신(나일강의 하피, 개구리 여신 헤케트, 가축의 신 하토르나 아피스, 태양신 라 등)과 연결짓는 해석이 있으며, 출애굽기 12:12은 이를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고 직접 명시한다. 완악함의 주어는 재앙마다 다르게 서술된다. 초반 재앙들에서는 파라오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표현(카바드, '무겁게 하다')이 먼저 나오다가, 여섯 번째 재앙인 종기(9:12)부터는 신이 완악하게 했다는 표현이 이어진다. 이 서술의 갈림을 어떻게 볼지는 해석이 갈린다(아래 '해석' 참고). 네 번째 재앙부터 고센 땅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나일강 삼각주 동쪽 지역. 네 번째 재앙(파리 떼)부터 이 지역만 피해를 비켜 갔다는 구분이 본문에 나타난다.이 재앙을 피해 갔다는 구분이 도입되고(8:22-23), 이후 재앙에서도 반복해 확인된다. 유월절재앙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했다. '넘어가다(유월)'라는 이름은 죽음의 재앙이 그 집을 넘어갔다는 뜻에서 왔고, 이후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가 된다. 규정(12:1-13) - 흠 없는 어린양, 문설주의 피,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은 채 서서 급히 먹는 식사 - 은 위기 대응을 넘어 해마다 되풀이할 절기로 제도화된다.

  3. 결과

    그날 밤, 이집트에서 맏아들들이 모두 죽었어요. 왕궁의 아들도, 감옥에 있던 사람의 아들도 예외가 없었어요. 파라오의 아들도 죽었어요. 파라오는 한밤중에 모세를 불렀어요. '어서 떠나라! 다 데리고 가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짐을 챙겨 서둘러 이집트를 떠났어요. 사람들은 훗날 이 밤을 기억하려고 유월절재앙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했다. '넘어가다(유월)'라는 이름은 죽음의 재앙이 그 집을 넘어갔다는 뜻에서 왔고, 이후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가 된다.이라는 명절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파라오의 마음은 벌써 다시 바뀌고 있었거든요.

    그날 밤, 이집트 전역에서 맏아들이 죽었다.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아들부터 감옥에 갇힌 죄수의 아들까지 예외가 없었다. 파라오는 한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 당장 떠나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인들에게 금은 패물까지 얻어 서둘러 길을 나섰다. 훗날 유대인들은 이 밤을 유월절재앙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했다. '넘어가다(유월)'라는 이름은 죽음의 재앙이 그 집을 넘어갔다는 뜻에서 왔고, 이후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가 된다.로 기념하며 해마다 다시 이야기한다. 그러나 노예 생활 끝에 얻은 이 자유는 완결된 결말이 아니었다. 파라오의 마음은 이 밤이 지나기가 무섭게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열 번째 재앙(11~12장)은 앞의 아홉과 성격이 다르다. 자연현상에 빗댈 여지가 있던 앞의 재앙들과 달리, 밤중에 이집트의 맏아들만 골라 죽는다는 설정은 처음부터 자연현상으로 읽을 길을 차단한다. 파라오가 한밤중에 모세를 불러 축복까지 구하며 떠나라고 한 장면(12:31-32)은 아홉 번의 협상 끝에 처음으로 나온 조건 없는 항복이다. 출애굽기 12:37은 떠난 장정의 수를 '보행하는 장정만 육십만 가량'이라고 적는데, 여자와 아이를 더하면 이백만 명대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와 이 규모를 문자 그대로 볼지 과장된 수사로 볼지 학계의 논쟁거리가 된다. 유월절재앙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했다. '넘어가다(유월)'라는 이름은 죽음의 재앙이 그 집을 넘어갔다는 뜻에서 왔고, 이후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가 된다. 규정은 이 밤을 일회성 사건에서 해마다 되풀이하는 절기로 전환시킨다. '이 예식을 영원한 규례로 삼으라'(12:14)는 지시가 그 전환의 근거다. 그러나 본문은 이 장면 직후 곧바로 파라오의 마음이 다시 완악해진다고 적어(14:5), 열 번째 재앙조차 최종 결말이 아니라 다음 대결로 이어지는 다리임을 예고한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이집트의 신들과 재앙
재앙 하나하나가 나일강의 신 하피, 개구리 여신 헤케트, 태양신 라처럼 이집트가 섬기던 특정 신을 겨냥했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 출애굽기 12:12은 이를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직접 표현한다.
고센 땅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나일강 삼각주 동쪽 지역. 네 번째 재앙(파리 떼)부터 이 지역만 피해를 비켜 갔다는 구분이 본문에 나타난다.
유월절
재앙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했다. '넘어가다(유월)'라는 이름은 죽음의 재앙이 그 집을 넘어갔다는 뜻에서 왔고, 이후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가 된다.

흔한 오해

열 가지 재앙은 하룻밤 사이에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이다.

아홉 가지 재앙은 여러 주에서 몇 달에 걸쳐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재앙 사이사이 가축이 다시 늘어나거나 파라오가 협상할 시간이 있었다는 정황이 그 근거다. 정말 하룻밤 사이 벌어진 것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과 그날 밤의 탈출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부터 모든 재앙을 피해 갔다.

본문은 네 번째 재앙(파리 떼)부터 고센 땅이 재앙을 피했다고 구분해 적는다. 앞의 세 재앙(피, 개구리, 벌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외였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재앙은 현실의 자연현상과 무관한, 순전히 상상 속 사건으로만 읽힌다.

여러 학자는 나일강 상류의 붉은 침전물, 개구리 떼의 이동, 곤충의 대량 번식 같은 나일강 생태계의 현상들이 연쇄적으로 겹쳐진 사건으로 재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본문은 이를 자연재해가 아니라, 그 순서와 강도와 예고된 때맞음 자체를 신적 개입의 표적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왕은 아홉 번이나 마음을 바꿨다가 다시 굳게 먹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도 고집을 부린 적이 있나요?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게 할까요?

이 이야기는 흔히 '큰 능력이 큰 권력을 이겼다'는 승리담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아홉 번이나 되풀이된 거절은 다른 질문도 남긴다. 값비싼 대가를 눈으로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고집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파라오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 아니면 이건 그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경우였을지는 생각해 볼 문제로 남는다.

이 본문이 되풀이해 서술하는 완악함의 문제는 신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신학사에서 가장 오래 다뤄진 질문 중 하나와 맞닿아 있다. 본문 스스로 두 표현 - 파라오가 스스로 완악하게 함, 신이 완악하게 하심 - 을 나란히 적어 놓았을 뿐, 어느 쪽이 최종적인지 정리해 주지 않는다. 이 모호함을 신학적 결함으로 볼지, 애초에 답하려 하지 않은 질문으로 볼지가 이 본문을 읽는 태도를 가른다(아래 '해석' 참고).

'하나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신이 주권적으로 개입했다는 해석

본문이 명시적으로 신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있으며, 이는 신이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직접 개입했다는 뜻으로 읽는다.

  • 출 9:12, 10:1, 10:20, 10:27, 11:10 등에서 완악하게 한 주체가 신으로 명시된 구절들
  • 출 9:16에서 신이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고' 파라오를 세웠다고 밝히는 구절

신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 등

파라오 자신의 반복된 선택이 굳어진 결과라는 해석

앞선 재앙들에서는 파라오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먼저 적혀 있고, 신이 완악하게 했다는 표현은 그 뒤 재앙부터 나타난다. 반복해서 거부를 선택한 결과를 신이 그대로 확정지었다는 뜻으로 읽는다.

  • 출 7:13, 7:22, 8:15, 8:19, 8:32 등 초반 재앙에서는 파라오 스스로 완악하게 했다는 표현이 먼저 나온다는 서술 순서
  • 히브리어 동사가 '카바드'(무겁게 하다), '카샤'(강퍅하게 하다), '하자크'(강하게 하다) 등 여러 단어로 나뉘어 쓰인다는 점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다수의 복음주의 주석 전통

공통점 본문이 두 표현 - 파라오가 스스로 완악하게 함, 신이 완악하게 하심 - 을 함께 쓴다는 사실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이 두 표현의 병치가 신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동시에 성립시키는지는 신학 전통마다 다르게 설명하며, 합의된 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