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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둘째 아들이 아버지 앞에 서서, 나중에 자기 몫이 될 재산을 지금 달라고 말했다. 그 시대에 그 말은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거의 같게 들렸다.

누가복음 · 누가복음 15장 · 예수 · 읽는 시간 약 4

jesus

이야기

  1. 상황

    옛날에 아버지와 두 아들이 살았어요. 어느 날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갔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제 몫의 재산을 지금 주세요." 그때는 재산을 그렇게 나누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나누는 것이었어요. 그러니 이 말은 아주 나쁜 말이었어요. 아버지가 빨리 죽으면 좋겠다는 뜻이니까요. 동네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거예요.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낼 줄 알았겠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그냥 재산을 나누어 주었어요. 왜 그랬는지 성경은 알려 주지 않아요. 작은아들은 짐을 챙겨 떠났어요. 아주 먼 나라로 갔어요. 거기서는 아무도 자기를 몰랐어요. 처음에는 마음이 아주 편했을 거예요.

    이 이야기는 혼자 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복음 15장은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금을 걷던 사람들과 '죄인'으로 분류되던 이들이 예수 주위로 몰려들었고,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던 사람들이 그것을 못마땅해했다. 저 사람은 저런 자들과 한 상에 앉는다는 불평이었다. 예수는 반박하는 대신 이야기 세 개를 잇달아 꺼낸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어버린 동전 한 닢, 그리고 집을 나간 아들. 앞의 둘은 짧고, 마지막 하나는 유난히 길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에만 잃어버린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어느 날 둘째가 아버지 앞에 서서, 자기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지금 달라고 말한다. 오늘의 감각으로는 무례한 요구 정도로 들린다. 그러나 당시 농촌 사회에서 재산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누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상속분을 미리 청구한다는 것은, 당신이 없는 셈 치고 살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게다가 땅은 한 가문이 대를 이어 붙어살던 기반이었다. 몫을 떼어 현금으로 바꾼다는 것은 가문의 토대를 잘라 낸다는 뜻이기도 했다. 본문은 아버지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적지 않는다. 화를 냈는지, 말렸는지, 밤새 고민했는지도 없다. 그저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고만 적는다. 이 침묵은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이상한 대목 가운데 하나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때려서라도 말릴 것이라고 기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며칠 뒤 둘째는 받은 것을 모두 정리해 먼 지방으로 떠난다.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곳이었다. 아버지의 이름도, 집안의 평판도 따라오지 않는 곳이었다.

    누가복음 15장은 세 개의 비유가 하나의 대답으로 묶인 단락이다. 서두(15:1-2)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에게 가까이 오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린다. 여기 쓰인 동사 디아공귀조(diagongyzō)는 신약에서 이곳과 삭개오 장면(19:7)에만 나오며, 70인역(구약의 그리스어 번역)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이 불평하는 장면에 쓰이던 계열의 말이다. 세 비유는 그 수군거림에 대한 응답으로 배치되어 있다. 구조를 보면 앞의 두 비유는 대칭을 이룬다. 남자가 양을 찾고, 여자가 동전을 찾는다. 둘 다 찾은 뒤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하고, 둘 다 '하늘의 기쁨'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된다. 세 번째 비유는 그 형식을 깨뜨린다. 찾으러 나가는 장면이 없고, 마무리 해설도 없으며, 대신 기뻐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파격이 세 번째 이야기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준다는 독법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둘째의 요구에서 눈여겨볼 단어가 둘이다. 아들이 달라고 한 것은 '우시아(ousia, 재산·자산)'인데, 아버지가 나누어 준 것을 본문은 '비오스(bios)'라고 적는다. 비오스는 생계이자 삶 자체를 뜻하는 말이다. 아버지가 내준 것이 재산 목록이 아니라 자기 생활 기반이었다는 뉘앙스로 읽는 주석가들이 많다. 분배 비율은 신명기 21:17의 장자 두 몫 규정에서 추론된다. 아들이 둘이면 몫은 셋으로 나뉘고 둘째는 3분의 1을 받는다. 흔히 '재산의 절반'으로 이야기되지만 본문에는 비율이 없고, 이 규정을 배경으로 3분의 1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생전 증여에 대한 당대의 감각은 지혜문학에 남아 있다. 집회서(시라크) 33장은 살아 있는 동안 재산을 자식에게 넘기지 말라고 거듭 경고한다. 넘긴 뒤에 후회하게 된다는 취지다. 집회서는 유대교와 개신교가 정경(각 종교가 공식 성경 목록으로 인정한 책들)에 넣지 않지만 천주교와 정교회는 포함하며, 어느 쪽이든 예수 시대 유대 사회의 통념을 보여 주는 자료로는 널리 인용된다. 미쉬나의 재산법 논의도 생전 증여 시 증여자의 사용권을 어떻게 지킬지에 관심을 둔다. 다만 미쉬나는 AD 200년경에 편집된 문헌이므로, 1세기 갈릴리 농촌의 관행에 그대로 대입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아버지의 반응에 대한 본문의 침묵도 자주 지적된다. 서술자는 아버지의 감정을 한 줄도 적지 않고 곧바로 분배로 넘어간다. 이 공백을 두고, 요구를 들어준 행위 자체가 이미 이 비유의 첫 번째 충격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처음 듣던 청중이 기대했을 반응 - 거절, 질책, 심하면 의절 - 이 하나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2. 사건

    먼 나라에서 작은아들은 돈을 마음껏 썼어요. 친구도 금방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돈이 다 떨어졌어요. 마침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어요. 먹을 것을 구하기가 아주 힘들어졌어요. 친구들도 하나둘 사라졌어요. 아들은 일자리를 찾아다녔어요. 겨우 얻은 일은 돼지를 돌보는 일이었어요. 유대 사람들은 돼지를 만지지 않았어요. 가장 더러운 짐승이라고 여겼거든요. 그러니 이 일은 바닥까지 내려간 거예요. 아들은 배가 너무 고팠어요. 돼지 먹이라도 먹고 싶을 만큼요. 그런데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 문득 생각이 났어요. 아버지 집에서는 일꾼도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었어요. 아들은 집으로 걸어가기로 했어요. 아들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할 참이었어요. 일꾼으로만 써 달라고 빌 생각이었어요. 아직 집에서 한참 먼 길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달려왔어요. 매일 길을 보고 있었나 봐요. 아버지는 아들을 꼭 껴안았어요. 아들이 준비한 말은 끝까지 하지도 못했어요. 아버지가 먼저 잔치를 열라고 했거든요.

    먼 지방에서 둘째는 가진 것을 다 흩어 버린다. 본문은 그가 어떻게 썼는지 자세히 적지 않는다. 뒤에 형이 몸 파는 여자들에게 썼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형의 주장이지 이야기 자체의 서술이 아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독자가 아는 것은 돈이 사라졌다는 사실뿐이다. 돈이 바닥날 무렵 그 지역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 여유가 있을 때는 견딜 수 있는 일이 겹치면 무너진다. 그는 그 지방 사람에게 매달려 일자리를 얻는다. 맡겨진 일은 돼지 치는 일이었다. 이 대목에서 처음 듣던 유대인 청중은 숨을 들이켰을 것이다. 돼지는 율법이 먹지 못하게 정한 짐승이었다. 돼지를 친다는 것은 단순히 험한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공동체가 지키던 선 바깥으로 완전히 넘어갔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는 임금을 받는 일꾼이라기보다 얹혀사는 처지에 가까웠다. 굶주림은 더 심해졌다. 돼지에게 주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그를 챙기지 않았다는 문장은 그가 어떤 관계도 남기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다 그는 정신이 든다. 본문의 표현을 직역하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에 가깝다. 그때 떠오른 것은 감정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삯을 받는 일꾼도 먹을 것이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할 말을 미리 정한다. 아버지에게 잘못했고 그것이 하늘 앞에서도 잘못이라는 것, 그러니 아들 대접을 바랄 처지가 아니며 품삯 받는 일꾼으로라도 써 달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대사를 진심 어린 뉘우침으로 볼 것인지, 살아남기 위한 대본으로 볼 것인지는 오래된 논쟁이다.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 두 입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는 걷기 시작한다. 집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먼저 그를 알아본다. 알아봤다는 것은 계속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달려 나간다. 그 시대에 나이 든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뛰는 일은 흔치 않았다. 긴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달려야 했고, 그것은 어른의 체면을 내려놓는 모습으로 여겨졌다는 지적이 많다. 재산을 들고 나가 다 날린 아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먼저 그를 마주쳤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아버지는 그보다 먼저 도착한다. 아들은 준비한 말을 시작하지만 끝내지 못한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가장 좋은 옷, 손가락에 낄 반지, 발에 신길 신발, 그리고 살진 송아지. 하나하나가 신분을 되돌려 놓는 물건들이었다.

    둘째가 맡은 일은 그리스어로 '코이로이(choiroi, 돼지)'를 치는 일이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이 먹지 못하게 규정한 짐승이라, 이 설정은 단순한 빈곤이 아니라 공동체의 경계 바깥으로 나갔다는 표지로 읽힌다. 그가 먹고 싶어 한 '케라티아(keratia)'는 쥐엄나무(캐롭) 열매의 꼬투리로, 당시 가축 사료이자 최빈층의 비상식량이었다. 랍비 문헌에는 이스라엘이 쥐엄나무 열매를 먹을 지경이 되어야 회개한다는 격언이 전해지는데, 다만 이 자료들은 훨씬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배경 참고 이상으로 쓰기는 어렵다. 전환점의 표현이 특히 자주 논의된다. 그리스어를 직역하면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왔다'에 가깝고, 히브리어 '슈브(돌아서다)' 계열의 회개 개념과 겹치는지가 쟁점이다. 뒤이어 그가 준비하는 말이 아버지 앞에서 쓸 대사 형태로 미리 다듬어진다는 점, 그 동기가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남는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는 점 때문에 해석이 갈린다. 진심의 방향 전환으로 보는 독법과 생존을 위한 협상안으로 보는 독법이 맞서 있으며, 본문이 그의 속마음을 판정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는 양쪽이 동의한다.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 두 입장을 정리했다. 아버지가 달려 나가는 장면에는 케네스 베일리의 재구성이 널리 인용된다. 이방인에게 재산을 날린 유대인이 마을로 돌아오면 주민들이 항아리를 깨뜨려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케차자(kezazah)' 의식을 치렀고, 아버지의 달음질은 그 의식이 벌어지기 전에 아들을 먼저 품어 마을의 처벌을 차단하는 행동이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케차자를 전하는 문헌이 후대의 것이고 지역 관행의 범위도 불분명해, 이 재구성을 본문 이해의 전제로 삼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비판이 있다. 에이미 질 러바인은 이런 재구성이 유대 사회를 냉혹한 배경으로 그려 놓고 그 대비로 아버지의 관대함을 돋보이게 하는 구도가 되기 쉽다고 지적한다. 돌아온 아들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 가장 좋은 겉옷, 반지, 신발 - 는 모두 지위를 되돌려 놓는 물건으로 읽힌다. 반지는 인장 반지로 보아 집안의 권한 위임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고, 신발은 종과 자유인을 가르는 표지였다는 관찰이 붙는다. 다만 본문 자체는 그 상징을 설명하지 않고 나열만 한다.

  3. 결과

    그때 큰아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집으로 오는 길에 노랫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어요. 동생이 돌아와서 잔치를 한다고 했어요. 큰아들은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또 밖으로 나왔어요. 이번에는 큰아들을 달래러 나온 거예요. 큰아들이 말했어요. "저는 한 번도 말을 어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한테는 잔치를 열어 준 적이 없잖아요." 아버지가 대답했어요. "너는 나랑 늘 같이 살았잖니. 우리 집 것은 네 것이기도 해. 그런데 오늘은 네 동생이 살아 돌아왔어. 기뻐해야 하는 날이야." 이야기는 여기서 그냥 끝나요. 큰아들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안 나와요. 예수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듣고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 정하라는 뜻이었어요.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여기까지로 기억한다. 그러나 비유는 끝나지 않았다. 남은 절반의 주인공은 한 번도 집을 떠난 적 없는 큰아들이다. 그는 밭에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음악과 춤 소리를 듣고 일꾼에게 무슨 일인지 묻는다. 동생이 무사히 돌아와 아버지가 잔치를 열었다는 대답을 듣는다. 그는 화를 내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잔치가 벌어지는 집 앞에 맏아들이 서 있지 않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손님 모두가 알아챌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이날 아버지의 체면을 깎은 아들은 둘이다. 아버지는 또 밖으로 나온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집을 나서는 장면은 두 번인데, 방향만 다를 뿐 하는 일은 같다.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데리러 가는 것이다. 큰아들의 항변은 구체적이다. 자기는 여러 해 동안 명령을 어긴 적이 없는데 친구들과 즐길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생을 가리켜 '당신의 저 아들'이라고 부른다. 내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없는 자리에서 동생이 돈을 어디에 썼는지 단정하는 말도 여기서 나온다. 주목할 만한 점이 하나 더 있다. 그리스어 본문에서 둘째는 아버지를 부르며 말을 시작하는데, 큰아들의 말에는 그 호칭이 없다. 여러 해를 함께 산 아들 쪽이 오히려 거리를 두고 말한다. 아버지의 대답은 두 갈래다. 네가 줄곧 곁에 있었고 이 집 살림은 이미 네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죽은 줄로 여겼던 아이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오늘 하루는 기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큰아들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른 사람을 '네 동생'이라고 고쳐 부른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춘다. 큰아들이 들어갔는지 끝내 서 있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이 결말은 미완성이 아니라 설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불평하던 이들이었다. 즉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자리는 큰아들이었다. 결말을 비워 둠으로써 마지막 선택은 듣는 사람에게 넘어간다.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는 모두 잔치로 끝난다. 다만 마지막 잔치에는 아직 자리에 앉지 않은 사람이 하나 남아 있다.

    큰아들 단락(15:25-32)은 앞의 두 비유에 없는 부분이라, 이 대목이 원래 비유에 속했는지를 두고 논의가 있어 왔다. 두 이야기가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된 적이 있으나, 어휘와 구성이 앞부분과 촘촘히 맞물린다는 점을 들어 처음부터 한 편이었다고 보는 쪽이 현재 다수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있는 자료(흔히 L 자료라 불린다)에 속하며, 마태·마가에는 평행 본문이 없다. 그리스어 본문의 세부가 두 아들을 갈라놓는다. 둘째는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으로 말을 시작하지만 큰아들의 항변에는 그 호칭이 없다. 큰아들은 동생을 '당신의 저 아들'이라고 지칭하고, 아버지는 대답에서 그를 '네 동생'으로 고쳐 부른다. 또 큰아들이 자기 세월을 묘사할 때 쓰는 동사는 종이 주인을 섬기는 일에 쓰이는 계열의 말이라, 집 안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여겨 왔다는 독법이 자주 제시된다. 이 비유는 오랫동안 알레고리로 읽혀 왔다. 아버지를 신으로, 둘째를 이방인이나 죄인으로, 큰아들을 바리새인으로 대응시키는 방식이다. 서두(15:1-2)가 수군거리는 이들을 명시하므로 이 독법에는 본문 안의 근거가 있다. 다만 큰아들을 유대교 전체나 율법 준수 자체와 동일시하면 '유대교=옹졸함, 예수=관대함'이라는 대비로 미끄러지기 쉽다는 비판이 20세기 후반 이후 꾸준히 제기됐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이 집 살림이 이미 네 것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대목은, 그 아들을 배제하지 않고 잔치 안으로 부르는 방향이라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 결말의 공백은 이 비유의 설계로 널리 인정된다. 큰아들이 들어갔는지 본문은 끝내 말하지 않으며, 마지막 선택은 듣는 사람 몫으로 남는다. 한국어에서 굳어진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도 후대의 명명이다. 본문은 어느 인물도 제목으로 내세우지 않으며, 최근에는 '잃은 아들들의 비유'나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처럼 초점을 달리 잡은 이름이 함께 쓰인다.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가 이미 하나의 해석이라는 점이 이 비유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상속분을 요구한다는 것
그 시대 농촌 가정에서 재산 분배는 가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 이루어졌다.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당신이 없는 셈 치겠다'는 말로 들릴 수 있는 요구였다. 게다가 재산의 핵심은 대대로 붙어살던 땅이었다. 몫을 떼어 현금으로 바꾼다는 것은 가문의 기반을 잘라 판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대 지혜문학인 집회서(시라크) 33장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식에게 재산을 넘기지 말라고 거듭 경고한다. 그만큼 흔치 않고 위험한 일로 여겨졌다는 뜻이다.
둘째의 몫은 얼마였나
본문은 비율을 적지 않는다. 다만 구약의 규정(신 21:17)이 맏아들에게 두 몫을 주도록 정하고 있어서, 아들이 둘일 경우 재산은 세 몫으로 나뉘고 둘째가 3분의 1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산의 절반을 받았다'는 설명이 자주 돌지만 본문의 서술은 아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를 친다는 것
돼지는 율법이 먹지 못하게 정한 짐승이었다(레 11:7, 신 14:8). 단순히 안 먹는 정도가 아니라,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르는 상징에 가까웠다. BC 2세기에 이방 왕이 유대인에게 돼지고기를 강요한 사건은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니 돼지 치는 일은 '월급이 적은 힘든 일'이 아니다. 자기가 속했던 공동체의 선 바깥으로 완전히 넘어갔다는 표시였다. 게다가 그는 임금을 받는 일꾼이라기보다 남의 집에 얹혀 있는 처지에 가까웠고, 돼지가 먹는 것조차 그의 몫이 아니었다.
나이 든 남자가 달린다는 것
그 시대 지중해 사회에서 어른 남자의 위엄은 천천히 움직이는 데서 드러난다고 여겨졌다. 발목까지 오는 겉옷을 입고 달리려면 옷자락을 걷어 올려 다리를 드러내야 했다. 아버지가 달려 나갔다는 짧은 서술을, 아들을 마을 사람들보다 먼저 만나기 위해 체면을 버린 행동으로 읽는 해석이 널리 퍼져 있다. 다만 이 독법은 20세기 후반 이후 문화인류학 모델을 신약 해석에 도입하면서 강해진 것이라, 세부까지 확정된 사실로 다루기는 어렵다.
옷·반지·신발·송아지
아버지가 시킨 네 가지는 모두 신분을 되돌리는 물건이다. 가장 좋은 겉옷은 귀한 손님에게 입히던 것이고, 인장이 새겨진 반지는 집안의 일을 대신 처리할 권한을 뜻했다. 신발은 맨발로 다니던 종과 신을 신는 자유인을 가르는 표시였다. 살진 송아지는 한 가족이 다 먹을 수 없는 크기라, 마을 전체를 부르는 잔치를 의미했다. 즉 아버지는 아들을 조용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마을 앞에서 공개적으로 복권시킨 셈이다.
이 비유가 놓인 자리
누가복음 15장은 세 개의 비유가 한 묶음이다. 잃은 양, 잃은 동전, 그리고 이 이야기다. 세 비유는 '저 사람이 죄인들과 어울려 밥을 먹는다'는 불평에 대한 대답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의 두 이야기는 찾은 뒤 함께 기뻐하는 장면으로 끝나지만, 세 번째 이야기에만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등장한다.
'탕자'라는 제목
성경 본문에 제목은 없다. 후대에 붙은 이름이며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라는 뜻이다. 영어권에서 쓰는 'prodigal'도 낭비한다는 뜻의 형용사다. 다만 이 제목이 이야기의 절반만 가리킨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잃은 아들 비유', '두 아들 비유', '기다린 아버지 비유'로 부르자는 제안이 함께 쓰인다.

흔한 오해

이 이야기는 둘째 아들이 돌아와 잔치를 여는 데서 끝난다.

잔치는 절반 지점이다. 뒤에 큰아들이 문밖에 서서 들어가지 않는 장면이 이어지고, 비유는 그가 어떻게 했는지 말하지 않은 채 끝난다. 이 비유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불평하던 이들이었다. 이야기 안에서 그들의 자리는 둘째가 아니라 큰아들이었다. 그림과 설교가 대부분 돌아오는 장면에 집중해 온 탓에 뒷부분이 덜 알려졌을 뿐이다.

'탕자'는 성경이 붙인 제목이다.

본문에는 제목이 없다. 후대에 붙은 이름이고, 이야기의 절반만 가리킨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두 아들 비유'나 '기다린 아버지 비유'라는 이름이 함께 쓰인다.

둘째는 아버지 재산의 절반을 받아 갔다.

본문은 비율을 적지 않는다. 맏아들에게 두 몫을 주도록 한 구약 규정을 배경으로 보면 3분의 1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머지 3분의 2는 이미 큰아들 몫으로 정리된 상태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한 대목이 이 계산과 맞물린다.

돼지를 친 것은 그냥 형편이 어려워 험한 일을 했다는 뜻이다.

돼지는 율법이 금한 짐승이었고, 유대인에게는 정체성을 가르는 선이었다. 그 일을 맡았다는 서술은 경제적 몰락만이 아니라 공동체 바깥으로 완전히 밀려났다는 표시로 읽힌다. 처음 듣던 청중에게는 이 대목이 이야기의 최저점이었다.

큰아들은 그냥 속 좁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본문은 큰아들을 조롱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사실에 가깝다. 그는 실제로 남아서 일했고, 실제로 잔치를 받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의 항변을 반박하지 않고 인정한 뒤에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둘째를 데리러 나갔던 것처럼 큰아들에게도 직접 나간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가 집을 나서는 장면은 두 번이다.

아버지가 요구를 들어준 것은 이야기 속에서 당연한 일이다.

당시 감각으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처음 듣던 사람들은 아버지가 거절하거나 크게 꾸짖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가능성이 크다. 본문이 아버지의 감정을 한 줄도 적지 않고 곧바로 분배로 넘어간다는 점 때문에, 이 침묵 자체를 이야기의 첫 번째 충격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이 이야기에는 아들이 둘 나와요. 한 명은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어요. 다른 한 명은 한 번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잔치에 못 들어간 건 나가지 않은 쪽이에요. 아버지는 두 번 밖으로 나갔어요. 한 번은 돌아오는 아들에게 갔어요. 한 번은 화가 난 아들에게 갔어요. 두 번 다 아버지가 먼저 나갔어요.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누가 잘못했을 때 잔치를 열어 주기가 쉬운가요, 아니면 화가 나나요?

이 비유는 보통 '용서'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그런데 본문을 끝까지 따라 읽으면 무게 중심이 조금 다른 곳에 있다. 아버지가 집을 나서는 장면이 두 번이라는 점이 그렇다. 한 번은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한 번은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데리러 나간다. 둘 다 아버지가 먼저 움직인다. 두 아들은 정반대 방식으로 밖에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문 앞에 서 있었다. 큰아들의 말이 특히 남는다. 그는 억울해할 만한 근거가 있다. 남아서 일한 사람이 손해를 본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받을 자격이 없는데 거저 주어진 것'을 뜻하는 은혜라는 말은 늘 이 지점에서 걸린다.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격을 갖춘 쪽에게는 불공평하게 보인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답 대신 질문으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은 아버지의 설명도, 큰아들의 대답도 아니다. 문이 열려 있고 한 사람이 그 앞에 서 있는 그림이다. 남는 질문은 이렇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여는 일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 그리고 성실하게 남아 있던 사람이 느끼는 억울함은, 틀린 감정인가 아니면 이 이야기가 정면으로 다루려 한 감정인가.

해석사에서 이 비유는 오랫동안 회개와 용서의 표본으로 읽혔다. 둘째 아들의 귀환이 중심에 놓이고, 아버지는 받아 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렘브란트의 후기 그림이 그 독법을 시각적으로 굳혔고, 20세기 후반 헨리 나우웬의 묵상서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뜨렸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연구는 강조점을 두 번 옮겼다. 먼저 요아힘 예레미아스 이래로 이 비유를 문맥 안에서 읽는 흐름이 자리 잡았다. 15장 서두의 논쟁이 대답의 대상이라면, 이 이야기의 목표 청중은 돌아온 죄인이 아니라 그 환영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케네스 베일리 등이 중동 농촌 문화 자료를 끌어와, 유산 요구와 달려 나간 아버지의 사회적 무게를 부각시켰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체면을 버린 아버지' 독법은 대체로 여기서 나왔다. 다만 이 문화적 독법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근래의 중동 농촌 관행을 1세기 갈릴리에 소급하는 데 방법론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유대인 신약학자 에이미 질 러바인은 특히 두 가지를 문제 삼는다. 하나는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 예수는 은혜의 종교'라는 대비를 이 비유에서 끌어내는 서술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성경 안에 형제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온다는 점을 무시한 독법이다. 카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형들까지, 유대 전통의 청중은 '두 아들' 이야기를 들으면 동생이 형을 제치는 익숙한 패턴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 계보에서 보면 이 비유는 처음으로 형이 진 채로 끝나지 않고, 형을 데리러 나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본문 자체에 남는 공백도 짚어 둘 만하다. 이 이야기에는 대속(누군가가 대신 값을 치러 잘못을 해결하는 것)이나 배상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설명되지 않고, 잃어버린 3분의 1이 회복되었다는 언급도 없다. 이 침묵을 두고, 비유는 교리 진술이 아니라 한 장면을 보여 주는 장치이므로 조직신학의 항목을 여기서 다 찾으려는 시도가 무리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반면 종교개혁 전통 일부에서는 이 비유의 아버지를 십자가 사건과 연결해 읽어 왔고, 그 독법 안에서는 침묵이 곧 다른 본문으로 넘어가는 자리가 된다. 마지막으로 결말의 개방성이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결말을 비운 채 끝나는 사례는 드물지 않지만(포도원 소작인, 큰 잔치), 이 비유는 그 공백을 가장 인물 가까이에 놓는다. 이야기의 마지막 화자는 아버지이고, 마지막으로 반응해야 하는 사람은 무대 위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다. 문학적으로 이것은 청중을 등장인물로 끌어들이는 장치이며, 이 비유가 2천 년 동안 계속 다시 읽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둘째 아들이 돌아가기로 한 결심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뉘우침인가, 굶주림 앞의 계산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진심 어린 방향 전환으로 보는 입장

밑바닥에서 그는 자기가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았고, 아들 자격을 포기하고 일꾼 자리를 청하기로 한 것은 실제로 마음이 돌아섰다는 표시로 읽는다.

  •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잘못을 자각하는 순간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쓰인다는 점
  • 그가 준비한 말이 아버지에 대한 잘못만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잘못까지 포함한다는 점
  • 아들 신분을 스스로 내려놓고 임금을 받는 일꾼 자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요구가 아니라 포기에 가깝다는 점
  • 누가복음이 15장 전체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회개)'과 하늘의 기쁨을 반복해 연결한다는 점

전통적인 주석과 대다수 교단의 설교 전통에서 오래 유지되어 온 독법

생존을 위한 계산으로 보는 입장

그가 떠올린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집의 식량이었고, 준비한 대사도 통할 만한 대본에 가깝다고 읽는다. 이 독법에서 이야기의 무게는 아들의 동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반응에 실린다.

  • 그가 정신을 차리는 계기가 굶주림이며, 본문이 가장 먼저 적는 생각도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남는다는 사실이라는 점
  •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반드시 도덕적 뉘우침을 뜻하지는 않고, 제정신을 차렸다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점
  • 아버지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지시를 내린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초점이 아들의 준비 상태에 있지 않다는 점
  • 동기가 어떻든 결과가 같다는 구성이 오히려 앞의 두 비유(양과 동전은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다)와 맞아떨어진다는 주장

20세기 이후 문학적·문맥적 독법을 강조하는 신약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어 왔다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아버지의 환대가 아들이 무엇을 말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달려 나가고, 준비된 대사는 끝까지 발화되지 못한다. 또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둘째의 귀환이 아니라 문밖에 남은 큰아들에게로 옮겨 간다는 점도 공통으로 인정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본문은 둘째의 속마음을 끝내 서술하지 않는다. 그리스어 표현만으로 뉘우침인지 계산인지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읽든 독자가 빈칸을 채우게 된다. 잔치 이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서술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