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을 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성경에도 간절히 기도했지만 원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한 인물들이 나온다. 기독교 신학은 이런 경우를 '거절'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응답, 다른 시점의 응답, 또는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으로 다양하게 설명해 왔다. 어느 설명도 기다림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 주지는 않는다는 점은 신학자들도 인정한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대로 안 될 때가 있어요. 아픈 사람이 낫기를 기도했는데 안 낫기도 하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도 해요. 그럴 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셨나?" 하는 마음이 들 수 있어요.
성경에도 그런 사람이 나와요.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그 기도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바울이라는 사람도 몸의 아픈 것을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낫지 않았어요.
기독교인들은 이럴 때 여러 가지로 생각해요. "지금은 아니어도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응답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하고, "침묵도 응답의 한 방법"이라고 보기도 해요. 정답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질문이에요.
간절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는 경험은 신앙을 가진 사람 대부분이 한 번쯤 겪는다. 이 경험은 종종 "내 믿음이 부족했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나"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는데, 기독교 신학은 이 질문에 한 가지 답만 내놓지 않는다.
성경 자체가 이 문제를 다루는 사례를 보여준다. 신약성경은 예수예수 예수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란 유대인 랍비로, 짧은 공생애 동안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다가 로마 총독 아래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 제자들이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전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의 출발점이 되었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앞으로 겪을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바울바울 초대교회한때 신자들을 잡아 가두고 스데반의 처형에 동의했던 사람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방향을 잃고 다시 얻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남은 삶을 썼다도 자신을 평생 괴롭힌 몸의 가시라고 부르는 고통을 없애 달라고 세 번 기도했지만, 그 응답은 고통의 제거가 아니라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다른 형태의 응답으로 왔다고 자신의 편지(고린도후서 12장)에서 전한다.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신학에서 자주 제시되는 설명은 몇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침묵도 응답의 한 형태'라는 관점으로,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는 것 역시 '아니다' 또는 '아직은 아니다'라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때가 다르다'는 관점으로, 인간이 원하는 시점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시점이 다를 뿐이라고 보는 설명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통이나 기다림의 과정 자체가 성품을 형성하거나 더 깊은 관계로 이끄는 과정이라고 보는 설명이다.
다만 이런 설명들이 실제로 응답받지 못한 고통을 완전히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는 점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폭넓게 인정된다. 기도의 결과를 인간의 논리로 온전히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신뢰를 설명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 질문은 '왜 세상에 고통이 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과도 이어진다.
신학사에서 이 질문에 대한 고전적 정리로 자주 인용되는 것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예', '아니오', '기다려라'라는 세 가지로 나누는 방식이다. 이는 특정 신학자의 정교한 이론이라기보다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중적 정리에 가깝지만, 응답이 '없음'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있음'일 수 있다는 관점을 잘 보여준다. 20세기 작가이자 신학자인 C. S. 루이스는 기도에 관한 글에서, 기도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데 두기보다 기도하는 사람 자신과 세상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함께 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려 시도했다.
'인간의 자유와 인과관계의 복잡성'이라는 설명도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과 자연 법칙이 서로 얽혀 있어서, 한 사람의 기도가 다른 모든 조건과 무관하게 즉각적으로 결과를 바꾸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 논의의 자유의지 변호론과 비슷한 논리를 공유한다.
한 가지 짚어 둘 부분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4장은 잘못된 동기로 구하는 기도를 지적하는 구절을 담고 있어 이런 해석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다수의 목회신학자는 이 논리를 아프거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해 믿음이 부족해서 응답이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단정은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고, 성경에 등장하는 신실한 인물들도 간절한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는 사실과도 어긋난다.
결국 이 질문은 신학적 설명으로 완전히 해소되기보다, 응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무엇을 신뢰할 것인가라는, 설명보다 태도에 가까운 질문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다수 신학자·목회자의 공통된 관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