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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왜 그리스·로마 세계로 그렇게 빨리 퍼졌나? 왜 다른 문명권이 아니었나?

1세기 기독교가 시작된 유대 지방은 정치적으로 이미 로마 제국의 영토였고, 문화적으로는 코이네 그리스어가 널리 쓰이는 헬레니즘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믿음은 국경을 넘지 않고도 로마 제국 안의 도시망을 타고 퍼질 수 있었던 반면, 동쪽의 페르시아·인도·중국 방향은 적대적인 국경과 거리 때문에 전파 속도와 규모가 크게 달랐다.

로마 제국이라는 하나의 정치권코이네 그리스어와 70인역지중해 도시 네트워크파르티아 국경이라는 장벽동방 교회(경교)의 별도 전파서방이 다수파가 된 역사적 이유

예수님은 유대 지방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그리스와 로마 쪽으로 퍼졌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때 유대 지방은 로마라는 큰 나라의 땅이었어요. 로마는 지중해 주변 여러 나라를 하나로 묶어 놓았어요. 길도 잘 닦여 있었고, 그리스 말이 여러 나라에서 두루 통했어요. 그래서 서쪽(그리스·로마 방향)으로는 소식이 쉽게 퍼졌어요.

반대로 동쪽에는 로마와 사이가 안 좋은 다른 큰 나라(페르시아)가 있었어요. 국경을 넘기가 훨씬 어려웠어요. 그래서 기독교가 완전히 동쪽으로 못 간 건 아니지만, 서쪽만큼 빠르고 크게 퍼지지는 못했어요.

기독교가 태동한 곳은 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 유대 지방이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자리 잡은 뒤 가장 빠르게, 가장 크게 퍼져 나간 방향은 그리스어권과 로마 제국 전역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역사적인 조건이 있다.

첫째, 정치적 조건이다. 예수와 초기 제자들이 살던 유대 지방 자체가 이미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새로운 믿음이 국경을 넘어야 다른 나라로 퍼질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제국 안에서 도시에서 도시로 옮겨 가기만 하면 됐다는 뜻이다. 둘째, 언어 조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지중해 동부에는 코이네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자리 잡아 있었고, 바울바울 초대교회한때 신자들을 잡아 가두고 스데반의 처형에 동의했던 사람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방향을 잃고 다시 얻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남은 삶을 썼다을 비롯한 초기 전도자들이 쓴 문서(신약성경 27권)도 이 언어로 기록됐다. 이미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둔 문헌(70인역)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그리스어권 청중에게 성경 이야기를 설명할 다리 역할을 했다. 셋째, 도시 네트워크다. 로마 제국은 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로마 같은 큰 도시들을 도로와 뱃길로 연결해 놓았고, 초기 기독교는 이 도시들을 거점 삼아 퍼졌다.

반면 동쪽 방향은 사정이 달랐다. 유대 지방 너머 동쪽에는 로마와 오랫동안 대립하던 또 다른 강대국 파르티아 제국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국경을 넘어야 했고, 언어와 문화도 로마 제국 안과는 크게 달랐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동쪽으로 전혀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 나중에는 중국까지 전해진 갈래도 있었다. 다만 이 동방 갈래는 서방(그리스·로마권)만큼 큰 정치적 후원을 얻지 못했고, 훗날 이슬람 제국의 확장과 몽골 제국의 혼란 속에서 크게 위축됐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독교 역사는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쪽 이야기가 주로 남아 있다.

"왜 그리스·로마권이었나"라는 질문에는 "다른 방향으로도 퍼지긴 했다"는 사실을 먼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초기 확산은 단일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동시에 일어났고, 그중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갈래가 역사적으로 가장 크게 성장하고 가장 잘 기록되어 남았을 뿐이다.

로마 제국 방향이 유리했던 조건은 앞서 말한 정치·언어·도시망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역에 걸쳐 상대적으로 낮은 이동 장벽(관세·통행세는 있었지만 국경 통과 자체가 어렵지 않았음)을 유지했고, 이 지역 전체에 이미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회당이 초기 전도자들에게 자연스러운 거점을 제공했다. 사도행전이 그리는 바울의 전도 여행 경로(안디옥 → 소아시아 → 마케도니아·그리스 → 로마)는 이런 조건을 그대로 따라간다.

반면 동쪽 방향의 조건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파르티아 제국(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은 로마와 수백 년간 군사적으로 대치한 경쟁 강대국이었다. 이 국경을 넘어 전파된 기독교는 이른바 '동방 교회'(시리아어를 쓰던 그리스도교 전통, 5세기 이후에는 흔히 '네스토리우스파'로도 불린다) 계열로,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소수 종교로 존속하다가 이후 중앙아시아 교역로(비단길)를 따라 더 동쪽으로 퍼져 나갔다. 이 갈래는 인도 남부(케랄라 지역 — 전승에 따르면 사도 도마의 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지지만, 이 전승의 역사적 사실 여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까지, 그리고 마침내 당나라 때인 서기 635년에는 중국 장안(오늘날 시안)까지 도달했다. 이 사실은 781년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즉 기독교의 동방 전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고 상당히 먼 곳까지 도달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 기독교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서방(그리스·로마 전통에서 갈라져 나온 천주교·정교회·개신교) 계열인 이유는, 확산의 '시작' 조건보다 이후의 정치적 운명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설명이다. 서방 갈래는 4세기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채택되며(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먼저 허용되었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국교로 지정됐다) 제국의 자원과 제도를 등에 업을 수 있었다. 반면 동방 갈래는 그런 국가적 후원을 받지 못한 채 페르시아·중앙아시아의 소수 종교로 남아 있다가, 7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의 확장과 13세기 몽골 제국 내부의 정치적 변화, 이후 티무르 제국의 박해 등을 거치며 크게 축소됐다. 중국의 경우도 845년 당 무종이 불교·조로아스터교와 함께 경교를 탄압하는 칙령을 내리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정리하면,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로 퍼진 것은 그 방향이 유일한 전파로였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국경이 낮고 언어·문화가 통합되어 있던 조건이 확산에 유리했고, 이후 로마 제국의 국교화라는 결정적 계기를 통해 이 갈래가 역사적으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방으로의 전파는 별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 확산이 단일하고 필연적인 경로를 밟은 것이 아니라 여러 정치적·역사적 우연이 겹쳐 지금의 지형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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