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로
몇 년째 감옥에 갇혀 있던 남자가, 지방 총독 대신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받겠다고 선언했다. 그 한마디는 그를 죄수의 몸으로 배에 태워, 폭풍과 난파선을 지나 로마까지 실어 날랐다.
사도행전 · 사도행전 27-28장 · 초대교회 · 읽는 시간 약 6분
이야기
상황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붙잡혔어요. 그 뒤로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가이사랴라는 항구 도시의 감옥이었어요. 총독이 재판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었어요. 둘 다 바울을 그냥 갇혀만 두었어요. 죄가 있다고 확실히 말하지도 않고, 풀어 주지도 않았어요. 시간만 흘러 몇 년이 지났어요.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어요. 로마 시민은 특별한 권리가 있었어요. 로마의 가장 높은 재판관, 황제에게 직접 재판받겠다고 요청할 수 있었어요. 바울은 그 권리를 썼어요. '황제에게 재판받겠습니다'라고 말한 거예요. 그 한마디로 정해졌어요. 바울은 로마로 가야 했어요. 죄수의 몸으로요.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붙잡힌 뒤, 항구 도시 가이사랴로 옮겨져 감옥에 갇혔다. 이 사건이 있기까지의 과정은 앞선 이야기들에서 다룬다.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이 머무는 곳이었다. 재판을 맡은 총독은 벨릭스였다. 그런데 벨릭스는 뇌물을 기대했는지, 아니면 유대 지도자들의 눈치를 봤는지, 바울을 풀어 주지도 유죄로 확정하지도 않은 채 2년을 끌었다.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새 총독으로 부임했다. 유대 지도자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달라고 요청했는데, 본문은 이들이 도중에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전한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재판받을 뜻이 있느냐고 물었다. 바울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로마 시민만 쓸 수 있는 권리를 꺼냈다. 지방 총독의 판결에 불복하고,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황제에게 재판받겠다고. 베스도는 자문단과 상의한 뒤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유대 왕 아그립바 2세 앞에서 한 차례 더 사정을 설명하는 자리가 있었지만, 이미 상소한 이상 재판 자체는 로마로 넘어간 뒤였다. 그렇게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되었다. 자유인으로서가 아니라,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는 죄수의 신분으로였다.
이 장면의 배경에는 로마 속주 통치 체계와 시민권의 법적 지위가 있다. 총독 안토니우스 펠릭스(벨릭스)는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프로쿠라토르였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를 두고 '노예의 근성으로 왕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취지의 혹평을 남겼는데, 사도행전도 그가 뇌물을 기대하며 바울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고 전한다. 후임 총독 포르키우스 베스도의 부임 연도는 학설이 갈린다. 전통적으로는 AD 59~60년경으로 보지만, 화폐 증거나 다른 정황을 근거로 더 이른 시기(50년대 중반)를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바울이 근거로 삼은 권리는 로마 시민이 속주 총독의 재판을 거부하고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요청할 수 있는 절차다. 공화정 시기의 '프로보카티오'(시민단에 대한 상소)가 제정기에 들어오며 '아펠라티오'(황제에 대한 상소)로 이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설명이다. 다만 이 절차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에, 어떤 조건으로 적용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로마법 자료는 많지 않다. 약 50년 뒤 소아시아 총독을 지낸 소(小)플리니우스가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그리스도인 피고인들을 재판하지 않고 로마로 보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 편지는 사도행전이 그리는 절차가 로마의 실제 행정 관행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정황 증거로 흔히 인용된다. 아그립바 2세 앞에서의 심문(사도행전 26장)은 시간순으로는 상소 선언 이후에 놓인다. 아그립바는 바울의 변론을 들은 뒤 베스도에게, 상소만 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다. 이 발언은 상소가 한번 공식화되면 되돌릴 수 없는 절차였음을 보여 주는 단서로 읽히지만, 정확히 어떤 법적 근거에서 나온 판단인지 본문은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바울의 상소는 그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이송되는 배에 오르게 된다. 사도행전 27장 1절은 이 호송을 맡은 인물이 '아우구스투스 부대' 소속 백부장 율리오였다고 적는다. 이 부대의 정확한 정체는 확정되지 않았으며, 시리아 주둔 기록에 등장하는 동명의 부대와 연결하는 견해가 있으나 확증되지는 않는다.
사건
바울과 다른 죄수들은 배를 탔어요. 로마로 가는 배였어요. 가는 길에 큰 배로 갈아탔어요. 이집트에서 곡식을 싣고 가는 큰 배였어요. 날씨가 점점 나빠졌어요. 바울은 지금 가면 위험하다고 경고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어요. 배가 바다로 나가자 엄청난 폭풍이 몰아쳤어요. 며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짐을 바다에 던졌어요. 배를 가볍게 하려고요.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점점 사라졌어요. 그렇게 열나흘이 지났어요. 바울은 사람들에게 힘을 내라고 말했어요. 한 명도 죽지 않을 거라고요. 드디어 육지가 보였어요. 그런데 배는 모래톱에 걸려 부서지고 말았어요. 사람들은 헤엄을 치거나 널빤지를 붙잡고 겨우 뭍으로 나왔어요.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그 섬은 몰타라는 곳이었어요. 섬사람들은 불을 피워 주었어요. 비가 오고 추웠거든요. 바울이 나뭇가지를 모아 불에 넣었어요. 그런데 뜨거워진 독사 한 마리가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어요. 섬사람들은 바울이 나쁜 사람이라 벌받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바울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한참을 지켜봐도 바울이 멀쩡하자, 사람들은 이번엔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어요.
바울 일행은 죄수와 병사들을 함께 태운 배로 로마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에 소아시아의 항구 무라에서 이집트발 곡식 운반선으로 갈아탔다. 로마는 이집트의 곡식에 크게 의존했고, 이런 대형 화물선은 승객도 함께 실어 날랐다. 계절이 늦어 항해가 위험해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대로 가면 화물과 배는 물론 사람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 그리고 백부장은 그 말보다 겨울을 나기에 더 나은 항구로 가자는 다수의 의견을 따랐다. 배가 바다로 나서자 '유라굴로'라 불리는 사나운 북동풍이 섬 뒤에서 갑자기 몰아쳤다. 배는 바람을 거스를 수 없었고, 선원들은 밧줄로 배 몸체를 둘러 감고, 실은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배의 장비까지 손으로 던져 버렸다. 여러 날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고,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마저 사라져 갔다고 본문은 전한다. 그 어둠 속에서 바울은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은 살아서 황제 앞에 서야 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그러니 배에 탄 모두가 목숨을 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배는 어느 섬에 걸려 부서질 것이라는 말도 함께 전했다. 열나흘째 밤, 선원들은 육지가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몇몇 선원이 몰래 구명정을 타고 도망치려 하자, 바울은 이들이 남지 않으면 아무도 살 수 없다고 경고했고, 병사들이 밧줄을 끊어 구명정을 떠내려 보냈다. 날이 밝자 배는 모래톱에 걸려 좌초했고, 뱃머리는 박힌 채 고물부터 파도에 부서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죄수들이 헤엄쳐 도망칠까 봐 모두 죽이려 했지만,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려고 이를 막았다. 결국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헤엄쳐서, 나머지는 널빤지나 배의 파편을 붙잡고 모두 무사히 육지에 닿았다. 그 섬은 몰타였다. 섬 주민들은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지만 비에 젖고 지친 일행을 위해 불을 피워 맞아 주었다. 바울이 나뭇가지를 모아 불 위에 얹는데, 열기에 놀란 독사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그의 손에 매달렸다. 주민들은 바다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결국 벌을 피하지 못하는구나 생각하며 그를 살인자로 여겼다. 그러나 바울이 뱀을 불 속에 털어 버리고도 아무 이상이 없자, 이번에는 그를 신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 항해 기록은 고대 지중해 항해 문헌 가운데 가장 상세한 축에 속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항해 전문가 제임스 스미스는 저서 『바울의 항해와 난파』(1848)에서, 본문에 나오는 풍향·거리·항로·소요 시간을 당대 지중해의 실제 기상·해류 자료와 맞춰 검토했고, 세부 묘사가 고대 지중해 항해 관행과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결론지었다. 이 분석은 이후로도 누가복음·사도행전 저자의 항해 지식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된다. 폭풍의 이름 '유라굴로'(에우라퀼론)는 그리스어 '에우로스'(동풍)와 라틴어 '아퀼로'(북풍)를 합친 혼성어로, 뱃사람들이 실제로 쓰던 방위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후대 사본은 이를 '유로클뤼돈'(파도를 뜻하는 요소가 포함된 형태)으로 다르게 적는데, 어느 쪽이 원래 표현에 가까운지는 사본학적으로 논의가 이어진다. 선원들이 취한 조치들—배 몸체를 밧줄로 둘러 감는 것, 시르티스 모래톱을 피하려 닻을 내리는 것, 수심을 재는 납줄을 쓰는 것—은 모두 고대 지중해 항해술에서 실제로 쓰이던 기법과 일치한다. 이런 세부가 후대의 상상만으로 쓰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이 대목을 목격자의 기록 또는 목격자에게서 들은 기록으로 보는 근거로 흔히 제시된다. 다만 세부 묘사의 정확성이 사건 전체의 역사성이나 저작 시기 문제를 자동으로 확정해 주지는 않는다는 신중론도 있다. 배에 탄 인원을 사도행전 27장 37절은 276명으로 적는다. 그런데 일부 사본은 이를 '약 76명'으로 적어, 사본 간 숫자가 갈린다. 고대 그리스어 필사에서 숫자를 알파벳 문자로 표기하던 방식 때문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멜리데'로 불린 섬을 몰타로 보는 것이 전통적이고 압도적인 다수설이며, 스미스의 항로·풍향 계산도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소수 견해로 아드리아해 쪽의 다른 섬(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믈례트)을 지목하는 주장이 근세 이후 간헐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나, 본문이 전하는 항로와 소요 시간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독사 사건에 대해서는 오늘날 몰타에 치명적인 독사가 서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주 거론된다. 2천 년에 걸친 삼림 벌채와 인간 정주로 서식 환경이 크게 바뀌었을 가능성을 드는 설명과, 이 서술을 문자 그대로의 동물학적 보고가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담은 장면으로 읽어야 한다는 설명이 함께 제시된다. 어느 쪽이든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사건 전체나 장소 식별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 다수 논평자의 판단이다. 섬 주민들이 바울을 살인자로, 이어 신으로 여기는 반전은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신으로 오인받는 장면과 나란히 읽힌다는 지적이 있다. 두 장면 모두 그리스·로마 세계에 퍼져 있던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통념을 배경에 깔고, 그 통념이 얼마나 성급한 판단인지를 함께 보여 준다는 읽기다. 본문은 어느 장면에서도 주민들의 판단을 서술자의 목소리로 확인해 주지 않는다.
결과
몰타 섬의 대표였던 보블리오라는 사람이 바울 일행을 사흘 동안 잘 대접해 주었어요.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아파서 누워 있었어요. 바울이 기도하고 손을 얹자 병이 나았어요. 그 뒤로 섬의 다른 아픈 사람들도 찾아왔어요. 바울 일행은 몰타에서 겨울을 났어요. 날씨가 풀리자 다시 배를 탔어요. 여러 항구를 거쳐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어요. 로마의 믿는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주었어요. 바울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어요. 자기 돈으로 집을 빌려 지냈어요. 다만 군인 한 명이 늘 곁에서 지켰어요. 바울은 그 집에서 2년을 지냈어요.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 만났어요. 아무도 막지 않았어요. 사도행전이라는 책은 여기서 끝나요. 바울이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 책에 나오지 않아요.
몰타 섬의 최고 관리 보블리오는 바울 일행을 사흘간 극진히 대접했다. 그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로 앓아눕자 바울이 찾아가 기도하고 손을 얹었고, 그가 나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섬의 다른 병자들도 찾아와 치료를 받았다고 본문은 전한다. 일행은 몰타에서 겨울을 났다. 항해할 수 없는 계절이었기 때문이다. 봄이 되자 그 섬에서 함께 겨울을 난 또 다른 알렉산드리아 곡식 운반선을 타고 다시 출발했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이탈리아 본토의 레기온을 거쳐 마침내 보디올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이미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나 일주일을 함께 지냈다. 로마에 있는 신자들은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가는 길목인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마중을 나왔다. 본문은 이들을 본 바울이 마음이 놓였다고 적는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정식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자기 돈으로 셋집을 얻어 지내되, 늘 병사 한 명과 사슬로 함께 묶여 지내는 방식이었다. 사흘 뒤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 자기 사정을 설명했다. 이후 더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하루 종일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설명했다. 어떤 이는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울은 그 셋집에서 꼬박 2년을 지냈다.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 맞아들였고,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이 전하려는 것을 가르쳤다고 사도행전은 적는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바울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보블리오를 가리켜 사도행전이 쓰는 표현('그 섬의 으뜸가는 자')은 흥미로운 고고학적 뒷받침을 갖는다. 몰타에서 발견된 라틴어·그리스어 비문 몇 건에 지역 최고 관리를 가리키는 '프리무스'(그리스어 '프로토스'에 상응하는 칭호)라는 표현이 실제로 남아 있어, 이 대목이 그 지역 특유의 행정 용어를 정확히 반영한 표현이라는 점이 여러 고전학자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이는 누가복음·사도행전 저자가 각 지역의 실제 행정 명칭에 세심했다는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로마에서 바울이 놓인 상태는 흔히 '쿠스토디아 밀리타리스', 곧 군사적 감시 아래의 가택 연금으로 불린다. 정식 감옥 구금보다 가벼운 형태로, 피고인이 스스로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비를 대되 병사 한 명과 사슬로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로마 시민이면서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피고인에게 종종 허용되던 방식으로 알려진다. 이 조건 아래서도 방문객을 자유롭게 맞고 가르칠 수 있었다는 점이, 뒤에 이어지는 '막힘없이'(그리스어 아콜뤼토스)라는 표현과 맞물려 이 시기를 상당히 활동적인 기간으로 그려낸다. 신약학계에서는 이 2년의 로마 연금 기간을, 바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몇몇 편지—빌립보서·골로새서·빌레몬서·에베소서, 이른바 '옥중 서신'—의 저작 시기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이해다. 다만 이 가운데 빌립보서와 빌레몬서에 대해서는, 편지에 나타나는 왕래의 빈번함과 거리 감각(특히 빌레몬서에서 다뤄지는 오네시모 문제가 골로새와 가까운 지역에서 오간 정황)을 근거로, 로마가 아니라 그보다 앞선 시기 에베소에서의 가상의 투옥 상황을 저작지로 보는 견해도 소수이지만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사도행전 자체는 에베소 투옥을 명시적으로 서술하지 않으므로, 이 견해는 고린도후서 1장의 암시적 언급 등 다른 본문에 기대는 재구성이다. 사도행전은 이 2년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서술을 멈춘다. 재판이 어떻게 결론 났는지, 바울이 방면되었는지 처형되었는지는 이 책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그리스어 마지막 낱말은 '아콜뤼토스'(막힘없이, 방해받지 않고)로, 사도행전 1장 8절이 예고한 대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로마—당시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곳—까지 다다랐다는 사실 자체로 이야기를 닫는다는 인상을 준다. 이 결말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여러 입장이 있으며,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서 다룬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 가이사에게 상소하다
- 로마 시민에게는 지방 총독의 재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요청할 권리가 있었다. 바울은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아래서 몇 년째 재판도 석방도 되지 않은 채 갇혀 있다가 이 권리를 썼다. 한번 공식화된 상소는 되돌릴 수 없었고, 그 순간부터 재판 자체가 로마로 넘어갔다.
- 백부장과 호송
- 죄수를 먼 곳으로 이송할 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병사 약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이 책임을 맡았다. 사도행전은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의 이름을 율리오라 적고, 그가 속한 부대를 '아우구스투스 부대'라 적는다. 이 부대의 정확한 정체는 확정되지 않았다.
- 알렉산드리아 곡물선
- 로마는 자체 식량을 자급하지 못해 이집트에서 오는 곡식 운반선에 크게 의존했다. 이런 배는 화물뿐 아니라 승객도 함께 실어 날랐고,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 항구 무라에서 로마로 가는 이런 배로 갈아탔다.
- 유라굴로(북동풍)
- 그리스어 '동풍'과 라틴어 '북풍'을 합친 것으로 보이는 뱃사람들의 방위 명칭이다. 지중해에서는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이런 갑작스러운 강풍이 잦았고, 당시 항해자들은 이 계절을 피해 겨울 동안 배를 세워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멜리데(몰타)와 '바르바로이'
- 본문이 도착한 섬을 부르는 이름 '멜리데'는 오늘날의 몰타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주민들을 가리켜 쓰인 '바르바로이'는 '야만인'이 아니라 그리스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언어가 다르다는 뜻이지 문명 수준을 낮게 평가하는 말이 아니다.
- 셋집에서의 연금
-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정식 감옥이 아니라 자기 돈으로 얻은 집에 머물렀다. 병사 한 명과 사슬로 묶여 지내야 했지만, 방문객을 맞고 가르치는 일은 막히지 않았다. 이런 형태의 구금은 흔히 '군사적 감시 아래의 가택 연금'으로 불린다.
흔한 오해
❌사도행전은 바울이 순교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은 그가 로마의 셋집에서 2년 동안 아무 방해 없이 사람들을 맞고 가르쳤다는 문장으로 끝나며, 그의 죽음은 이 책 어디에도 서술되지 않는다. 후대 문헌인 1세기 말 클레멘스 1서와 이후 초기 교회 역사가들의 기록은 그가 네로 치하에서(대략 AD 64~68년경) 처형되었다고 전하지만, 이는 사도행전 밖의 자료다.
❌몰타 원주민들이 바울을 신으로 여긴 것은 그가 실제로 신적 능력을 지녔음을 성경이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본문은 주민들의 반응—처음엔 살인자로, 곧이어 신으로—을 그대로 전할 뿐이다. 서술자가 그 판단이 옳았다고 확언하는 문장은 없다.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신이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통념이 널리 퍼져 있었고,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비슷하게 오인받는 장면과 나란히 읽힌다.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만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죄로 풀려났을 것이다.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에게 남긴 말은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이는 그 자리에서 나온 한 사람의 판단일 뿐이다. 게다가 상소는 한번 공식적으로 선언되면 되돌릴 수 없는 절차였고, 그 시점 이후로는 재판 자체가 로마로 넘어갔다.
❌지금 몰타에 독사가 살지 않으니 이 사건은 근거 없는 이야기다.
⭕2천 년에 걸친 삼림 벌채와 인간 정주로 서식 환경이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항해 기록은 풍향·거리·항로 등 세부 묘사가 고대 지중해 항해 관행과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평가를 받아 온 대목이라, 뱀 한 종의 현재 서식 여부만으로 사건 전체나 장소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이 이야기의 끝은 좀 이상해요. 바울이 어떻게 됐는지 말해 주지 않거든요. 폭풍도 이기고, 독사에 물려도 괜찮았던 사람인데 말이에요. 이야기는 대신 이렇게 끝나요. 바울이 계속 가르쳤다는 것으로요. 아무도 막지 못했다는 것으로요. 여러분이라면 이야기의 끝에서 무엇이 더 궁금할까요?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아니면 그 사람이 전한 말이 어떻게 됐는지, 둘 중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결말의 모양이다. 폭풍을 뚫고 난파를 겪고 독사에 물리고도 무사했던 사람의 이야기치고, 마지막 장면은 아주 조용하다. 죽음도, 승리 선언도 없다. 그저 셋집에서 사람들을 맞으며 가르쳤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사도행전이 쓰인 그리스어에서 마지막 낱말은 '막힘없이'라는 뜻의 단어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예고된 것—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로마까지 이르는 일—이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남기고 이야기는 멈춘다. 왜 하필 여기서 멈추는지, 본문은 답하지 않는다. 이 물음에 대한 몇 가지 답은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 정리해 두었다.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그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그가 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문장으로 끝날 때, 그 결말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사도행전의 결말을 다루는 방식은 최소한 세 갈래로 나뉜다. 아래 '다르게 보는 시각'에서 이를 근거와 함께 정리한다. 여기서는 그 결말이 남기는 서사적 효과에 조금 더 집중해 볼 만하다. 이 책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1장) 사마리아를 거쳐(8장) 이방 세계로(10장 이후) 뻗어 나가는 지리적 확장을 뼈대로 짜여 있다. 로마는 그 뼈대의 마지막 칸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칸에서 독자가 보는 것은 개선 행렬이 아니라, 사슬에 묶인 채 셋집에서 손님을 맞는 한 사람이다. 이 대비—제국의 심장부에 다다랐다는 지리적 성취와, 여전히 죄수 신분이라는 정치적 현실—를 어떻게 함께 쥘 것인가가 이 결말을 읽는 핵심 질문이 된다. 어떤 독자는 이 대비에서 아이러니를 읽는다. 세상의 권력이 가장 강한 곳에서, 가장 힘없어 보이는 방식으로 메시지가 전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독자는 이 대비를 특별히 신학적으로 읽기보다, 그저 저자가 손에 쥔 자료가 거기서 끝났기 때문이라고 담담하게 설명한다. 어느 쪽으로 읽든, 본문 스스로는 결론을 내려 주지 않는다. 이 책이 답하지 않은 질문에 어떤 답을 채워 넣을지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의 이야기로 볼 것인지는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사도행전은 왜 이렇게 갑자기 끝나는가 — 본문이 답하지 않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이른 저작 연대로 보는 입장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던 바로 그 시점에 바울의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야기가 실제 시간과 함께 멈췄다고 본다.
- 재판 결과나 네로의 대박해(AD 64년경), 예루살렘 멸망(AD 70년) 같은 이후의 큰 사건들을 사도행전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
- 이런 사건들이 언급되지 않는 이유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점에 책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점
- 이 입장은 사도행전의 저작 연대를 AD 62년경으로 이르게 잡는 근거로도 함께 쓰인다
일부 신약학자들, 특히 사도행전을 목격자 자료에 가깝다고 보는 학자들 사이에서 지지된다
문학적·신학적으로 의도된 결말로 보는 입장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땅끝, 곧 로마로 상징되는 곳까지 이르렀다는 이 책 첫머리의 구조적 약속이 완성되었으므로, 저자가 의도적으로 여기서 이야기를 닫았다고 본다.
- 사도행전 1장이 예루살렘-유대와 사마리아-땅끝이라는 세 단계의 지리적 확장을 미리 제시한다는 점
- 로마가 당시 지중해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지리적 완결점으로 기능한다는 점
- 책의 마지막 그리스어 낱말이 '막힘없이'로, 복음의 확산이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는 신학적 메시지로 마무리된다는 점
사도행전을 문학 작품으로 분석하는 서사비평·문학비평 계열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후속편 미완성 또는 소실 가능성을 제기하는 입장
누가복음-사도행전을 2부작으로 기획한 누가가 바울의 재판과 그 이후까지 다루는 세 번째 책을 계획했으나 쓰지 못했거나, 썼지만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 누가복음 1장과 사도행전 1장이 서로를 '첫째 책'으로 지칭하며 연작 구조를 분명히 밝힌다는 점에서, 저자가 시리즈 형식의 글쓰기에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
- 고대 역사 저술 가운데 여러 권으로 기획되었으나 일부만 남거나 미완으로 그친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점
소수의 학자들이 제기해 온 가설로, 직접적인 문헌 증거는 없는 추정에 가깝다
공통점 세 입장 모두 사도행전이 바울의 죽음을 서술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에는 동의한다. 또한 이 침묵이 저자의 부주의나 자료 부족 때문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사도행전이 언제,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가 하는 저작 연대 논쟁은 신약학에서 오래 이어진 주제이며, 이 결말을 어떻게 읽느냐가 그 논쟁과 서로 맞물려 있다. 어느 한 입장으로 결론이 모인 상태는 아니다. 이 앱은 세 입장 가운데 어느 쪽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