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비즈

잃은 양

누구와 같은 밥상에 앉느냐를 두고 뒷말이 돌았다. 예수는 변명 대신,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누가복음 · 누가복음 15장, 마태복음 18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3

jesus

이야기

  1. 상황

    예수 곁에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중에는 미움받는 사람도 많았어요. 세금을 걷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때 그 땅은 로마가 다스렸어요. 세금 걷는 일은 동네 사람이 맡았어요. 그래서 배신자라고 불렸어요. 마을에서 손가락질받는 사람도 있었어요. 예수는 그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었어요. 그 시절에 같이 밥을 먹는 건 큰일이었어요. 네 편이 되겠다는 뜻이었거든요. 그걸 본 어른들이 수군거렸어요. 저 사람은 왜 저런 자들과 어울리느냐고요. 그 어른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규칙을 아주 열심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어요. 다만 규칙에는 그늘이 있어요. 안에 드는 사람과 밖에 남는 사람이 갈려요. 예수는 그 말을 들었어요. 그리고 말싸움을 하지 않았어요. 대신 이야기를 하나 꺼냈어요. 양을 치는 사람 이야기였어요.

    누가복음 15장은 장면 설명 두 줄로 시작한다. 세리와 '죄인'세리는 로마가 지배하던 지역에서 세금과 통행료를 대신 걷던 사람.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이어서 배신자라는 낙인이 붙었다. '죄인'은 범죄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고, 직업이나 형편 때문에 종교적 규정을 지킬 수 없던 사람들까지 포함해 부르던 분류에 가깝다.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예수의 말을 들으러 모여들었고, 그것을 지켜보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성전 제사에 기대지 않고 일상에서 율법을 지키려 한 유대교 안의 경건 운동 집단과, 성경 본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전문가들. 복음서에서 예수와 자주 부딪히지만 악당 집단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가장 성실한 신앙인으로 평가받던 쪽이다.들이 수군거렸다는 것이다. 수군거림의 내용은 짧았다. 저 사람은 저런 자들을 받아 주고, 심지어 같이 밥까지 먹는다는 것이었다. 오늘 감각으로는 별일 아닌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시대에 누구와 한 상에 앉느냐는 취향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공개 표시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불평은 예절 지적이 아니라 자격 심사에 대한 항의였다. 세리는 로마의 세금을 대신 걷던 유대인이었다. 점령군의 돈줄 노릇을 한다는 이유로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죄인'이라는 말도 오늘 쓰는 뜻보다 넓었다.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만이 아니라, 직업이나 형편 때문에 종교적 청결 규정을 지킬 수 없던 사람들까지 묶어 부른 말이라는 견해가 많다. 바리새인들을 악당으로 그리면 이 장면을 놓친다. 이들은 성전에 기대지 않고 일상에서 율법(유대교의 종교 법)을 지키려 한 진지한 사람들이었다. 누구와 먹느냐를 따진 것도 그 진지함의 일부였다. 다만 어떤 기준이든 명단을 만든다. 안에 드는 사람과 밖으로 밀리는 사람이 갈린다. 예수는 그 자리에서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도 세 개를 연달아 했다. 양 백 마리한 집안이 감당할 만한 중간 규모의 무리로 본다. 큰 부자의 재산도, 겨우 먹고사는 살림도 아니다. 그래서 한 마리를 잃는 손실은 뼈아프지만 파산할 정도는 아니다. 이 어중간함이 이야기의 계산을 더 어색하게 만든다. 중 한 마리를 잃은 남자, 은전 열 닢 중 한 닢을 잃은 여자, 두 아들 중 하나가 집을 나간 아버지. 그중 첫 번째가 이 이야기다. 시작도 진술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여기 양 백 마리를 치는 사람이 있다고 치고, 그중 하나가 없어졌다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이다. 듣는 사람을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 자리에 세워 놓고 출발한 셈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첫 두 절은 나머지 전체를 읽는 틀이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을 들으러 가까이 왔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다는 서술이다. 여기 쓰인 동사 '디아공귀조(diagongyzō)'는 신약에서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다른 한 곳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장면(눅 19:7)이어서, 두 대목을 짝으로 읽으라는 신호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단어 계열은 70인역(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이 지도자에게 불평하는 장면에 쓰이던 말이기도 하다. '죄인(하마르톨로이)'의 외연은 논쟁이 있다. 도덕적 범죄자로 좁게 보는 견해, 정결 규정을 지키기 어려운 직업과 계층까지 넓게 보는 견해, 그리고 바리새파의 시선에서 '우리 기준 밖의 사람들'을 뭉뚱그린 호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어느 쪽이든 이 말이 객관적 판정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분류였다는 점은 대체로 공유된다.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 이미지의 배경은 훨씬 오래됐다. 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왕과 신을 부르던 정치적 칭호였다. 함무라비도 자신을 백성의 목자로 칭했다. 성경 안에서는 시편 23편, 예레미야 23장, 그리고 특히 에스겔 34장구약의 한 예언서. 자기 배만 채우고 흩어진 양을 찾지 않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고발한 뒤, 하나님이 직접 양을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하는 대목이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이미지의 뿌리로 자주 지목된다.이 이 계열의 정점에 있다. 에스겔 34장은 자기 배만 채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나쁜 목자'로 고발한 뒤, 하나님이 직접 흩어진 양을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잃은 것을 찾고, 쫓겨난 것을 데려오고, 다친 것을 싸매겠다는 동사들이 거기 줄지어 나온다. 1세기 청중에게 '잃은 양을 찾는 목자'는 새 발명이 아니라 익숙한 인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비유예수가 자주 쓴 짧은 이야기 형식. 교훈을 예쁘게 포장한 예화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 한 자리에 서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비유를 들은 사람은 정보를 얻는 대신 입장을 정하게 된다.가 은근히 겨냥한 것은 개인의 뉘우침만이 아니라, 백성을 관리하던 사람들의 직무 자체다. 목자의 사회적 지위에 관해서는 조심할 대목이 있다. '목자는 부정한 직업으로 취급되어 법정 증언 자격이 없었다'는 설명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근거로 드는 랍비 문헌은 2세기 이후에 편집된 것이다. 1세기 갈릴리와 유대의 실제 관행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렵다. 목자 일이 고되고 사회적 평판이 높지 않은 노동이었다는 정도는 무리 없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단정하는 서술은 사료보다 앞서 나간 것이다. 비유라는 형식 자체도 짚어 둘 만하다. 그리스어 '파라볼레'는 히브리어 '마샬'을 옮긴 말인데, 이 계열의 말은 교훈을 알기 쉽게 포장한 예화라는 뜻이 아니다. 수수께끼, 속담, 풍자, 비교를 두루 포함한다. 20세기 이후 비유 연구는 예수의 비유를 '하나의 교훈으로 환원되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세계관을 흔들어 놓는 짧은 서사로 다루는 쪽으로 옮겨 갔다. 이 비유를 읽을 때도 정답을 하나 찾는 방식보다, 이야기가 청중을 어느 자리에 세우는지를 따라가는 편이 본문에 가깝다.

  2. 사건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한 집안이 감당할 만한 중간 규모의 무리로 본다. 큰 부자의 재산도, 겨우 먹고사는 살림도 아니다. 그래서 한 마리를 잃는 손실은 뼈아프지만 파산할 정도는 아니다. 이 어중간함이 이야기의 계산을 더 어색하게 만든다.가 있었어요. 어느 날 한 마리가 사라졌어요. 양은 일부러 도망치지 않아요. 풀을 뜯다가 조금씩 멀어져요. 고개를 들면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요.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는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나갔어요. 그리고 사라진 한 마리를 찾아다녔어요. 한 마리는 백 마리 중에 하나예요. 포기해도 크게 손해는 아니에요. 그런데 목자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만날 때까지 계속 다녔어요. 드디어 그 양을 만났어요. 목자는 양을 혼내지 않았어요. 대신 어깨에 메고 왔어요. 오래 헤매서 못 걸었을 거예요. 집에 온 목자는 이웃을 불렀어요. 같이 기뻐해 달라고 했어요. 잔치에 든 돈이 양값보다 많았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목자는 잔치를 열었어요.

    양 백 마리한 집안이 감당할 만한 중간 규모의 무리로 본다. 큰 부자의 재산도, 겨우 먹고사는 살림도 아니다. 그래서 한 마리를 잃는 손실은 뼈아프지만 파산할 정도는 아니다. 이 어중간함이 이야기의 계산을 더 어색하게 만든다.는 아주 큰 재산도, 아주 작은 재산도 아니다. 한 집안이 감당할 만한 규모로 본다. 그중 한 마리가 없어진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는다. 양이 무리에서 떨어지는 방식은 대체로 극적이지 않다.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다가 조금씩 밀려나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다.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는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나선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이 걸린다. 아흔아홉을 위험에 두면서 한 마리를 찾는 게 맞느냐는 것이다. 계산으로 보면 명백한 손해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 계산을 아예 다루지 않는다. 목자가 망설였다는 서술도, 아흔아홉이 그동안 어떻게 됐다는 서술도 없다. 당시 양치기는 흔히 여럿이 함께 무리를 돌봤고, 밤에는 돌담을 두른 우리에 몰아넣었다. 남은 무리를 아무 데나 방치했다고 읽을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 여기서 나온다. 다만 본문이 그렇게 해명해 주지는 않는다. 찾는 과정도 길게 그려지지 않는다. 대신 한 가지가 못 박힌다. 발견할 때까지 수색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며칠이 걸리든, 얼마나 험한 데까지 가야 하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찾은 다음 장면이 이야기의 방향을 정한다. 목자는 양을 끌고 오지 않는다. 어깨에 메고 온다. 왜 그랬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지만, 무리에서 떨어져 오래 헤맨 양이 제 발로 걷기 어려웠으리라는 추측은 자연스럽다. 야단치거나 벌을 주는 장면은 없다. 잃어버린 쪽이 치른 대가만 있고, 잃어진 쪽이 치르는 대가는 없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이 온다. 집에 도착한 목자는 혼자 안도하고 끝내지 않는다. 이웃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기뻐해 달라고 한다. 잔치에 든 비용이 양 한 마리 값보다 컸을 것이라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듣는 사람의 자리가 이미 바뀌어 있다. 처음에 그들은 목자 자리에 초대받았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이 실제로 서 있는 자리는, 잔치에 불려 왔는데 기뻐하지 않는 이웃 쪽이다. 비난이 그들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두 복음서의 어휘 차이부터 정리하는 편이 낫다. 누가는 양이 '아폴뤼미(apollymi)' 되었다고 쓴다. 없어졌다, 잃어졌다는 뜻이고, 15장 내내 동전과 아들에게도 같은 계열의 말이 붙는다. 마태는 '플라나오마이(planaomai)'를 쓴다. 길을 잃고 떠돈다는 뜻으로, 영어 planet(떠도는 별)이 여기서 나왔다. 잃어버린 쪽의 상실을 강조하느냐, 벗어난 쪽의 이탈을 강조하느냐의 차이다. 남겨진 아흔아홉을 두는 장소도 다르다. 누가는 '에레모스', 곧 광야에 둔다. 마태는 산에 둔다. 둘 다 목축지로 쓰이던 땅이라 실질적 차이는 크지 않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누가 쪽 표현이 위태로운 인상을 더 준다는 지적은 있다. 결과에 대한 표현도 갈린다. 누가는 찾을 때까지 찾는다고 하고, 실제로 찾아낸다. 마태는 '만일 찾게 되면'이라는 조건절을 넣어 결과를 열어 둔다. 이를 두고 마태 공동체가 실제로 떠난 사람을 되찾지 못하는 경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반대로 그리스어 조건문의 관용적 용법일 뿐 신학적 의미를 얹을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아흔아홉을 두고 간다'는 대목은 고대 청중에게도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유예수가 자주 쓴 짧은 이야기 형식. 교훈을 예쁘게 포장한 예화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 한 자리에 서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비유를 들은 사람은 정보를 얻는 대신 입장을 정하게 된다.는 원래 반문 형식이라 '누가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라며 동의를 요구하는데, 실제 목축 관행을 따지면 답이 그렇게 자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주석이 공동 목축을 근거로 든다. 무리는 흔히 여러 사람이 함께 지켰고, 돌담을 두른 우리나 동굴을 밤 우리로 썼다는 것이다. 다만 본문은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관심을 두지 않는 지점을 우리가 대신 변호하고 있는 셈이라는 자기 반성도 주석사에 등장한다. 어깨에 메고 오는 동작은 후대 미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린 양이나 송아지를 어깨에 멘 남자 조각상은 기독교 이전 그리스·로마 세계에 이미 있던 형식이다. 초기 기독교는 그 익숙한 형태를 가져다 자기 이야기의 그림으로 삼았다. 로마의 지하 묘지 벽화에 3세기부터 이 형상이 반복해 나타나는 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정면으로 그린 그림이 널리 퍼지는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도마복음이라는 문헌에도 이 비유의 다른 판본이 실려 있다(107번). 신약 27권 목록에는 들어가지 않은 초기 기독교 문서다. 거기서는 잃어버린 양이 무리 가운데 가장 큰 양이고,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는 찾아낸 뒤 그 양에게 나머지 아흔아홉보다 너를 더 아낀다고 말한다. 잃은 것의 회복이 아니라 특별한 가치의 발견 쪽으로 방향이 바뀐 셈이다. 도마복음의 연대와 성격은 논쟁 중이며, 대체로 2세기 문헌으로 보되 일부 자료가 더 이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3. 결과

    예수는 이야기를 이렇게 끝냈어요. 한 사람이 돌아오면 하늘이 기뻐한다고요. 그것도 아주 크게 기뻐한다고요. 수군거리던 어른들은 조용해졌어요.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잃어버린 양은 아니에요. 찾아 나선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도 아니에요. 잔치에 왔는데 웃지 않는 사람 쪽이에요. 예수는 그날 이야기를 세 개 했어요. 잃은 양, 잃은 동전, 집 나간 아들이에요. 세 이야기의 끝은 모두 같아요. 잔치를 열고 같이 기뻐하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마지막 이야기는 좀 달라요. 잔치에 안 들어가는 형이 나와요. 그 형이 어떻게 했는지는 안 나와요.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거든요. 답을 적어 두지 않은 거예요.

    예수는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돌아온 한 사람 때문에 하늘에서 벌어지는 기쁨이, 돌아설 일이 없는 아흔아홉 때문에 벌어지는 기쁨보다 크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오래 논쟁거리였다. 아흔아홉을 '정말 잘못이 없는 사람들'로 읽을지,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로 읽을지가 갈린다. 앞의 상황을 생각하면 두 번째로 기우는 해석이 많지만, 본문이 못 박아 두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무게중심이 옮겨졌다는 점이다. 처음 문제는 '예수가 누구와 밥을 먹는가'였다. 이야기가 끝날 때 문제는 '한 사람이 돌아온 자리에서 당신은 기뻐하는가'로 바뀌어 있다. 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 18장마태복음이 예수의 가르침을 다섯 덩어리로 묶어 배열했다고 볼 때, 공동체 안의 관계와 용서를 다루는 묶음이다. 잃은 양 비유가 여기 놓이면 '밖의 사람을 데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의 사람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로 읽힌다.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놓인 자리가 다르다. 마태에서는 비판자들이 아니라 제자들이 듣는다. 앞뒤 문맥은 공동체 안에서 누가 큰 사람인가, 약한 구성원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래서 마태의 양은 밖에서 들어와야 할 사람이라기보다, 이미 무리 안에 있다가 벗어난 사람에 가깝게 읽힌다. 비유예수가 자주 쓴 짧은 이야기 형식. 교훈을 예쁘게 포장한 예화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 한 자리에 서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비유를 들은 사람은 정보를 얻는 대신 입장을 정하게 된다. 바로 뒤에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는 절차가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무리 문장도 다르다. 한 사람도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다. 한쪽에서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다른 쪽에서는 이미 들어와 있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이 그 한 마리다. 이 차이를 어떻게 볼지는 아래에 따로 정리했다. 누가복음의 세 이야기는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백에 하나, 열에 하나, 둘에 하나. 잃는 대상은 점점 소중해지고 마지막에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셋 다 잔치로 끝난다. 다만 마지막 이야기만은 잔치 밖에 서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을 한 명 남겨 둔다. 그가 끝내 들어갔는지 본문은 적지 않는다. 그 열린 결말이 15장 전체의 마지막 장면이다.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가 양을 어깨에 멘 모습은 훗날 기독교가 가장 먼저, 가장 자주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가 된다.

    누가의 결론 문장은 이 비유예수가 자주 쓴 짧은 이야기 형식. 교훈을 예쁘게 포장한 예화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 한 자리에 서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비유를 들은 사람은 정보를 얻는 대신 입장을 정하게 된다.를 '회개교회에서 자주 쓰는 말. 감정적으로 뉘우친다는 뜻보다 방향을 돌린다는 뜻에 가깝다. 그리스어 원어도 '생각을 바꾸다'는 뜻의 말이다. 다만 이 비유 안에서 양이 스스로 방향을 돌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잘못을 인정하고 방향을 바꾸는 것)라는 말과 묶는다. 그런데 정작 비유 안에서 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돌아오지도, 뉘우치지도 않는다. 그냥 발견되고 실려 온다. 결론과 본문 사이의 이 어긋남은 오래된 논점이다. 한 갈래는 이것을 누가의 편집으로 본다. 이야기 자체는 찾는 쪽의 집요함에 관한 것인데, 누가가 자기 책 전체의 관심사인 회개와 연결해 마무리를 붙였다는 설명이다. 다른 갈래는 어긋남이 아니라 정의라고 본다. 이 비유에서 회개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결심이 아니라, 찾아온 자에게 발견되어 무리로 돌아오는 사건 자체를 가리킨다는 읽기다. 후자를 택하면 회개의 주도권이 사람 쪽에서 옮겨 간다. '뉘우칠 일이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아홉'으로 옮겨지는 표현도 해석이 갈린다. 반어로 읽는 쪽은 앞의 상황을 근거로 든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을 겨냥한 말이니 스스로를 그렇게 여긴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문자대로 읽는 쪽은 이 비유가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비대칭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잃었다가 되찾은 것 앞에서 감정이 더 크게 움직인다는, 누구나 아는 경험을 근거로 삼는다. 마태 쪽 배치는 완전히 다른 문제를 다룬다. 18장은 마태복음의 다섯 가르침 묶음 가운데 공동체 관계를 다루는 장이다. 누가 큰 사람이냐는 제자들의 질문, 아이를 가운데 세우는 장면,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경고가 앞에 오고,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절차와 용서에 대한 문답이 뒤에 온다. 그 사이에 이 비유가 놓인다. 그래서 마태가 말하는 '작은 자들'은 아직 밖에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쉽게 무시당하는 구성원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무리도 회개가 아니라 한 사람도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진술이다. 본문 문제도 하나 있다. 여러 번역본에서 마태복음 18장마태복음이 예수의 가르침을 다섯 덩어리로 묶어 배열했다고 볼 때, 공동체 안의 관계와 용서를 다루는 묶음이다. 잃은 양 비유가 여기 놓이면 '밖의 사람을 데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의 사람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로 읽힌다. 11절이 비어 있거나 각주로 내려가 있다. 이 절은 가장 이른 사본들에 없고, 누가복음 19:10의 문장이 후대 필사 과정에서 옮겨 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절 번호가 10에서 12로 건너뛰는 성경을 만나게 되는 이유다. 두 판본의 관계는 공관복음 문제의 축소판이다. 마가복음에는 이 비유가 없고 마태와 누가에만 있으므로, 두 사람이 공통으로 쓴 어록 자료(Q 가설, 독일어 Quelle에서 온 이름)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보는 설명이 오래 유력했다. 그러나 Q라는 실물 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고, 누가가 마태를 직접 참고했다고 보는 대안도 계속 제기된다. 또 순회 교사가 같은 이야기를 여러 자리에서 다르게 사용했으리라는, 문헌 관계와 무관한 설명도 있다. 어느 설명을 택하든 확인 가능한 사실은 하나다. 두 복음서는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문제에 붙여 놓았고, 그 배치가 이야기의 뜻을 바꾼다. 누가에서는 밖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는 이야기가 되고, 마태에서는 안에 있던 사람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비유
예수가 자주 쓴 짧은 이야기 형식. 교훈을 예쁘게 포장한 예화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 한 자리에 서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비유를 들은 사람은 정보를 얻는 대신 입장을 정하게 된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성전 제사에 기대지 않고 일상에서 율법을 지키려 한 유대교 안의 경건 운동 집단과, 성경 본문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전문가들. 복음서에서 예수와 자주 부딪히지만 악당 집단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가장 성실한 신앙인으로 평가받던 쪽이다.
세리와 '죄인'
세리는 로마가 지배하던 지역에서 세금과 통행료를 대신 걷던 사람.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이어서 배신자라는 낙인이 붙었다. '죄인'은 범죄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고, 직업이나 형편 때문에 종교적 규정을 지킬 수 없던 사람들까지 포함해 부르던 분류에 가깝다.
같은 상에 앉는다는 것
그 시대 유대 사회에서 누구와 밥을 먹느냐는 사적인 취향이 아니라 공개 표시였다. 저 사람을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래서 예수가 어느 집에서 식사했다는 사실 하나가 매번 논란이 되었다.
양 백 마리
한 집안이 감당할 만한 중간 규모의 무리로 본다. 큰 부자의 재산도, 겨우 먹고사는 살림도 아니다. 그래서 한 마리를 잃는 손실은 뼈아프지만 파산할 정도는 아니다. 이 어중간함이 이야기의 계산을 더 어색하게 만든다.
목자
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
에스겔 34장
구약의 한 예언서. 자기 배만 채우고 흩어진 양을 찾지 않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고발한 뒤, 하나님이 직접 양을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하는 대목이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이미지의 뿌리로 자주 지목된다.
회개
교회에서 자주 쓰는 말. 감정적으로 뉘우친다는 뜻보다 방향을 돌린다는 뜻에 가깝다. 그리스어 원어도 '생각을 바꾸다'는 뜻의 말이다. 다만 이 비유 안에서 양이 스스로 방향을 돌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이야기
잃은 양, 잃은 동전, 집 나간 아들이 한 자리에서 연달아 나온다. 세 이야기 모두 잃음과 찾음과 잔치로 이어지지만, 마지막 이야기만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을 남겨 둔 채 끝난다.
마태복음 18장
마태복음이 예수의 가르침을 다섯 덩어리로 묶어 배열했다고 볼 때, 공동체 안의 관계와 용서를 다루는 묶음이다. 잃은 양 비유가 여기 놓이면 '밖의 사람을 데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의 사람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로 읽힌다.

흔한 오해

이 이야기는 원래 어린이를 위한 따뜻한 그림 같은 이야기다.

누가복음이 적어 둔 첫 청중은 아이들이 아니라, 예수가 어울리는 상대를 못마땅해하던 어른들이다. 위로이기 전에 반론이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그들은 잔치에 불려 왔는데 기뻐하지 않는 이웃 자리에 서게 된다. 나중에 이 비유가 위로의 그림으로 널리 쓰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원래의 날카로움이 지워지기도 했다.

잃은 양은 말을 안 듣고 도망친 양이다.

본문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아예 말하지 않는다. 마태 쪽이 쓴 말은 '떠돌다, 길을 잃다'에 가깝고, 누가 쪽은 '없어졌다'에 가깝다. 어느 쪽도 반항이나 탈주를 그리지 않는다. 양이 풀을 뜯다 조금씩 밀려나 무리를 놓친다는 설명은 목축 관행에 근거한 해설이지 본문의 서술은 아니다.

목자가 아흔아홉을 위험한 들판에 내버렸다는 것이 이 비유의 요점이다.

이야기는 아흔아홉이 어떻게 됐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목자가 망설이는 장면도, 남은 무리의 안부도 나오지 않는다. 당시 양치기가 흔히 여럿이 함께 무리를 돌봤다는 점을 들어 방치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 많지만, 본문이 그렇게 해명해 주지는 않는다. 비유는 셈을 반박하는 대신 아예 다루지 않는 방식으로 넘어간다.

당시 목자는 법정에서 증언조차 할 수 없는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근거로 드는 랍비 문헌은 2세기 이후에 편집된 것이라, 1세기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조심스럽다. 목축이 고되고 평판이 높지 않은 노동이었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다. 동시에 '목자'는 왕과 신을 부르던 고급 칭호이기도 했다. 한 단어가 낮은 노동과 높은 통치를 동시에 가리켰다는 점이 이 비유의 긴장이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잃은 양 이야기는 같은 자리에서 한 말이다.

두 복음서는 이 이야기를 서로 다른 상황에 놓았고, 듣는 대상도 다르다. 누가에서는 비판자들이 듣고, 마태에서는 제자들이 듣는다. 공통 자료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보는 설명, 한쪽이 다른 쪽을 참고했다고 보는 설명, 순회 교사가 같은 이야기를 여러 자리에서 다르게 썼다고 보는 설명이 모두 제기되어 있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성경에는 마태복음 18장 11절이 원래부터 없다는 말은 성경을 훼손한 것이다.

이 절이 비어 있거나 각주로 내려간 번역본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장 이른 사본들에 이 절이 없고, 누가복음 19:10의 문장이 필사 과정에서 옮겨 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내용을 없앤 것이 아니라, 더 오래된 사본이 발견되면서 원래 형태를 복원한 결과에 가깝다. 다만 사본 판단 자체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무언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나요? 값이 싼 물건이어도 마음이 계속 쓰여요. 없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걸리거든요. 이 이야기 속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도 그랬어요.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었는데도요. 목자는 그 한 마리를 숫자로 보지 않았어요. 예수는 이 이야기를 어른들 앞에서 했어요. 그 어른들은 어떤 사람들을 싫어했어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질문이 남아요. 나는 누가 돌아오면 기쁠까요. 그리고 누가 돌아오면 기쁘지 않을까요.

이 이야기는 셈이 맞지 않는다. 아흔아홉을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가는 건 어떤 계산으로도 이득이 아니다. 그런데 비유예수가 자주 쓴 짧은 이야기 형식. 교훈을 예쁘게 포장한 예화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 한 자리에 서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비유를 들은 사람은 정보를 얻는 대신 입장을 정하게 된다.는 그 계산을 반박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한 마리를 셈에 넣는 방식이 아니라, 애초에 셈을 하지 않는 방식이다. 여기서 걸리는 지점이 있다. 한 마리에게 좋은 소식이 아흔아홉에게도 좋은 소식인가 하는 문제다. 이야기는 직접 답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는 혼자 기뻐하지 않고 사람들을 부른다. 되찾은 일이 개인의 사정이 아니라 동네 전체의 사건이 되는 구조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아이들이 아니었다. 예수가 어울리는 상대를 못마땅해하던 어른들이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위로이기 전에 반론이다. 누가 잃어버린 쪽이고 누가 찾는 쪽인지를 다시 배치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남는 질문은 두 방향이다. 하나는 이것이다. 나를 셈에서 빼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다른 하나는 조금 불편하다. 내가 이미 무리 안에 있다면, 밖에서 한 사람이 돌아왔을 때 나는 잔치에 들어갈까 아니면 문 앞에 서 있을까. 누가복음 15장은 마지막 이야기에서 문 앞에 선 사람을 그대로 세워 둔 채 끝난다. 그가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적혀 있지 않다. 답을 비워 둔 것이다.

해석사에서 이 비유예수가 자주 쓴 짧은 이야기 형식. 교훈을 예쁘게 포장한 예화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 속 한 자리에 서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비유를 들은 사람은 정보를 얻는 대신 입장을 정하게 된다.는 성격이 두 번 크게 바뀐다. 처음의 자리는 논쟁이었다. 누가의 배치에서 이 이야기는 밥상 앞의 비난에 대한 반론이고, 그 반론의 칼끝은 배제하는 쪽을 향한다. 그런데 후대로 오면서 이 비유는 점점 위로의 그림이 된다. 지하 묘지 벽에 그려진 어깨에 양을 멘 남자, 찬송가와 어린이용 그림책, 병상과 장례식에서 읽히는 본문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이동 자체를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위로만 남고 논쟁이 지워지면, 이 이야기가 원래 불편하게 만들려 했던 청중이 사라진다. 두 번째 변화는 개인화다. 근대 이후의 독법에서 잃은 양은 대체로 '나'다. 하나님이 나 하나를 위해 찾아 나선다는 읽기다. 이 독법은 개인의 존엄이라는 강력한 언어를 만들어 냈지만, 배경이 되는 에스겔 34장구약의 한 예언서. 자기 배만 채우고 흩어진 양을 찾지 않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고발한 뒤, 하나님이 직접 양을 찾아 나서겠다고 선언하는 대목이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이미지의 뿌리로 자주 지목된다.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무리를 잘못 관리한 지도자들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 층을 함께 읽으면 질문이 달라진다. 나는 잃어버린 양인가, 아니면 양을 잃고도 세지 않는 목자고대 근동에서 '목자'는 목축업자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왕과 신을 부르던 칭호이기도 했다. 백성을 먹이고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쁜 목자'라는 말은 곧 나쁜 통치자라는 뜻이 된다. 쪽인가. 두 복음서의 배치가 실제 교회 현장에서 갈라져 쓰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누가판은 아직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한 언어로, 마태판은 안에 있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목회 절차의 언어로 쓰였다. 후자는 곧바로 어려운 문제와 만난다. 떠난 사람을 찾아가는 일과 그를 내버려 두는 일 사이의 경계, 돌봄과 간섭의 경계가 그것이다. 마태복음 18장마태복음이 예수의 가르침을 다섯 덩어리로 묶어 배열했다고 볼 때, 공동체 안의 관계와 용서를 다루는 묶음이다. 잃은 양 비유가 여기 놓이면 '밖의 사람을 데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의 사람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로 읽힌다.비유 바로 뒤에 절차와 용서를 나란히 붙여 놓은 것은, 그 어려움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가 답하지 않는 것을 적어 두는 편이 정직하다. 양이 왜 무리를 벗어났는지, 아흔아홉은 그동안 어떻게 되었는지, 끝내 찾지 못하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마태의 조건절이 그 빈칸을 유일하게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이 이야기의 힘은 모든 경우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한 마리를 숫자에서 빼는 순간 목자가 아니게 된다는 한 가지를 못 박는 데 있다.

잃은 양은 누구인가 — 아직 들어오지 않은 사람인가, 이미 안에 있다가 벗어난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밖에 있는 사람으로 보는 입장 (누가복음의 배치)

잃은 양은 공동체가 이미 명단에서 지워 놓은 사람, 아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읽는다. 이야기의 초점은 그런 사람을 찾아 나서는 쪽에 있다.

  • 누가복음 15장 첫머리가 이 비유의 청중을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그것을 비난하던 사람들로 명시한다는 점
  • 누가의 마무리 문장이 '돌아온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점
  • 같은 장의 나머지 두 이야기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구도를 반복한다는 점
  • 누가복음 전체가 배제된 사람들이 앞자리로 불려 나오는 장면을 반복해서 그린다는 점

누가복음 본문 배치를 중시하는 주석 전통. 전도와 선교를 다루는 설교에서 널리 쓰인다

안에 있다가 벗어난 사람으로 보는 입장 (마태복음의 배치)

잃은 양은 이미 무리에 속해 있었으나 밀려나거나 떨어져 나간 구성원을 가리킨다고 읽는다. 초점은 공동체가 그를 어떻게 다시 데려올 것인가에 있다.

  • 마태복음 18장이 공동체 내부의 관계와 용서를 다루는 묶음이라는 점
  • 이 비유가 '작은 자 가운데 한 사람도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 안에 놓여 있다는 점
  • 비유 바로 뒤에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는 절차와 용서에 대한 문답이 이어진다는 점
  • 마태가 쓴 동사가 '없어지다'가 아니라 '길을 잃고 떠돌다'에 가깝다는 점
  • 배경인 에스겔 34장도 이미 하나님의 백성인 무리를 두고 한 말이라는 점

공동체 돌봄과 권징(교회가 잘못한 구성원을 다루는 절차)의 맥락에서 이 본문을 읽어 온 전통

공통점 두 입장 모두 한 마리를 셈에서 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움직이는 쪽이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찾는 쪽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어느 배치에서도 양이 스스로 돌아오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두 복음서의 관계 자체가 확정되지 않았다. 공통 자료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설명, 한쪽이 다른 쪽을 참고했다는 설명, 같은 이야기를 여러 자리에서 다르게 썼다는 설명이 모두 살아 있다. 또 이 비유를 '한번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떨어져 나갈 수 있는가'라는 후대의 신학 논쟁에 대한 답으로 읽으려는 시도가 있으나, 비유 자체가 그 물음에 답하려고 만들어진 형태는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그 논쟁에 대해서는 교단마다 견해가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