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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

며칠 전까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 다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눈앞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누가복음 · 누가복음 24장, 사도행전 1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5

jesuspeterjohnjames-son-of-zebedee

이야기

  1. 상황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어요. 그리고 여러 날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었어요.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눴어요. 제자들은 정말 기뻤어요.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근처 산으로 갔어요. 감람산이라는 곳이었어요. 제자들이 물었어요.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워 주시나요?" 그 나라는 오래전부터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어 나라를 되찾아 줄 거라고 기대했어요.

    부활한 예수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도행전은 이후 여러 날에 걸쳐 그가 제자들 앞에 거듭 나타나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적는다.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쳤다는 설명이 붙는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됐는지도 밝힌다. 사도행전 1장은 40일성경에서 40은 실제 날짜 수만큼이나 '충분히 채워진 기간'을 나타내는 관용적 숫자로도 쓰인다. 노아 때의 40일, 모세가 시내산에 머문 40일, 예수가 광야에서 지낸 40일도 같은 계열이다. 사도행전이 적은 40일이 정확한 날수인지 관용적 표현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이라는 숫자를 명시한다. 반면 같은 저자가 쓴 누가복음 24장은 부활한 날 저녁 장면에 이어 시간 표시 없이 곧바로 이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간다. 두 책을 나란히 놓으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가 다르게 읽히는데, 이 문제는 아래 '더 알아보기'에서 따로 다룬다. 마지막 만남의 장소는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자락의 베다니 근처였다. 예수는 제자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갔다. 그 자리에서 제자들이 물었다.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되찾아 주시는 것이냐고. 그 시절 유대인 다수는 메시아가 로마의 지배를 끝내고 다윗 왕조 같은 독립 국가를 다시 세워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부활까지 목격한 지금이야말로 그 일이 일어날 때라고 여겼을 법하다.

    이 이야기의 자료는 누가복음 24장 50~53절과 사도행전 1장 1~11절, 두 본문이다. 교회 전통은 이 두 책을 모두 누가가 썼다고 본다. 각 책 자체는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2세기 후반 이레나이우스 등의 증언 이후 '누가'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사도행전 안에 1인칭 복수 '우리'로 서술되는 대목들이 있어(16장 이후) 저자가 바울의 여정 일부에 실제로 동행한 인물이라는 추정의 근거가 되지만, 이 '우리 본문'의 성격을 두고도 목격 기록으로 보는 견해와 자료 인용의 문학적 관습으로 보는 견해가 갈린다. 저술 연대는 대략 AD 80~90년대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2세기 초로 늦춰 보는 소수 견해도 있다. 사도행전의 첫머리는 '먼저 쓴 글'을 언급하며 누가복음을 이어받는 형식을 취한다. 이런 두 권짜리 구성과, 둘째 책의 서두에서 첫째 책을 요약하며 시작하는 방식은 그리스·로마 역사 서술의 관행과 닮아 있다는 지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 저술가 요세푸스도 저서 '아피온 반박'을 두 권으로 나누며 둘째 권 서두에서 첫째 권을 요약한다. 누가가 이런 헬레니즘 역사 서술의 관습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보는 연구가 많다. 이 이야기의 핵심 문제는 시간이다. 누가복음 24장은 부활 당일 저녁, 엠마오로 갔던 두 사람이 돌아와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장면에 곧바로 이어 예수가 나타나고, 그다음 별다른 시간 표시 없이 이 승천 장면으로 넘어간다. 문장만 따라가면 하루 안에 다 벌어진 일처럼 읽힌다. 그런데 같은 저자가 쓴 사도행전 1장 3절은 예수가 고난 이후 '많은 확실한 증거로' 자신을 살아 있는 자로 나타냈으며, 40일성경에서 40은 실제 날짜 수만큼이나 '충분히 채워진 기간'을 나타내는 관용적 숫자로도 쓰인다. 노아 때의 40일, 모세가 시내산에 머문 40일, 예수가 광야에서 지낸 40일도 같은 계열이다. 사도행전이 적은 40일이 정확한 날수인지 관용적 표현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동안 그들에게 보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했다고 분명히 적는다. 같은 사람이 쓴 두 책이 왜 이렇게 다르게 읽히는가. 이에 대한 설명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누가복음이 여러 날에 걸친 사건들을 문학적으로 압축해 하나의 흐름으로 요약해 서술했다고 보는 것이다. 복음서를 마무리 짓는 자리에서 굳이 정확한 날짜 경과를 밝힐 필요가 없었고, 이야기의 결말로서 자연스럽게 이어 붙였다는 설명이다. 누가복음의 이런 '요약적 결말' 기법을 다른 대목에서도 지적하는 연구가 여럿 있다. 다른 하나는 두 책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독립된 문학 작품이므로 각각의 서술을 그대로 존중해서 읽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설명에서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이 반드시 '하루 만에'라고 못박는 문장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점, 즉 침묵을 압축의 증거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점이 강조된다. 어느 쪽이든 두 책의 사실 관계 자체가 어긋난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누가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술했는지, 즉 편집 의도의 문제로 다뤄진다. 40이라는 숫자 자체도 따로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40은 실제 날수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충분히 채워진 한 시기'를 나타내는 관용적 숫자로도 자주 쓰인다. 홍수 때의 40일, 모세가 시내산에 머문 40일,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 예수 자신이 광야에서 시험받은 40일이 같은 계열이다. 사도행전의 40일이 정확한 날짜 계산인지, '충분한 확증의 기간'이라는 뜻으로 쓰인 상징적 표현인지는 학계에서도 결론이 나 있지 않다. 장면의 무대는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이다. 누가복음은 '베다니 앞까지' 데리고 나갔다고 하고, 사도행전은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돌아왔다고 한다. 베다니는 감람산 동쪽 비탈에 있던 마을이므로 두 표현은 서로 다른 지명이 아니라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사도행전 1장 4절의 그리스어 표현(직역하면 '함께 소금을 먹으며' 또는 '함께 머물며')은 사전과 사본에 따라 번역이 갈리는 어려운 단어로, 마지막 만남이 식사 자리였을 가능성과 단순히 함께 지내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모두 논의된다. 제자들의 질문, 곧 이스라엘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냐는 물음은 허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유대는 정치적 독립을 잃은 상태였고, 다윗 계열의 왕이 다시 세워지리라는 기대는 여러 문헌에 흔적을 남긴 대중적 소망이었다. 실제로 AD 6년, 로마가 인구 조사를 시행하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이에 반발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런 흐름은 이 사건 이후로도 오래 이어져, AD 132~135년의 바르 코크바 봉기까지 비슷한 기대가 반복해서 정치적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런 시대적 공기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읽힌다.

  2. 사건

    예수님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어요. "그때가 언제인지는 너희가 알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어요. 대신 다른 약속을 했어요. 곧 특별한 힘을 받게 될 거라고요. 그 힘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온 세상에 전하게 될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했어요. 그런데 축복하는 동안 예수님의 몸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어요. 구름이 예수님을 가렸어요. 제자들 눈에 더는 보이지 않았어요.

    예수는 그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았다. 때와 시기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정하시는 일이지 자신들이 알 몫이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 다른 것을 약속했다. 성령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 안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 예수는 자신이 떠난 뒤 제자들에게 이 성령이 임해 '힘'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다음 이야기(오순절)에서 다뤄진다.이 임하면 힘을 받게 될 것이고, 그 힘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라를 되찾아 주는 대신,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사명을 준 셈이다. 말을 마친 뒤 예수는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했다. 누가복음은 그 축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고 적는다. 사도행전은 여기에 구름이라는 요소를 더한다. 그가 올라가는 도중 구름이 그를 가려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름은 성경에서 흔한 소품이 아니다. 시내산에서, 그리고 예수가 산 위에서 빛나던 순간에도 구름이 등장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오래 쓰여 온 이미지다.

    예수의 답은 질문을 그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라 자신들이 알 것이 아니라고 말한 뒤, 화제를 성령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 안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 예수는 자신이 떠난 뒤 제자들에게 이 성령이 임해 '힘'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다음 이야기(오순절)에서 다뤄진다.과 증인이라는 다른 축으로 옮긴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이 되리라는 이 문장은 사도행전 전체의 지리적 진행을 미리 요약해 보여 준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이후 예루살렘 교회(1~7장), 유대와 사마리아로의 확산(8~12장), 이방 세계로의 선교(13장 이후)라는 순서로 전개되어, 이 구절이 책 전체의 '목차' 구실을 한다고 보는 분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이 구절이 나라의 회복이라는 질문 자체를 부정하는지도 논쟁거리다. 예수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때를 아는 일과 지금 해야 할 일을 구분해 놓을 뿐이다. 이를 두고 정치적 회복에 대한 기대를 아예 다른 차원(영적 통치)으로 대체한 것으로 읽는 해석과, 미래의 회복 자체는 열어 둔 채 지금 당장의 임무에만 집중시킨 것으로 읽는 해석이 나뉜다. 본문 전승 자체에도 흔들리는 지점이 있다. 누가복음 24장 51절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시니'라는 구절과 52절의 '그에게 경배하고'라는 구절은 몇몇 초기 사본, 이를테면 시내산 사본의 원래 필사본이나 베자 사본, 옛 라틴어역 일부에는 빠져 있다. 19세기 학자 웨스트콧과 호르트는 이런 짧은 누락들을 '서방 비삽입(Western non-interpolation)'이라 부르며, 오히려 이 짧은 본문이 원문에 가깝다고 보기도 했다. 오늘날 대다수 비평본은 두 구절을 원문으로 채택하지만, 이 구절이 후대에 승천 신학을 명시적으로 강조하려고 덧붙었을 가능성 자체는 여전히 논의된다. 마가복음의 사정은 더 뚜렷하다. 지금 성경에 실린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16장 9~20절)에는 예수가 하늘로 올려져 하나님 오른편에 앉았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러나 이 대목은 가장 오래된 사본들(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에는 아예 없다. 오늘날 학계는 이를 원래의 마가복음이 아니라 후대에 덧붙은 '긴 결말'로 보는 데 대체로 일치한다. 즉 마가복음은 원래 형태로는 승천을 서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태복음은 아예 다르게 끝난다.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의 한 산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준 뒤, 그 자리에서 헤어지는 장면 자체가 없다. 네 복음서가 예수의 지상 사역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셈이다. 요한복음은 가장 독특한 경우다. 이 책에는 승천을 별도의 사건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없다. 대신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하면서,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다(요 20:17). 요한복음은 십자가에서 '들리는 것',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을 '높이 들림(휩소오)'이라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 계열로 묶어 쓰는 경향이 있다(요 3:14, 12:32 참고). 이 때문에 요한복음의 신학에서는 십자가·부활·승천이 시간상 뚜렷이 구분되는 별개의 사건이라기보다, 하나로 이어진 '높여짐'의 여러 국면으로 다뤄진다고 보는 연구가 많다. 누가가 이 사건을 시간표가 뚜렷한 하나의 장면으로 그려낸 것과는 대조적인 신학적 선택이다. 승천 장면에 등장하는 구름도 홀로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재했을 때도 구름이 산을 덮었고, 예수가 산 위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였을 때도 구름이 그들을 감쌌다. 다니엘 7장에는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 권세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행전의 구름을 이 계열의 이미지로 읽으면, 이 장면은 예수가 단순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 7장이 그린 것과 같은 방식으로 권위를 받아들이는 자리로 그려진 것이 된다.

  3. 결과

    제자들은 그 자리에 서서 하늘만 쳐다봤어요. 그런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두 사람이 물었어요. "왜 하늘만 보고 서 있나요? 예수님은 나중에 다시 오실 거예요."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어요. 슬프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뻐했다고 해요. 제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며 기다렸어요. 예수님이 약속한 그 힘을 말이에요. 다음 이야기에서 그 힘이 무엇인지 나와요.

    제자들은 하늘만 올려다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물었다. 왜 하늘만 쳐다보고 서 있느냐고.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 하늘로 올려진 이 사람이, 올라간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올 것이라고. 이 장면은 누가복음의 빈 무덤 장면과 겹쳐 읽힌다. 그때도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여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산 자를 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찾느냐는 물음이었다. 두 장면 모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누가복음은 그들이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큰 기쁨에 차 있었다고 적는다. 스승을 눈으로 볼 수 없게 됐는데도 그랬다. 사도행전은 이어서 그들이 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썼다고 전한다. 이 무렵 모인 사람은 열둘이 아니라 열하나였다. 유다는 이미 없었고, 그 빈자리를 채울 맛디아는 아직 뽑히지 않은 상태였다. 예수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함께 있던 시간은 여기서 끝난다. 다음 이야기는 제자들이 약속받은 그 힘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제자들 곁에 나타난 '흰옷 입은 두 사람본문은 이들을 천사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두 사람'이라 적는다. 흰옷과 갑작스러운 등장이라는 표현 방식은 누가복음이 빈 무덤 장면에서 쓴 것과 같아서, 전통적으로 천사로 이해되어 왔다. 빈 무덤에 있던 두 사람과 이 장면의 두 사람이 누가복음 전체 구성에서 서로 짝을 이룬다는 지적도 있다.'을 본문은 천사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흰옷과 갑작스러운 등장이라는 서술 방식은 누가복음 24장 4절, 빈 무덤에서 여자들 앞에 나타난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과 정확히 같은 틀을 쓴다. 두 장면 모두 사람들이 한 방향(빈 무덤 안, 또는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나타나 질문을 던지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다. 누가복음 전체의 구성에서 이 두 장면이 처음과 끝을 이루는 짝으로 설계되었다고 보는 문헌학적 지적이 있다. 두 사람의 물음,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는 말은 오랫동안 설교에서 '멍하니 있지 말고 일하라'는 훈계로 다뤄져 왔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는 질책의 어조를 확정할 표지가 없다. 물음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책망이 아니라 약속, 곧 같은 방식으로 다시 오리라는 말이다. 이 장면을 재림 교리의 가장 이른 형태의 진술로 보는 데는 대체로 이견이 없지만, 그 정확한 시점이나 방식은 신약 전체에서도 더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이 함께 지적된다. 돌아온 거리를 두고 사도행전은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길'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랍비 전통이 안식일 규정(출 16:29, 민 35:5의 후대 해석)에 따라 정한 이동 제한 거리, 대략 2천 규빗(약 890미터에서 1킬로미터 사이로 추정)을 가리키는 관용구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실제 거리와도 대략 들어맞는다는 점이 지적된다. 저자의 유대적 배경을 보여 주는 사례로 흔히 인용된다. 이 시점에 모인 이들은 사도행전 1장 13절이 이름을 나열하는 대로 열한 명이다. 유다 이스가리옷은 이미 없었다. 이어지는 본문(1:15~26)은 이들이 시편의 두 구절을 근거로 빈자리를 채울 사람을 뽑기로 하고,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세웠다고 전한다. 열둘이라는 숫자를 다시 채우는 이 절차를 두고, 열두 지파에 대응하는 열두 사도라는 상징적 완결성을 회복하려는 행동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다만 이 선택 방식(제비뽑기)이 이후 사도행전에서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바울이 스스로를 사도로 규정하면서도 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은 이 장면의 성격을 계속 논의하게 만든다. '하나님 오른편에 앉다고대 왕실에서 왕의 오른쪽 자리는 가장 신뢰받는 신하나 공동 통치자가 앉는 자리였다. '하나님 오른편에 앉다'는 표현은 물리적 좌석이 아니라 최고의 권위를 함께 나눈다는 뜻의 관용구로, 신약이 자주 인용하는 시편 110편의 표현에서 왔다.'라는 표현은 이후 신약 서신들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승천 신학의 핵심 어구가 된다(예를 들어 에베소서 1장, 골로새서 3장, 히브리서 1장). 이 표현의 뿌리는 시편 110편 1절, 원수를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오른쪽에 앉으라는 대관식 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편 110편은 신약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약 본문으로 꼽힌다. 고대 왕실에서 왕의 오른쪽 자리는 실권을 나눠 받은 공동 통치자나 최측근이 앉는 자리였다. 따라서 이 표현은 해부학적 위치가 아니라 권위의 공유를 나타내는 정치적 관용구로 이해하는 데 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이 사건이 이후 교회의 신앙고백에 자리 잡는 과정도 짚어 둘 만하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로 요약되는 고백은 신약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승천 장면, 그리고 시편 110편과 신약 서신들의 표현을 후대 교회가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압축한 결과물이다. 2세기 무렵 세례 때 쓰이던 '옛 로마 신조'에 이미 비슷한 형태의 고백이 있었고, 지금 널리 쓰이는 형태로 정착된 것은 훨씬 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예수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제자들과 함께 있던 시간을 완전히 닫는다. 사도행전은 곧바로 이들이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썼다고 전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는 사람 없이, 약속만 붙들고 기다리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이야기(오순절)는 그 기다림이 무엇으로 채워지는지를 다룬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감람산과 베다니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산으로, 겟세마네가 있던 낮은 비탈과 이어지는 같은 산줄기다. 누가복음은 이 마지막 장면의 무대를 베다니 부근이라 하고, 사도행전은 '감람원이라 하는 산'이라 부른다. 두 지명은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40일
성경에서 40은 실제 날짜 수만큼이나 '충분히 채워진 기간'을 나타내는 관용적 숫자로도 쓰인다. 노아 때의 40일, 모세가 시내산에 머문 40일, 예수가 광야에서 지낸 40일도 같은 계열이다. 사도행전이 적은 40일이 정확한 날수인지 관용적 표현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인 다수는 메시아가 다윗 왕조를 다시 세워 정치적 독립을 되찾아 줄 것이라 기대했다. 실제로 AD 6년에는 갈릴리 사람 유다가 로마의 인구 조사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켰고, 이후로도 비슷한 움직임이 여러 차례 있었다. 제자들의 질문은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읽힌다.
성령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 안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 예수는 자신이 떠난 뒤 제자들에게 이 성령이 임해 '힘'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다음 이야기(오순절)에서 다뤄진다.
흰옷 입은 두 사람
본문은 이들을 천사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두 사람'이라 적는다. 흰옷과 갑작스러운 등장이라는 표현 방식은 누가복음이 빈 무덤 장면에서 쓴 것과 같아서, 전통적으로 천사로 이해되어 왔다. 빈 무덤에 있던 두 사람과 이 장면의 두 사람이 누가복음 전체 구성에서 서로 짝을 이룬다는 지적도 있다.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돌아온 거리를 '안식일에 갈 수 있는 만큼'이라고 적는다. 유대 랍비 전통은 안식일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약 1킬로미터(2천 규빗) 정도로 제한했다. 성경의 규정을 후대에 구체적으로 풀어낸 관행이다.
오른편에 앉다
고대 왕실에서 왕의 오른쪽 자리는 가장 신뢰받는 신하나 공동 통치자가 앉는 자리였다. '하나님 오른편에 앉다'는 표현은 물리적 좌석이 아니라 최고의 권위를 함께 나눈다는 뜻의 관용구로, 신약이 자주 인용하는 시편 110편의 표현에서 왔다.
사도신경
'하늘에 오르사…우편에 앉으시다가'라는 고백은 신약성경 한 구절을 그대로 옮긴 문장이 아니다. 2세기 무렵부터 세례 때 쓰이던 짧은 신앙 고백문이 여러 세기에 걸쳐 다듬어져 지금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누가복음·사도행전·시편·서신서 등 여러 본문의 내용을 하나로 압축한 결과물이다.

흔한 오해

승천은 예수가 로켓처럼 우주 공간 저 너머로 날아간 사건이다.

본문은 '위로 들려 올려졌다'와 '구름이 가렸다'고만 적을 뿐, 어디를 지나 어디에 도착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 표현을 고대의 우주관 언어로 신적 임재에 들어감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해석과, 실제 공간 이동으로 보는 해석이 함께 있다.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서 두 입장을 정리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승천이 일어난 때를 서로 다르게 적어 모순된다.

누가복음 24장은 부활 당일 저녁 장면에 뒤이어 별다른 시간 표시 없이 승천까지 이어 적어 마치 하루 만에 일어난 일처럼 읽힌다. 반면 사도행전 1장은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 있었다고 분명히 밝힌다. 같은 저자가 쓴 두 책이 왜 다르게 읽히는지를 두고, 누가복음이 여러 사건을 압축해 요약했다고 보는 견해와 두 책의 서술 목적이 달라 나란히 읽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다락방에 모인 사람은 예수를 따르던 열두 제자 전원이었다.

이 시점에는 유다가 이미 없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이 이름을 나열하는 사람은 열한 명뿐이다. 빈자리를 채울 맛디아는 이 장면 뒤에 가서야 제비뽑기로 정해진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때를 물은 것은 크게 혼날 만큼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본문에는 꾸짖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예수는 질문이 잘못됐다고 하기보다, 때를 아는 것은 자기 몫이 아니라고 답하며 화제를 성령과 증인이라는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질문을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것은 본문이 하지 않은 평가를 얹는 것일 수 있다.

사도신경의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다'라는 문장은 성경 어딘가에 그대로 적혀 있다.

신약성경 어느 구절에도 이 문장 그대로는 없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승천 장면과 시편 110편의 '오른편에 앉으라'는 표현 등 여러 본문을 후대 교회가 하나의 고백문으로 압축해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겠다고 답하지 않았어요. 대신 다른 약속을 했어요. 성령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 안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 예수는 자신이 떠난 뒤 제자들에게 이 성령이 임해 '힘'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다음 이야기(오순절)에서 다뤄진다.이라는 힘을 보내 주겠다고요. 제자들은 그 약속만 믿고 기다려야 했어요. 언제인지도 몰랐어요. 여러분도 기다려 본 적이 있나요? 답을 모른 채로 기다리는 건 쉽지 않아요. 그럴 때 무엇을 붙잡고 기다리면 좋을까요?

이 장면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듣고 싶어 했던 답을 주지 않는다. 나라를 되찾아 주겠다는 말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도 없다. 대신 남긴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힘을 주겠다는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확실한 답 대신 임무가 주어진 셈이다. 그리고 예수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제자들은 더 이상 그를 만지거나 볼 수 없다. 그런데도 본문은 그들이 슬픔이 아니라 기쁨에 차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적는다. 왜 그랬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이 사라지고 약속만 남았을 때, 그 약속을 어떻게 붙들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진다.

이 장면을 읽는 방식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이 사건을 신학적 전환점으로 읽는 방식이다. 예수의 지상 사역, 곧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방식의 현존이 여기서 끝나고, 성령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 안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 예수는 자신이 떠난 뒤 제자들에게 이 성령이 임해 '힘'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다음 이야기(오순절)에서 다뤄진다.을 통한 현존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 많은 신학 전통이 이 지점을 기독교 역사의 경첩으로 다룬다. 복음서의 이야기가 교회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이 무엇을 유보하는지를 묻는 방식이다. 제자들의 질문(나라의 회복)은 부정되지 않는다. 다만 그 답이 미뤄질 뿐이다. 신약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이미와 아직' 구조, 즉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지만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긴장이 신약 전체의 종말론을 이해하는 핵심 틀로 자주 거론된다. 승천 장면은 이 긴장이 처음으로 뚜렷하게 형태를 갖추는 자리로 읽힌다. 세 번째는 이 장면을 '증인'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읽는 방식이다. 예수가 없이도 그를 증언해야 하는 사람들이 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이야기의 무게중심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보았는지 확인해 주던 대상이 사라지고, 그 확인의 책임이 남은 사람들에게 넘어간다. 세 독법 모두 공통으로 짚는 지점이 있다. 이 사건 이후 아무것도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이 장면 자체가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답은 다락방에서, 그리고 다음 이야기에서 온다.

'하늘로 오르다'라는 말을 어떤 언어로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공간적 사건으로 읽는 입장

예수의 부활한 몸이 실제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하늘이라는 공간을 향해 옮겨졌다고 본다. 이 사건이 있었기에 그가 이제 곁에 없다는 사실이 문자 그대로 참이 된다.

  • 누가복음 24장이 만지고 먹는 등 부활한 몸의 물리성을 강조한 직후에 이 장면이 곧바로 이어진다는 점
  • 구름이 옛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던 방식(시내산, 산 위의 변화 사건)과 같은 이미지로 등장한다는 점
  • 두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다시 올 것'이라고 못박아, 떠남과 다시 옴을 대칭적인 사건으로 규정한다는 점

전통적 교의학, 사도신경을 문자적으로 고백하는 다수 교단의 주류 해석

고대 우주관의 언어를 빌린 신학적 서술로 읽는 입장

'위로 올라갔다'는 표현은 하늘을 땅 위의 물리적 층으로 여기던 고대인의 우주 그림을 빌려, 예수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시공간에 매이지 않는 존재 방식으로 들어갔다는 신학적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본다. 방향(위)이 핵심이 아니라 전환(다른 존재 방식으로 들어감) 자체가 핵심이라고 본다.

  • 고대 근동과 지중해 세계가 하늘·땅·지하의 3층 구조로 우주를 그렸다는 점이 폭넓게 확인된다는 점
  • 20세기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신약의 신화적 우주 언어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비신화화' 논의
  • 에녹이나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구약의 표현도 같은 시대의 우주관 언어를 공유한다는 점

불트만 이후 현대 신학의 일부 흐름, 그리고 전통 신앙을 지키면서도 '방향'보다 '차원의 전환'을 강조하는 C.S. 루이스 같은 저술가들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이 장면에서 예수가 제자들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함께 있던 시기가 여기서 끝난다는 점, 그가 이제 하나님과 함께하는 특별한 권위의 자리에 있다고 이해된다는 점,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성령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고 보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N.T. 라이트 같은 현대 신학자는 두 입장을 딱 갈라 서지 않는다. 부활한 몸이 실제로 자리를 옮겼다는 사건성은 지키면서도, '하늘'을 땅 위 어딘가의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으로 설명해 두 입장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선다. 이 사건을 '실제로 일어난 일'과 '신화적 언어'로 깔끔하게 나눌 수 있는지 자체가 계속 논쟁 중이다. 이 앱은 두 입장 가운데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