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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

결혼식만 기다리고 있던 시골 마을의 젊은 여자에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소식이 먼저 도착했다.

누가복음 · 누가복음 1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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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 상황

    나사렛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어요. 마리아는 거기 사는 젊은 여자였어요. 곧 요셉과 결혼할 예정이었어요. 마리아의 하루는 조용했어요. 물을 긷고 빵을 구웠어요. 앞으로의 일도 거의 정해져 있었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었어요. 그때 이 땅은 로마가 다스리고 있었어요. 사람들에게는 오래 기다리는 게 있었어요. 하나님이 보내실 왕이었어요. 그런데 아주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어요. 사람들은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어요. 그 무렵 예루살렘에도 한 부부가 있었어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에요. 둘은 나이가 아주 많았어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어요. 오래 바랐지만 생기지 않았어요. 이제는 포기한 나이였어요. 이야기는 이 두 집에서 시작돼요.

    누가복음은 예수 이야기를 성전 안의 한 노인에게서 시작한다. 사가랴라는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와 예식을 맡아 보던 직업 종교인이다. 그와 아내 엘리사벳은 오래 아이를 기다렸지만 얻지 못했고,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자식이 없다는 사실은 그 사회에서 개인의 아픔을 넘어 부끄러움으로 취급됐다. 어느 날 제비뽑기로 성소에 들어가 향을 피우는 순서가 그에게 돌아왔다. 제사장이 많았기 때문에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차례였다. 거기서 그는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사가랴는 그게 사실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고, 그 뒤로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여섯 달 뒤 무대가 완전히 바뀐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북쪽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늙은 제사장에게서 아무도 모르는 젊은 여자에게로 옮겨 간다. 나사렛은 구약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마을이다. 인구는 수백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는 그곳에 살았고, 요셉이라는 남자와 정혼오늘날의 약혼과 다르다. 아직 함께 살지 않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묶인 관계였고, 관계를 깨려면 이혼에 준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요셉이 왜 '조용히 헤어지려' 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한 상태였다. 정혼은 오늘의 약혼과 다르다. 아직 함께 살지는 않지만 법적으로 묶인 관계였고, 깨려면 이혼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가 어떤 인생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대 시골 여자의 앞날은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태어난 마을에서 늙는 것이다. 한편 유대 땅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지만 로마가 세우고 승인한 왕이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이 보낸 왕이 와서 이 상황을 뒤집을 거라는 기대가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기대가 수백 년째 응답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직전 스토리인 예루살렘 함락에서 이 장면까지는 약 580년의 공백(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이후로 따지면 흔히 말하는 400년 안팎)이 있다. 그 사이 이 지역의 지배자는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알렉산드로스 이후의 그리스계 왕조들로, 마카베오 항쟁을 거친 하스몬 왕가의 짧은 독립기로, 다시 BC 63년경 로마로 바뀌었다. 개신교 구약 39권은 이 시기를 서술하는 문헌을 포함하지 않는다. 천주교와 정교회 성경은 마카베오서 등 이 시기의 일부 문헌을 정경 또는 제2정경으로 수록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를 이 글이 판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개신교 성경만 읽는 독자에게는 말라기와 누가복음 사이가 페이지 한 장으로 붙어 있어, 실제로는 수백 년의 사회 변화가 그 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400년 사이에 유대교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성전은 재건되었고 헤롯 대왕(재위 BC 37~4년경)이 대규모로 증축하는 중이었으며, 각 마을에는 회당이 자리 잡았고, 바리새파·사두개파·에세네파 같은 분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스어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가 되어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70인역)이 널리 읽혔다. 이 번역본은 뒤에 다룰 이사야 7:14 해석 문제의 핵심 자료가 된다. 누가복음 1장의 문체는 이 지점에서 의도적으로 낯설다. 저자는 1~4절에서 세련된 그리스 고전 문체로 조사와 편집의 원칙을 밝힌 뒤, 5절부터 갑자기 70인역을 연상시키는 히브리적 문체로 전환한다. 다수 학자는 이를 '이 이야기가 구약의 연장선에서 다시 시작된다'는 신호로 읽는다. 사가랴 부부의 설정 자체가 아브라함과 사라, 엘가나와 한나 같은 구약의 불임 서사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연대에 관해서는 확정된 값이 없다. 헤롯 대왕의 사망 시점을 BC 4년경으로 보는 견해가 오래 우세했고, 이에 따라 예수의 출생을 BC 6~4년경으로 잡는 재구성이 많다. 6세기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계산한 기년법에 오차가 있어, '기원전에 태어난 예수'라는 어색한 결과가 생겼다는 설명이 통용된다. 다만 헤롯 사망 연대 자체에 이견을 제기하는 소수 견해도 있어, 이 값들은 확정이 아니라 추정으로 다루는 편이 정확하다.

  2. 사건

    어느 날 마리아에게 손님이 왔어요. 천사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모두 '보내진 자, 전령'을 뜻하는 단어다.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가엘 정도로 매우 적다. 날개와 후광은 성경 본문의 묘사가 아니라 후대 미술이 굳힌 이미지다. 가브리엘이었어요. 천사는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는 존재예요. 천사가 소식을 전했어요. 마리아가 아기를 낳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아주 특별한 아이라고 했어요. 마리아는 깜짝 놀랐어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되물었어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요?" 천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답했어요.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알려 줬어요. 나이 많은 엘리사벳도 아기를 가졌다는 거예요. 마리아는 잠깐 생각했을 거예요. 이건 기쁜 일만은 아니었어요. 그 시절엔 결혼 전에 아기를 가지면 큰일이 났어요.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수도 있었어요. 요셉이 파혼할 수도 있었고요. 그래도 마리아는 하겠다고 답했어요. 아주 짧은 대답이었어요.

    가브리엘이라는 천사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모두 '보내진 자, 전령'을 뜻하는 단어다.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가엘 정도로 매우 적다. 날개와 후광은 성경 본문의 묘사가 아니라 후대 미술이 굳힌 이미지다.가 마리아를 찾아온다. 천사는 그를 하나님이 특별히 눈여겨본 사람이라고 불렀다. 흥미로운 건 마리아의 첫 반응이다. 본문은 그가 소식이 아니라 인사말 자체에 당황했다고 적는다. 자기 같은 사람이 그런 호칭으로 불릴 이유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전달된 내용은 이랬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되고, 그 아이는 옛 왕 다윗의 자리를 잇게 되며, 그 나라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름까지 지정됐다. 예수는 히브리어 예슈아를 그리스어식으로 옮긴 것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은 당시의 흔한 이름이었다. 마리아의 반응은 즉각적인 수용이 아니었다. 그는 되물었다. 자신은 아직 남자와 함께 살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는 질문이었다. 앞서 사가랴도 물었다가 말을 잃었다. 그래서 두 질문이 무엇이 달랐는지는 오래 논의돼 온 대목이다.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했고 마리아는 방법을 물었다고 나누는 해석이 있지만, 본문이 그 차이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는다. 천사의 대답은 성령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 안에서 직접 일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 이후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정리된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성령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 안에서 직접 일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확인할 만한 표시로 엘리사벳의 임신을 알려 준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이미 한 집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가로막고 있던 것은 생물학만이 아니다. 정혼오늘날의 약혼과 다르다. 아직 함께 살지 않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묶인 관계였고, 관계를 깨려면 이혼에 준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요셉이 왜 '조용히 헤어지려' 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한 여자의 임신은 그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파혼당할 수 있었고, 마을에서 평생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었다. 율법(유대 사회의 종교이자 법이었던 규정 모음) 조항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마태복음은 요셉이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려 했다고 전한다. 마리아가 이 위험을 얼마나 계산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두려웠을 것이라는 짐작은 독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그의 대답은 짧았다. 거절도 아니고 흥정도 아니었다. 자신을 그 일에 쓰이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다. 천사는 그 말을 듣고 떠난다. 이 장면에서 마리아를 설득한 사람도, 대신 결정해 준 사람도 없었다.

    가브리엘은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천사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모두 '보내진 자, 전령'을 뜻하는 단어다.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가엘 정도로 매우 적다. 날개와 후광은 성경 본문의 묘사가 아니라 후대 미술이 굳힌 이미지다.다. 다니엘 8~9장에서 환상을 해석해 주는 인물로 먼저 등장하며, 누가복음이 그를 다시 불러오는 것은 이 사건을 다니엘서가 말한 기다림의 완성 지점에 놓으려는 배치로 읽힌다. 천사의 인사말에 쓰인 그리스어 분사 케카리토메네(kecharitōmenē)는 완료 수동형이다. '이미 호의를 입어 그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를 갖는다. 라틴어 불가타가 이를 'gratia plena(은혜가 가득한)'로 옮겼다. 여기서 '은혜'는 받을 자격과 상관없이 거저 주어진 호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번역은 이후 서방 교회의 마리아 이해와 기도문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이 어형이 마리아 개인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그가 받은 하나님의 선택을 가리킨다고 보아 다르게 번역했다. 같은 단어를 두고 갈라진 이 번역사는 교파 간 마리아 이해 차이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다. 천사가 사용하는 표현들은 구약 인용의 그물망 위에 놓여 있다.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 '다윗의 왕좌', '끝나지 않는 나라'는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 언어와 겹친다. 쿰란에서 발견된 아람어 문서 4Q246에도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는 유사한 칭호가 나오는데, 그 문서가 가리키는 대상이 긍정적 인물인지 참칭자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이 칭호들이 누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당대 유대 문헌에 이미 유통되던 언어라는 점이다. 임신을 설명하는 두 동사도 주목받는다. '임하다'와 '덮다(에피스키아조)'인데, 뒤엣것은 70인역에서 구름이 성막을 덮는 장면(출 40:35)에 쓰인 단어다. 이 어휘 선택을 근거로, 누가가 마리아의 몸을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장소, 곧 새로운 성막의 이미지로 그린다고 보는 독법이 있다. 반대로 이는 신적 임재를 서술하는 관용 표현일 뿐 그 이상을 읽어 낼 근거는 약하다는 견해도 있다. 사가랴와 마리아의 질문 차이는 고대 주석가들부터 다뤄 온 문제다. 요구의 성격이 달랐다는 설명, 두 인물의 사회적 위치가 달랐다는 설명, 애초에 서사적 대비를 위한 문학적 장치라는 설명이 병존한다. 본문이 판정을 내려 주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도 결정적이지는 않다.

  3. 결과

    마리아는 곧 길을 떠났어요. 엘리사벳의 집으로 갔어요. 산길을 며칠 걸어야 하는 먼 곳이었어요.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반갑게 맞았어요. 그 순간 배 속의 아기가 움직였어요. 엘리사벳은 그것을 좋은 신호로 여겼어요. 그리고 마리아를 축복해 줬어요. 마리아는 거기서 노래를 불렀어요. 슬픈 노래가 아니었어요. 세상이 뒤집힌다는 노래였어요. 높은 사람은 내려온다고 했어요. 힘없는 사람은 올라간다고 했어요. 마리아는 석 달쯤 머물다 돌아왔어요. 얼마 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이 이름은 요한이에요. 요한은 자라서 길을 여는 사람이 돼요. 그리고 마리아의 아기도 곧 태어나요. 그 아기가 예수예요. 이야기는 베들레헴으로 이어져요.

    천사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모두 '보내진 자, 전령'을 뜻하는 단어다.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가엘 정도로 매우 적다. 날개와 후광은 성경 본문의 묘사가 아니라 후대 미술이 굳힌 이미지다.가 떠난 뒤 마리아는 서둘러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유대 산지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이었다. 나사렛에서 며칠을 걸어야 하는 거리다. 왜 갔는지 본문은 이유를 적지 않는다. 다만 자기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알아보고 축복한다. 이 만남 장면에는 남자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가랴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누가복음이 예수 이야기를 여성들의 대화로 시작한다는 점은 이 책의 성격을 미리 보여 준다. 여기서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가 나온다. 라틴어 첫 단어를 따 '마니피캇'이라 불리며, 지금도 여러 교회의 예배에서 낭송되거나 불린다. 내용은 개인적인 감사에 머물지 않는다. 세상의 위아래가 뒤집힌다는 선언에 가깝다. 힘을 가진 쪽은 서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고, 굶주리던 쪽은 손이 채워진다는 내용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이 노래의 공개 낭송이 정치적으로 위험하게 여겨진 시기도 있었다. 마리아는 석 달쯤 머물다 돌아간다. 곧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아이 이름을 요한으로 정하는 순간 사가랴의 입이 열린다. 그 아이는 자라서 예수보다 먼저 등장해 사람들에게 준비를 촉구하는 인물이 된다. 그리고 마리아의 이야기는 로마 황제의 인구조사 명령과 함께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만삭의 여자가 남쪽 베들레헴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마리아의 노래는 사무엘상 2장에서 한나가 부른 노래와 구조·어휘가 여러 곳에서 겹친다. 낮은 자가 높아지고 배부른 자가 굶주리게 된다는 역전의 언어, 하나님을 '나의 구원'으로 부르는 호칭이 대표적이다. 누가가 이 병행을 의도했다고 보는 것이 다수 견해다. 두 노래 모두 아들을 얻은 여자의 입에서 나오고, 두 아들 모두 왕정의 판도를 바꾸는 인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배치의 유사성이 높다. 본문비평상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다. 소수의 고대 라틴어 사본은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을 마리아가 아니라 엘리사벳으로 적는다. 사본 증거의 무게는 압도적으로 마리아 쪽이고, 오늘날 어떤 주요 번역본도 엘리사벳을 택하지 않는다. 다만 이 소수 독법의 존재 자체는, 초기 필사 전통이 두 여성 중 누구를 화자로 놓느냐를 두고 흔들린 흔적으로 논의된다. 노래의 시제도 논점이다. 그리스어 본문은 역전의 사건들을 대체로 과거 시제(아오리스트)로 서술한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점에 왜 완료된 일처럼 말하는가. 예언자적 확신을 표현하는 히브리 시가의 관습을 그리스어로 옮긴 결과라는 설명, 하나님의 과거 구원 행위 전체를 요약한 것이라는 설명, 종말론적 미래를 이미 이루어진 일로 선포하는 형식이라는 설명이 함께 제시된다. 서사 구조로 보면 누가복음 1장은 요한과 예수의 탄생 예고를 나란히 배치해 둘을 계속 비교하게 만든다. 예고 장소는 성전과 시골집, 대상은 남성 제사장과 무명의 여성, 반응은 침묵과 노래로 대비된다. 이 대칭은 우연으로 보기 어려우며, 누가가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려 했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읽힌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신구약 중간기
앞 스토리(예루살렘 함락)와 이 장면 사이에는 약 580년의 공백(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이후로 따지면 흔히 말하는 400년 안팎)이 있다. 그 사이 지배자는 바벨론에서 페르시아, 그리스계 왕조, 짧은 유대 독립기(하스몬 왕가), 그리고 BC 63년경부터 로마로 바뀌었다. 개신교 구약 39권에는 이 시기를 다루는 책이 없어서, 말라기와 누가복음이 페이지 한 장 차이로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주교와 정교회 성경은 이 시기의 문헌 일부(마카베오서 등)를 포함한다.
수태고지
'아이를 갖게 될 것을 미리 알린다'는 뜻의 한자어. 라틴어 안눈티아티오(Annuntiatio)를 옮긴 말이다. 서양 미술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장면 중 하나여서, 미술관에서 천사와 여자가 마주 선 그림을 보면 대개 이 장면이다.
정혼
오늘날의 약혼과 다르다. 아직 함께 살지 않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묶인 관계였고, 관계를 깨려면 이혼에 준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요셉이 왜 '조용히 헤어지려' 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천사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모두 '보내진 자, 전령'을 뜻하는 단어다.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가엘 정도로 매우 적다. 날개와 후광은 성경 본문의 묘사가 아니라 후대 미술이 굳힌 이미지다.
성령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세상 안에서 직접 일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 이후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정리된다.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붓던 관습에서 온 말이다. 로마 지배 아래 있던 1세기 유대인 다수는 이 인물을 나라를 되찾아 줄 정치적 해방자로 기대하고 있었다.

흔한 오해

마리아는 아무 위험 없이 축복만 받았다.

정혼 상태에서의 임신은 그 사회에서 파혼과 공개적 망신, 경우에 따라 신변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마태복음은 요셉이 실제로 관계를 정리하려 했다고 전한다. 이 장면은 좋은 소식인 동시에 위험한 소식이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순종했다.

본문의 순서는 질문이 먼저다. 그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되물었고, 답을 들은 뒤에 받아들였다. 다만 같은 장에서 사가랴는 질문 후 말을 잃는다. 두 질문의 차이를 무엇으로 볼지는 해석이 갈린다.

성경이 마리아를 열대여섯 살 소녀로 명시한다.

본문은 나이를 적지 않는다. 10대 중반이라는 통념은 당시 유대 사회의 혼인 관습을 근거로 한 추정이며, 학자에 따라 범위를 다르게 잡는다. 널리 퍼진 이미지지만 성경 본문의 진술은 아니다.

이 일은 크리스마스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서방 교회 전통은 이 사건을 3월 25일에 기념한다. 12월 25일에서 아홉 달을 거꾸로 센 날짜다. 두 날짜 모두 성경이 명시한 것이 아니라 후대 교회가 정한 절기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신처럼 믿고, 개신교는 마리아를 무시한다.

천주교와 정교회는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하지만, 공식 교리에서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구별한다. 개신교는 공경의 대상으로 삼지 않되 본문 속 인물로서의 결단은 높이 평가한다. 강조점의 차이지 한쪽이 마리아를 지워 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마리아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큰 힘도 없고 높은 자리도 없었어요. 그런데 아주 큰 일을 부탁받았어요. 무섭기도 했을 거예요. 마리아는 먼저 물어봤어요. 그러고 나서 하겠다고 했어요.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물어봤을까요?

이 장면은 흔히 순종의 모범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본문을 순서대로 읽으면 순종보다 먼저 오는 것이 질문이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그대로 물었고, 답을 들은 다음에 움직였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믿어 줄 리 없었고, 요셉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었다. 누가복음이 이 이야기를 황제나 왕의 이름이 아니라 시골 여자의 대답에서 시작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저자는 이 사건이 검증 가능한 역사라고 말하려 하면서도, 그 역사의 출발점을 권력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놓는다. 큰 변화가 어디서 시작된다고 보는지에 대한 선택이다. 당신이 아는 변화들은 대개 어디서 시작됐는가.

누가복음 1장은 단순한 도입부가 아니라 이 책 전체의 해석 열쇠에 가깝다. 성전의 남성 제사장은 침묵하고, 이름 없는 시골 여성은 노래한다. 이 대비는 이후 목자, 세리, 사마리아인, 과부가 반복해서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는 구조를 미리 예고한다. 동시에 이 장은 신학적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지점을 한꺼번에 안고 있다. 하나님의 개입과 인간의 동의가 어떤 관계인지, 마리아의 응답을 자유로운 선택으로 읽을지 이미 정해진 계획의 수용으로 읽을지에 따라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한 오래된 논쟁으로 곧장 연결된다. 여기에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겹친다. 이 물음들에 대해 기독교 전통 안에서도 답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스토리는 결론 대신 두 갈래를 아래에 나란히 적어 둔다. 확실한 것은 본문이 이 사건을 조용한 방 안의 짧은 대화로 그린다는 사실이다. 군대도 성전도 없이, 한 사람의 대답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는 입장

마리아가 남성과의 관계 없이 임신했다는 서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를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설명하는 근거로 본다.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서로 다른 자료와 시점으로 같은 내용을 전한다는 점
  • 사도신경 등 초기 신조가 이 항목을 명시적으로 포함한다는 점
  • 본문 자체가 이를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진술과 묶어 제시한다는 점

천주교, 정교회, 대다수 개신교 교단

신앙 고백을 담은 신학적 진술로 읽는 입장

이 서술의 요점은 생물학적 과정이 아니라 '이 아이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며, 고대의 위인 탄생 서사 형식을 빌려 그 고백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 가장 이른 문헌인 바울 서신과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이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
  • 고대 지중해 세계에 비범한 인물의 특별한 출생을 서술하는 문학 관습이 널리 있었다는 점
  • 신약의 다른 곳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이 사건을 근거로 들지 않는다는 점

일부 자유주의 신학 계열 학자와 신학교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이 본문이 예수의 기원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리아의 동의가 서사의 핵심 축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이사야 7:14의 번역 문제가 오래 논쟁된다. 그 구절의 히브리어 '알마'는 결혼 전의 젊은 여자를 뜻하는 말로, 처녀성 자체를 지시하는 단어 '베툴라'와 구별된다. 그런데 그리스어 번역본(70인역)이 이를 '파르테노스'로 옮겼고, 마태복음이 그 그리스어 번역을 인용한다. 이를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좁혀진 사례로 보는 견해와, '알마'의 의미 범위 안에 이미 미혼 여성이 포함되므로 무리한 번역이 아니라는 견해가 맞선다. 유대교는 이 구절을 예수와 연결하지 않고 이사야 당대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