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부름
자식 하나 없는 일흔다섯 살 노인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는 길을 향해 평생 살아온 곳을 정리하고 떠난다.
창세기 · 창세기 12장 · 족장시대 · 읽는 시간 약 3분
이야기
상황
아브람은 나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아들도 딸도 없었어요.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네가 살던 곳을 떠나라. 내가 보여줄 새 땅으로 가라." 그리고 큰 약속도 해주셨어요.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 너를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받게 하겠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어요.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데리고 길을 떠났어요.
아브람은 이미 한 번 고향을 떠난 사람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우르에서 하란까지 아버지를 따라 옮겨와 살고 있었다. 그는 일흔다섯 살이었고, 아내 사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말을 건넨다. 살던 땅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목적지도 이유도 설명되지 않았다. 대신 약속이 주어졌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이름을 크게 하며, 그로 인해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복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 그동안 모은 사람들과 재산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창세기 12장 첫 절은 오경 전체의 경첩으로 흔히 읽힌다. 앞선 11장까지의 원역사가 인류 전체의 흩어짐으로 끝난 자리에서, 서사는 갑자기 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히브리어 명령 '레크 레카'(가라, 너를 위하여)는 22장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그대로 다시 쓰여 두 장면을 문학적으로 묶는다. 아브람의 출신지 '갈대아 우르'의 위치는 학계에서 확정되지 않았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대도시 우르로 보는 전통적 견해와, 하란에 더 가까운 북부의 다른 지명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호수아 24장 2절은 데라의 집안이 강 건너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전하는데, 이 배경과 나란히 놓으면 아브람의 부름은 이미 신실했던 사람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별다른 설명 없이 시작되는 사건으로 읽힌다. 족장 설화의 역사성 자체도 논쟁거리다. 청동기 중기(BC 2000~1700년경)의 유목 생활상과 상응한다는 견해가 있는 한편, 후대의 신학적 필요에 따라 구성된 문학적 조상 서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건
아브람 가족은 가나안 땅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졌어요. 아브람은 이집트로 내려갔어요. 가기 전, 아브람은 겁이 났어요. "사람들이 내 아내를 예쁘다고 여겨서 나를 죽일지도 몰라." 그래서 사래에게 말했어요. "당신은 내 누이라고 말해요." 이집트 왕은 사래를 궁으로 데려갔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왕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렸어요. 왕은 곧 이유를 알아냈어요. 왕은 화가 나서 아브람을 불러 물었어요.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느냐?"
가나안 땅에 이르러 아브람은 세겜과 벧엘 근처에 제단을 쌓지만, 곧 그 땅에 심한 기근이 닥친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식량이 있는 이집트로 내려간다. 국경을 앞두고 아브람은 사래의 미모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래에게 자신을 오빠라고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집트 관리들이 사래를 눈여겨보았고, 사래는 파라오의 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브람은 그 대가로 양과 소, 종을 얻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파라오의 집안에 심한 재앙을 내렸고, 파라오는 곧 사래가 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는 아브람을 불러 왜 사실을 숨겼느냐고 따진 뒤 두 사람을 나라 밖으로 내보낸다.
이 '누이 화소'는 창세기에서 세 번 반복된다(12장 이집트의 파라오, 20장 그랄 왕 아비멜렉, 26장 이삭과 리브가). 세 이야기의 유사성 때문에 문서비평은 이를 하나의 전승이 서로 다른 자료층을 거쳐 변형된 결과로 설명해 왔다. 20장 12절에서 사래가 실제로 아브람과 아버지가 같은 이복누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라기보다 결혼 관계라는 핵심 정보를 의도적으로 뺀 반쪽짜리 진실에 가깝다. 20세기 중반 일부 학자들은 이 관행을 누지 문서의 '누이-아내' 입양 계약과 연결짓기도 했으나, 이후 근거가 약하다는 비판을 받아 지금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서사적으로 이 사건의 무게는 단순한 부부간 갈등을 넘어선다. 사래는 12장 1~3절 약속의 유일한 통로로 지목된 인물이며, 그가 파라오의 궁에 들어간 순간 약속 자체가 인간의 실책으로 끊길 위기에 놓인다. 파라오의 집에 내린 '재앙'이라는 표현은 훗날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에도 쓰여, 이 장면을 출애굽 서사의 축소판으로 읽는 해석도 있다.
결과
이집트 왕은 아브람과 사래를 나라 밖으로 내보냈어요. 두 사람은 가진 것을 챙겨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갔어요. 아브람은 예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다시 갔어요.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어요. 아브람은 실수를 했지만, 약속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이 약속은 나중에 아들 이삭에게, 또 그 아들에게 계속 이어집니다.
파라오는 아브람 부부를 사실상 국외로 추방하고, 두 사람은 이집트에서 얻은 가축과 종을 그대로 지닌 채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아브람은 예전에 제단을 쌓았던 벧엘 근처 자리로 다시 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집트에서의 실책에도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다. 다만 이 부부는 여전히 자식이 없고, 약속의 성취는 계속 뒤로 미뤄진다. 같은 두려움과 같은 속임수는 이후 20장과 26장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다시 반복되며, 창세기는 이 가족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붙들고 있다는 점을 계속 보여준다.
내러티브상 이 귀환은 순환 구조를 만든다. 아브람은 처음 제단을 쌓았던 자리(벧엘과 아이 사이, 12:8)로 되돌아가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13:3-4), 이는 이집트행이 여정의 이탈이었음을 표시하는 문학적 장치로 읽힌다. 동시에 이 사건은 훗날의 출애굽 서사를 미리 비추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해석도 있다. 조상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고, 재앙을 겪은 이집트 통치자가 그들을 내보내고, 그들이 재물을 얻어 나온다는 구조는 실제 출애굽 사건의 패턴과 겹친다. 신학적으로 이 장은 약속의 존속이 아브람의 신실함이 아니라 다른 근거에 있다는 주장의 본문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본문 자체는 그 근거를 명시하지 않으며, 이 침묵을 어떻게 읽을지는 해석자마다 갈린다. 같은 화소가 20장(아비멜렉)과 26장(이삭)에서 반복된다는 사실은, 이 가족의 이야기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인간의 패턴을 의도적으로 겹쳐 보여주는 편집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잠깐, 이건 알고 가자
- 아브람과 아브라함
- 이 시점의 이름은 아직 '아브람'이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훨씬 뒤인 창세기 17장에서다. 이 글에서는 독자에게 익숙한 이름인 아브라함으로 통일해 불렀다.
- 우르와 하란
- 아브람의 가족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남쪽 도시 우르에 살다가 하란으로 한 번 옮겨 살고 있었다. 부름을 받은 곳은 우르가 아니라 하란이다.
- 바로(파라오)
- 이집트 왕을 부르는 칭호다.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며, 본문은 이 시점의 왕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흔한 오해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어서 선택되었다.
⭕본문은 부름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수아 24장 2절은 그의 집안이 강 건너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전한다. 부름은 자격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 설명되지 않은 채 시작되는 사건으로 읽힌다.
❌이 이야기의 두 사람은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창세기 12장 시점에는 아직 아브람과 사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아브라함과 사라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훗날 창세기 17장의 일이다.
❌사래를 누이라고 소개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창세기 20장 12절에 따르면 사래는 실제로 아브람과 아버지가 같은 이복누이였다. 완전한 거짓말이라기보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감춘 반쪽짜리 진실에 가깝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일까
아브람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떠났어요. 그리고 무서울 땐 거짓말도 했어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여러분이라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로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흔히 '순종의 모범'으로 요약되지만, 정작 본문은 아브람의 두려움과 실책을 감추지 않는다. 그는 목적지도 모른 채 떠났고, 목숨이 걸리자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는 선택도 했다. 그런데도 약속은 그의 완벽함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근거해 유지된다. 기독교 전통은 이를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데 거저 주어지는 것)의 이야기로 읽어 왔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과 익숙한 것을 붙들고 있는 것, 이 둘 사이에서 무엇이 더 두려운 일일까?
창세기 12장 3절이 담은, 아브람으로 인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누리게 되리라는 이 약속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강조점이 다르게 읽혀 왔다. 유대교 전통은 이 약속을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백성과 땅에 대한 언약의 시작으로 읽는 경향이 강하다. 신약의 바울은 이 대목을 근거로(갈 3:8)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복에 참여한다고 해석한다. 두 독법 모두 이 약속이 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지향을 담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 지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통해 실현되는지에 대해서는 다르게 본다. 본문 자체는 이 물음에 직접 답하지 않은 채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