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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회심

사람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남자가 있었다. 그 길 위에서 그는 갑자기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

사도행전 · 사도행전 9장 · 초대교회 · 읽는 시간 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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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 상황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했어요. 며칠 전에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돌에 맞아 죽었어요. 사울은 그 자리에 있었어요.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이는 걸 옆에서 지켜봤어요.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집을 찾아다니며 남자든 여자든 끌어냈어요. 이번에는 다마스쿠스라는 먼 도시로 가기로 했어요. 그곳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사울은 그 사람들을 잡아 올 수 있는 허락 편지를 받았어요. 그리고 길을 떠났어요.

    사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사회에서 촉망받던 인물이었다. 스스로도 훗날 자신을 열정적인 바리새인—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삶의 중심으로 삼던 유대교 분파—이었다고 소개한다. 그 열정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한 미움으로 나타났다. 며칠 전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자리에 있었다.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그의 발 앞에 두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죽음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의 신자들을 향한 박해가 거세졌다. 많은 사람이 도시를 떠나 흩어졌다. 사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신자들을 남녀 가리지 않고 끌어내 감옥에 넘겼다. 예루살렘 밖에도 신자들은 있었다. 사울은 대제사장을 찾아가 편지를 요청했다. 다마스쿠스의 회당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던 지역 집회소. 성전이 예루살렘 한 곳뿐이었던 것과 달리, 회당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처음 예수에 대해 말한 곳도, 훗날 그가 새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도 회당이다.들에 보내는 편지로, 그곳에서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발견하면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수 있는 권한을 담고 있었다. 그 시대 신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대신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불렸다. 다마스쿠스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열흘 안팎이 걸리는 먼 도시였다. 사울은 그 먼 길을 굳이 떠날 만큼 이 일에 확신이 있었다.

    사울이 자기 배경을 직접 언급한 대목들을 종합하면 이렇다.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킬리키아의 다소에서 나고 자랐고, 예루살렘에서 당대 이름 높던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스스로 밝힌다(행 22:3).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서술도 뒤에 나온다(행 22:25-28).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로마 제국 안에서 신분을 보장받는 위치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 도(호 호도스, hē hodos)'는 사도행전이 초기 신자 공동체를 부를 때 여섯 차례 쓰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뒤에 안디옥에서 붙여진 것으로 사도행전은 따로 적는다(행 11:26). 즉 이 시점의 공동체는 유대교와 뚜렷이 구분되는 별개의 이름조차 아직 갖지 못한, 유대교 내부의 한 흐름에 가까웠다는 정황이 이 표현에서 드러난다. 대제사장이 다마스쿠스의 회당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던 지역 집회소. 성전이 예루살렘 한 곳뿐이었던 것과 달리, 회당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처음 예수에 대해 말한 곳도, 훗날 그가 새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도 회당이다.에 보내는 편지로 그곳 신자를 결박해 오게 했다는 서술의 역사성은 논쟁거리다. 다마스쿠스는 유대 땅 바깥이었고, 예루살렘 대제사장에게 그 지역에서 사람을 강제로 연행할 공식적인 사법권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다만 디아스포라 회당들이 예루살렘 성전 당국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인정하고, 내부 규율 문제에서 어느 정도 협조했을 가능성은 여러 사료로 뒷받침된다. 강제 연행이 국가 간 사법 공조가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 내부의 관행적 협조에 가까웠으리라고 보는 설명이 다수 학자들의 절충안이다. 다마스쿠스 자체의 정치적 지위도 이 시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도시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이해지만, 뒤에 다룰 탈출 장면에서 바울 스스로 남긴 편지(고후 11:32)는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의 총독이 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 시기 다마스쿠스가 실제로 나바테아의 지배 아래 있었는지, 아니면 로마 지배 아래에서 나바테아 쪽 인사가 일부 권한을 행사했는지는 화폐학적 증거의 공백 때문에 오늘날까지 확정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사울의 심리 상태에 대해 본문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9장 1절은 그를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다마스쿠스로 향한 사람으로 그린다. 사냥감을 쫓듯 나선 인상을 주는 표현이지만, 그 안에 있었을 확신이나 불안, 혹은 스데반의 죽음이 남겼을 잔상에 대해서는 본문이 침묵한다.

  2. 사건

    다마스쿠스 가까이 왔을 때였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밝은 빛이 사울을 둘러쌌어요. 사울은 땅에 쓰러졌어요.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어요. 왜 나를 힘들게 하느냐는 목소리였어요. 사울이 물었어요. 당신은 누구세요? 목소리가 답했어요. 나는 네가 괴롭히는 예수다. 사울은 일어났어요. 그런데 눈이 보이지 않았어요. 함께 있던 사람들이 사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어요. 사울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어요.

    다마스쿠스 성문이 가까워질 무렵, 하늘에서 강한 빛이 사울을 둘러쌌다. 그는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왜 자신을 괴롭히느냐고 묻는 목소리였다. 사울이 누구냐고 되묻자, 자신이 바로 사울이 박해하고 있는 예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계속 가라는 말, 도시에 들어가면 해야 할 일을 알려 줄 사람이 있으리라는 말도 함께였다.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도 무언가를 겪었다. 사도행전은 이들이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모습도 보지 못한 채 말없이 서 있었다고 적는다. 무엇을 들었는지, 그 소리가 사울이 들은 것과 같은 내용이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사울이 일어나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 시내로 데려갔다. 사흘 동안 그는 앞을 보지 못한 채 지냈다. 그 사이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고 본문은 전한다.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사흘을 보냈는지, 스데반의 죽음을 떠올렸는지는 본문이 다루지 않는 부분이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안에서 세 번 서술된다. 9장은 저자(누가)가 3인칭으로 전하는 이야기이고, 22장은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 계단에서 히브리어(또는 아람어)로 군중에게 하는 변론이며, 26장은 로마 총독 앞, 아그립바 왕정에서 그리스어로 하는 법정 진술이다. 같은 사건을 다른 청중, 다른 언어, 다른 목적으로 세 차례 되풀이하는 셈이다. 세 서술 사이에는 세부가 어긋나는 지점이 여럿 있다. 가장 널리 논의되는 것은 동행자들의 경험이다. 9장 7절은 동행자들이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서 있었다고 적는다. 그런데 22장 9절은 반대로, 그들이 빛은 보았으나 말하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적는다. 언뜻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읽힌다. 그리스어 문법을 근거로 이 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있다. '듣다(아쿠오, akouō)'라는 동사는 그리스어에서 목적어로 속격(genitive)을 취할 수도, 대격(accusative)을 취할 수도 있다. 9장 7절은 속격을, 22장 9절은 대격을 쓴다. 일부 문법학자는 속격이 '소리 자체를 듣는 것'을, 대격이 '말의 내용을 알아듣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 이 구분을 적용하면 동행자들이 소리는 들었지만 그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는 뜻으로 두 구절이 조화된다는 설명이 나온다. 빛도 보고 음성 비슷한 소리도 들었지만,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사울에게만 분명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에 대한 반론도 있다. 사도행전 안에서 아쿠오가 속격과 대격을 이렇게 엄격하게 구분해서 쓰이지는 않는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9장 4절에서 사울 자신이 들은 음성은 대격으로 나오는데, 그렇다고 그가 소리만 듣고 뜻을 몰랐다고 볼 근거는 없다. 이 때문에 문법적 조화 시도를 두고 신약학자들의 판단이 갈린다. 그럴듯한 해결책으로 보는 쪽과, 문법 하나로 서사적 긴장을 지우기는 어렵다고 보는 쪽이 함께 있다. 동행자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다. 9장 7절은 그들이 말없이 서 있었다고 적는데, 26장 14절은 우리 모두가 땅에 엎드러졌다고 적어, 사울만 쓰러졌는지 일행 전체가 쓰러졌는지가 갈린다. 이 차이는 문법으로 풀리지 않는다. 26장에는 다른 두 서술에 없는 문장이 하나 더 있다. 음성이 사울에게, 뾰족한 막대(가시 채찍)를 발로 걷어차 봐야 다치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취지의 속담을 건넸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그리스 문학에도 알려진 관용구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카이」에 거의 같은 뜻의 구절이 등장한다. 헬라 문화권 독자에게 익숙한 이 속담이, 히브리어로 진행되었다고 명시된 대화(26:14) 안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시대 아람어·히브리어 화자들 사이에도 이 속담이 자연스럽게 쓰였으리라고 보는 견해와, 그리스어를 쓰는 아그립바 왕정의 청중에게 맞춰 누가가 이 장면을 손질했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함께 제시된다. 이런 차이들을 두고 신약학계는 대체로 세 서술을 서로 다른 목격자 자료로 보기보다, 한 저자가 청중과 상황에 맞게 강조점을 조정하며 다시 들려준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다. 고대 역사 서술에서 같은 사건을 화자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재구성해 들려주는 것은 낯선 기법이 아니었다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 다만 이 설명이 세부 차이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해소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평가가 다르다.

  3. 결과

    다마스쿠스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나니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어요.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어요. 아나니아는 무서웠어요. 사울이 신자들을 잡으러 다닌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갔어요.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어요.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게 떨어졌어요. 사울은 다시 볼 수 있게 됐어요. 사울은 곧바로 회당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던 지역 집회소. 성전이 예루살렘 한 곳뿐이었던 것과 달리, 회당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처음 예수에 대해 말한 곳도, 훗날 그가 새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도 회당이다.에 가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이 사람이 그 사울 맞아? 하고 수군거렸어요. 몇몇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어요. 성문마다 지키고 서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사울을 광주리사울이 성벽을 넘어 도망칠 때 탔다고 전해지는 도구. 사도행전과 고린도후서가 쓰는 그리스어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하나는 큰 광주리, 하나는 노끈으로 엮은 그물망 바구니—성벽의 창을 통해 사람을 달아 내리는 방식 자체는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에 태웠어요. 그리고 성벽 너머로 몰래 내려보냈어요.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신자가 있었다. 그는 환상 중에 사울을 찾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아나니아는 곧바로 순종하지 않고 되묻는다.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신자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이곳에서도 신자를 잡아들일 권한을 가지고 왔다는 소문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을 감추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아나니아는 사울이 머물던 집을 찾아간다. 그를 '형제 사울'이라 부르며 손을 얹었다.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고, 그는 다시 보게 되었다. 아나니아는 그가 앞으로 감당할 역할에 대해서도 짧게 전한다. 물로 씻는 예식(세례)을 받은 뒤 사울은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했다. 사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마스쿠스의 회당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던 지역 집회소. 성전이 예루살렘 한 곳뿐이었던 것과 달리, 회당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처음 예수에 대해 말한 곳도, 훗날 그가 새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도 회당이다.들을 찾아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던 지역 집회소였다. 그가 그곳에서 신자들을 잡아 오려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 발언은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본문은 사람들이 몹시 놀라며,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신자들을 없애려던 바로 그 사람이 맞느냐고 되물었다고 전한다. 시간이 지나며 사울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시작했고, 이는 오히려 그를 향한 반발을 키웠다. 그를 죽이려는 계획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다. 사울 편에 선 신자들은 그를 광주리사울이 성벽을 넘어 도망칠 때 탔다고 전해지는 도구. 사도행전과 고린도후서가 쓰는 그리스어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하나는 큰 광주리, 하나는 노끈으로 엮은 그물망 바구니—성벽의 창을 통해 사람을 달아 내리는 방식 자체는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에 태워 성벽의 창을 통해 밖으로 내려보냈다. 성문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택한 방법이었다. 박해자로 시작한 여정이 도망자의 신세로 끝나는 것으로 이 국면은 마무리된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바울은 훗날 자신이 남긴 편지에서 이 다마스쿠스 탈출을 직접 언급한다(고후 11:32-33). 그런데 이 편지의 설명은 사도행전과 미묘하게 다르다. 사도행전 9장은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성문을 지켰다고 적는다. 반면 고린도후서는 '아레타스 왕의 총독(에트나르케스)'이 그를 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성을 지켰다고 적는다. 주어가 유대 공동체에서 지역 통치 권력으로 바뀌어 있다. 두 서술은 서로 배타적이라기보다, 다마스쿠스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지역 당국인 나바테아 총독의 협조를 얻어 성문 감시에 나섰다고 보면 겹쳐질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절충 설명이다. 다만 이 조화가 추정에 기댄 것이며, 본문 자체가 두 설명을 직접 연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점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사건의 연대를 좁히는 데도 쓰인다.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는 AD 40년에 죽었으므로, 이 총독이 실제로 다마스쿠스를 통제하고 있었다면 사건은 그 이전이어야 한다. 문제는 이 시기 다마스쿠스가 나바테아 지배 아래 있었다는 직접적인 화폐학적 증거—그 도시에서 나바테아 왕의 이름으로 발행된 주화—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치세(AD 37년 사망) 동안 이 도시가 로마 시리아 속주에 속해 있었다는 정황은 비교적 뚜렷한 반면, 그 직후 칼리굴라 치세에 아레타스에게 일시적으로 넘겨졌으리라는 추정은 정황 논증일 뿐 직접 증거는 없다. 이 때문에 사울의 회심 연대를 AD 33~36년 사이로 폭넓게 잡는 쪽이 다수지만, 정확한 연도는 확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학설이 갈린다). 바구니를 가리키는 단어도 두 본문에서 다르다. 사도행전은 스퓌리스(spyris, 큰 광주리사울이 성벽을 넘어 도망칠 때 탔다고 전해지는 도구. 사도행전과 고린도후서가 쓰는 그리스어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하나는 큰 광주리, 하나는 노끈으로 엮은 그물망 바구니—성벽의 창을 통해 사람을 달아 내리는 방식 자체는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를, 고린도후서는 사르가네(sarganē, 노끈으로 엮은 그물망 바구니)를 쓴다.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독립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 일화가 후대에 지어낸 것이 아니라 여러 경로로 전해진 사건이라는 근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아나니아라는 인물은 신약 전체에서 이 장면에만 등장하고 이후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2세기 이후 일부 외경·전승 문헌은 그가 훗날 다마스쿠스 교회의 첫 지도자가 되었다고 전하지만, 이는 신약 정경 밖의 후대 전승이며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는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박해자를 찾아간 이 짧은 등장 이후 그의 삶에 대해 본문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사울이 회당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던 지역 집회소. 성전이 예루살렘 한 곳뿐이었던 것과 달리, 회당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처음 예수에 대해 말한 곳도, 훗날 그가 새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도 회당이다.에서 곧바로 보인 태도 변화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그가 논증한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가 이미 갖고 있던 유대교 성경 해석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틀 안에서 결론만 바꾼 논증에 가깝다. 다른 종교 체계로 옮겨 간 사람의 언어라기보다, 같은 경전을 다르게 읽게 된 사람의 언어로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이 지점이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서 다루는 '회심인가 소명인가'라는 물음과 맞닿는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그 도(道)
사도행전이 초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부르던 이름. 그리스어 '호 호도스(hē hodos)'를 옮긴 말로, 사도행전 안에서 여섯 차례 쓰인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이보다 뒤에 안디옥에서 처음 붙었다고 사도행전은 따로 적는다. 이 시점의 공동체가 아직 유대교와 뚜렷이 구분되는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마스쿠스(다메섹)
시리아 지역의 오래된 상업 도시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열흘 안팎 걸리는 먼 거리였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와 회당이 여러 곳에 있었다. 오늘날까지 사람이 계속 거주해 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대제사장의 편지
예루살렘 성전을 관할하던 대제사장이 다른 지역 회당 앞으로 써 준 신임장 성격의 편지. 다마스쿠스는 유대 땅 바깥이라 대제사장에게 그 지역에서 사람을 강제로 잡아 올 공식적인 사법권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디아스포라 회당들이 예루살렘 성전 당국의 권위를 인정하고 내부 규율 문제에서 협조했으리라는 설명이 유력하다.
회당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던 지역 집회소. 성전이 예루살렘 한 곳뿐이었던 것과 달리, 회당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처음 예수에 대해 말한 곳도, 훗날 그가 새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도 회당이다.
안수
손을 얹는 행위. 축복이나 치유, 특별한 역할을 맡기는 순간에 흔히 쓰이던 몸짓이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손을 얹은 것은 그를 낯선 침입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로 함께 읽힌다.
광주리
사울이 성벽을 넘어 도망칠 때 탔다고 전해지는 도구. 사도행전과 고린도후서가 쓰는 그리스어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하나는 큰 광주리, 하나는 노끈으로 엮은 그물망 바구니—성벽의 창을 통해 사람을 달아 내리는 방식 자체는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흔한 오해

사울은 말을 타고 가다가 낙마했다.

본문 어디에도 말(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울이 걸어서 갔는지 다른 수단을 썼는지도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이 이미지가 굳어진 것은 1600년경 카라바조를 비롯한 후대 화가들이 이 사건을 극적인 낙마 장면으로 그린 뒤부터라고 알려진다. 그림이 본문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경우다.

사울이라는 이름을 바울로 개명한 것이 회심의 상징적 증거다.

사도행전 13장 9절은 그를 '사울이라고도 하는 바울'이라고 소개할 뿐, 회심 현장이나 그 직후 별도의 개명 의식을 서술하지 않는다. 이름이 바뀌어 쓰이는 시점도 다마스쿠스 사건이 아니라 이방인 선교가 본격화되는 13장 이후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 바울은 로마 시민에게 익숙한 그리스·라틴식 이름으로, 학자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이 두 이름을 함께 쓰던 흔한 관행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편이 우세하다.

동행자들은 이 사건에서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사도행전 9장은 동행자들이 소리를 들었다고 적고, 22장은 빛을 보았다고 적는다. 정확히 무엇을 듣고 보았는지는 두 구절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서술은 어디에도 없다. 사울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일행 전체가 어떤 형태로든 그 사건을 함께 겪은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사울은 사람들을 괴롭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쉽게 믿지 못했어요. 예전 모습이 너무 무서웠으니까요. 아나니아도 처음엔 무서워했어요. 그런데 결국 사울을 찾아갔어요. 누군가 갑자기 달라졌다고 말하면, 바로 믿을 수 있나요? 아니면 예전 모습이 먼저 떠오르나요?

이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변화 자체보다, 그 변화를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순종하지 않는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사울이 신자들에게 한 일—를 먼저 꺼낸다. 다마스쿠스의 회당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모여 성경을 읽고 토론하던 지역 집회소. 성전이 예루살렘 한 곳뿐이었던 것과 달리, 회당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처음 예수에 대해 말한 곳도, 훗날 그가 새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도 회당이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새로운 말을 듣고도 예전의 그를 먼저 떠올리며 의심한다. 본문은 이 의심을 나무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의심이 근거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남겨 둔다.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과, 그 변화를 아직 믿지 못하는 사람 사이의 간격은 이 이야기에서 저절로 좁혀지지 않는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이 사건이 사울 혼자만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행자들도 무언가를 겪었고, 아나니아도 자기 몫의 두려움을 안고 움직여야 했다. 한 사람의 극적인 전환 뒤에는 그 전환을 받아들이거나 감당해야 했던 다른 사람들의 몫이 있었다. 누군가 갑자기 달라졌다고 말할 때, 그 말을 듣는 쪽에는 어떤 몫이 남을까. 그리고 그 몫을 감당하기로 하는 결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서 다룬다. 여기서는 그 논쟁이 남기는 질문 하나를 짚어 둘 만하다. 전통적으로 이 사건은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 이야기로 읽혀 왔다. 그런데 사울 자신이 남긴 편지들을 보면, 그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불렀고 유대 율법의 틀 안에서 자기 논증을 펼쳤다. 그가 버린 것은 유대교라는 정체성 자체가 아니라, 예수를 배제한 채 그 정체성을 이해하던 이전의 방식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이 구분이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크다. '회심'이라는 언어는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겨 가는 단절을 전제한다. '소명(부르심)'이라는 언어는 같은 틀 안에서 새로운 임무를 받는 연속성을 전제한다. 둘 중 어느 언어를 택하느냐에 따라, 이 사건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얼마나 이른 시기부터 별개의 것으로 갈라놓았다고 볼 것인지에 대한 답도 달라진다. 본문 자체는 이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사울이 눈을 뜨고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이전과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이어졌는지를 가르는 일은,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계속 남겨진 몫이다.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 회심인가 소명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종교 간 회심으로 보는 전통적 입장

유대교라는 한 종교에서 기독교라는 다른 종교로 방향을 바꾼 전형적인 회심 사건으로 본다.

  • 박해자에서 전도자로의 방향이 극적으로 뒤집히는 장면으로 사도행전이 이 사건을 그린다는 점
  • 사울이 훗날 자신의 옛 정체성과 관련된 것들을 손해로 여기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대목이 있다는 점(빌 3장)
  • 물로 씻는 예식(세례)을 받고 새로운 공동체('그 도')에 합류했다는 점

전통적인 교회사 서술과 대중적 이해에서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관점

예언자적 부르심(소명)으로 보는 재해석

초기 기독교를 별개의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 내부의 한 메시아 운동으로 보고, 이 사건을 종교를 바꾼 사건이 아니라 이사야·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이 받은 것과 같은 구조의 부르심으로 읽는다.

  • 사울 자신이 갈라디아서에서 자기 경험을 묘사할 때, 태어나기 전부터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았다는 예레미야 1장·이사야 49장의 예언자 소명 언어와 겹치는 표현을 쓴다는 점
  • 사울이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부르고 유대 율법과 관습을 유지했다는 점(행 21장 등)
  • 20세기 후반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이 이 구분을 제기하며, 이 사건을 이방인에게 보낼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건으로 다시 읽자고 제안했다는 점

크리스터 스텐달 이후 일부 신약학자들, 이른바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 계열 연구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진다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이 사건이 사울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전환이 그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촉발되었다는 사실은 동일하게 인정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회심'과 '소명' 가운데 어느 언어가 더 정확한지, 그리고 1세기 당시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를 얼마나 별개의 종교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신약학 안에서도,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다루는 오늘날의 대화에서도 계속 다르게 답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