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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 예언

나훔 용서받았던 도시에 결국 도착한 청구서

한 도시가 너무 오래 이겼다. 이 책은 그 도시가 무너지는 밤을, 백 년 넘게 그 군대에 시달려 온 쪽 사람이 눈앞에서 보듯 써 내려간 글이다.

저자(전승)
엘고스 사람 나훔. 이 책 세 장 전체가 그가 본 것을 적은 글이며, 니느웨가 무너지기 전에 미리 선포한 내용이라고 본다.
저자(학계)
시의 핵심은 나훔이라는 예언자에게서 나왔다고 보되, 지금의 형태로 묶고 배열한 것은 후대의 편집 작업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특히 1장 앞부분은 히브리어 자모 순서를 따르다 중간에 흐트러지는 시여서, 원래 따로 돌던 시를 앞에 붙인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함락이 실제로 벌어진 뒤에 그 장면을 회고하며 쓴 글로 보는 견해도 소수 있으나, 2~3장의 묘사가 성이 아직 서 있는 상태를 전제한다는 반론이 함께 제시된다. 어느 쪽도 판정이 끝나지 않았다.
연대
이 글이 나온 시기는 BC 663년에서 612년 사이(약 2천 6백여 년 전)로 좁혀진다. 앗수르가 이집트 도시 테베를 무너뜨린 일(BC 663년)은 이미 지나간 사건으로 언급하고, 니느웨의 함락(BC 612년)은 아직 오지 않은 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 51년 사이 어디쯤인지를 두고는 앗수르의 힘이 아직 온전하던 BC 650년대로 보는 견해와, 제국이 흔들리기 시작한 BC 620년대로 보는 견해가 갈린다.
장 수
3

3막 요약

  1. 상황

    아주 힘이 센 나라가 있었어요. 그 나라의 가장 큰 도시가 니느웨였어요. 성벽이 높고 아주 두꺼웠어요. 군대는 세고 무서웠어요. 이 군대는 이웃 나라를 자주 쳐들어갔어요. 이기면 사람들을 끌고 갔어요. 살던 마을에서 아주 먼 곳으로요. 그렇게 사라진 나라도 있었어요. 이웃 나라 사람들은 늘 겁을 먹고 살았어요. 해마다 돈과 물건을 바쳤어요. 그래야 쳐들어오지 않았거든요. 나훔은 그 이웃 나라 사람이었어요. 힘센 쪽이 아니라 눌린 쪽이었어요. 나훔은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나쁜 짓을 한 쪽은 잘 살았어요. 당한 쪽만 계속 힘들었어요. 이게 영원히 그럴 것 같았어요.

    나훔은 유다 사람이다. 이 책의 무대는 니느웨지만, 글이 쓰인 자리는 니느웨가 아니다. 제국에 조공을 바치며 겨우 버티던 변두리 나라다. 그 시절 앗수르는 서아시아의 패권국이었고, 니느웨는 그 제국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정복 방식으로 악명이 높았다. 저항한 도시는 본보기 삼아 잔혹하게 다뤘다. 정복지 주민은 통째로 다른 지역으로 옮겨 놓았다. 공동체를 흩어 놓으면 반란을 조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북쪽 왕국은 BC 722년경 이 방식으로 지도에서 지워졌다. 남쪽 유다는 조공을 바치며 이름만 겨우 유지했다. 나훔이 견디지 못한 것은 패배 자체가 아니었다. 폭력을 쓰고도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는 힘이었다. 강한 쪽은 계속 강하고 약한 쪽은 계속 밟혔다. 그 상태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책의 첫 장은 폭풍과 지진의 이미지로 열린다. 산이 흔들리고 바다가 마르고 땅이 들린다. 이 도입부를 두고, 세계의 저울이 한 번은 움직여야 한다는 요구가 이미지로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 자주 제시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가 진노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쪽이라는 오래된 표현이 진노 묘사 바로 앞에 놓인다. 오래 참았다는 전제가 먼저 깔리고, 그 뒤에 결산이 온다는 배치다.

    니느웨는 오늘날 이라크 모술 맞은편, 티그리스강 동안에 있던 도시다. 산헤립이 BC 700년 무렵 이곳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제국의 수도로 삼았고, 이중 성벽과 인공 수로를 갖춘 고대 최대급 도시가 되었다. 요나서의 배경 시기에는 니느웨가 아직 수도가 아니었지만, 나훔이 말하는 시점에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심장부다. 두 책을 나란히 읽을 때 이 시차를 놓치면 배경 자체가 흐려진다. 앗수르의 강제 이주 정책은 왕실 비문과 부조로 상당 부분 확인된다. 저항한 도시의 처리 방식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긴 제국이었다. BC 722년경 사마리아 함락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이 소멸했고, BC 701년 산헤립의 유다 원정에서는 라기스가 함락되어 그 장면이 니느웨 왕궁 부조에 새겨졌다. 나훔이 상대하는 것은 관념적인 악이 아니라, 자기 조부 세대의 마을을 실제로 부순 군대다. 표제(1:1)는 두 가지를 겹쳐 놓는다. 하나는 '맛사'인데, 무거운 짐과 선포된 신탁을 동시에 뜻할 수 있는 낱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 글을 '환상의 책'으로 부르는 표현으로, 예언서 표제가 자기 자신을 책이라고 지칭하는 드문 사례다. 저자의 출신지로 적힌 '엘고스'는 위치가 확정되지 않았다. 갈릴리설, 유다 남부설, 후대에 형성된 모술 인근 전승 등이 병존한다. 1장 2~8절은 히브리어 자모 순서를 따라 행을 시작하는 이합체시(아크로스틱)의 흔적을 보이지만, 절반쯤에서 순서가 흐트러진다. 이를 두고 원래 완전한 아크로스틱이던 시가 전승 과정에서 훼손됐다는 견해, 처음부터 부분적으로만 의도된 형식이라는 견해, 별도로 존재하던 찬가를 편집자가 서문 삼아 붙였다는 견해가 갈린다. 1장 3절이 끌어오는 신의 성품 묘사는 출애굽기 34장 6~7절 계열의 오래된 정형 문구다. 같은 문구를 요나서 4장 2절도 인용하는데, 방향이 정반대다. 요나는 그것을 원수가 살아남은 데 대한 불평의 근거로 뒤집어 쓰고, 나훔은 오래 참은 끝의 결산이라는 근거로 쓴다. 한 전통 문구를 놓고 두 책이 서로 반대편에서 인용한다는 점은 이 두 권을 짝으로 읽는 독법의 주요 근거로 자주 언급된다. 덧붙여 '나훔'이라는 이름 자체가 위로를 뜻하는 어근에서 왔다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 위로라는 이름을 단 책이지만, 위로의 수신자는 니느웨가 아니라 니느웨에 짓밟힌 쪽이다.

  2. 사건

    나훔은 시를 썼어요. 노래처럼 짧게 쓴 글이에요. 첫 장면은 큰 폭풍이에요. 산이 흔들리고 바다가 말라요. 그다음 장면이 더 놀라워요. 니느웨가 무너지는 모습이 나와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인데도요. 전차가 거리에서 미친 듯 달려요. 강물이 성문을 밀고 들어와요. 병사들이 서로 부딪히며 넘어져요. 쌓아 둔 보물이 사방으로 흩어져요. 누군가 도망치라고 외쳐요. 그런데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아요. 나훔은 이 도시를 사자굴에 빗대요. 사자는 먹이를 물어다 굴을 채워요. 새끼들도 배불리 먹어요. 그 굴이 텅 비게 된다고 말해요.

    이 책은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면으로 밀어붙인다. 특히 2장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함락을 실황 중계처럼 그린다. 붉은 방패를 든 병사들이 몰려온다. 전차가 거리에서 미친 듯 달린다. 성문이 열리고 물이 밀려든다. 지휘관을 부르지만 대열은 이미 무너져 있다. 쌓아 둔 보물이 흩어지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문장이 짧게 끊어지며 속도가 붙는 구간이라, 번역으로 읽어도 급박함이 전해진다. 1장 끝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하나 끼어 있다. 산을 넘어 좋은 소식을 들고 달려오는 전령의 발이다. 유다 쪽에서 보면 이 소식은 제국이 무너졌다는 통지다. 같은 사건이 한쪽에는 파국이고 다른 쪽에는 해방이라는 구도가 이 한 절에 압축되어 있다. 심판시 한복판에 피난처 이미지가 한 절 놓이는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니느웨를 향해 말하지만, 실제로 읽는 사람은 짓밟혀 온 쪽이다. 2장 끝의 비유는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다. 니느웨는 사자굴로 그려진다. 사자가 먹이를 물어다 굴을 채우고 새끼를 먹인다. 약탈로 쌓아 올린 번영을 정확히 겨냥한 그림이다. 그리고 그 굴이 텅 비게 되리라고 말한다.

    2장의 함락 묘사는 히브리 시 가운데 속도감이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짧은 명령형과 명사구를 이어 붙여 숨 가쁜 리듬을 만들고, 3장 2절처럼 채찍 소리와 바퀴 소리, 말발굽 소리를 나열하는 대목은 소리 자체를 묘사에 동원한다. 원문의 자음 반복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번역으로 거의 옮겨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오래 있었다. 성문이 열리고 물이 밀려든다는 2장 6절의 이미지는 실제 함락 정황과 연결해 읽히기도 한다. 후대 그리스 저술가 디오도로스가 전하는 기록에는 강물이 불어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는 대목이 있다. 다만 이는 함락으로부터 수백 년 뒤의 전승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함락 사실 자체는 바벨론 쪽 연대기 문서에 기록되어 있어, 성경 바깥에서 확인되는 드문 사건에 속한다. 1장 15절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2장 1절에 해당한다. 장 구분이 번역본마다 한 절씩 어긋나는 구간이므로, 다른 번역본을 함께 보는 경우 혼선이 생길 수 있다. 이 절은 이사야 52장 7절과 표현이 매우 유사하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아니면 둘 다 당시 널리 알려진 전령 이미지의 관용 표현을 가져온 것인지는 결론이 나 있지 않다. 사자 은유(2:11~13)는 상대의 상징을 되받아치는 장치로 읽힌다. 앗수르 왕실은 사자 사냥 장면을 궁전 부조의 핵심 소재로 삼았고, 사자는 왕권과 무력을 나타내는 대표 이미지였다. 나훔은 그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 사냥하는 주체가 아니라 굴이 비어 버린 쪽으로 위치를 바꿔 놓는다. 2장의 시제 처리도 논의 대상이다. 히브리어 동사 체계에서 미완료와 완료의 구분은 시간보다 상태에 가깝게 작동하는 경우가 있어, 이 장면들을 예고로 읽을지 이미 벌어진 일의 회고로 읽을지가 문법만으로는 확정되지 않는다. 함락 이후에 쓰인 글로 보는 소수 견해는 이 점을 근거로 든다.

  3. 결과

    마지막 장에 다른 도시 이야기가 나와요. 아주 크고 부유한 도시였어요. 강이 둘러싸고 있어서 안전해 보였어요. 성벽도 튼튼했어요. 그런데 그 도시도 무너졌어요. 누가 무너뜨렸을까요? 바로 니느웨였어요. 나훔이 묻습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이 다르냐고요. 책은 짧은 말로 끝나요. 이 도시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요.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에요. 오히려 손뼉을 칠 거라고 해요. 그만큼 미움을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얼마 뒤 니느웨는 정말 무너졌어요. 성은 다시 세워지지 않았어요.

    3장에서 나훔은 못을 박는다. 이집트의 큰 도시 테베를 꺼내 드는 것이다. 나일강이 둘러싸고 방벽이 튼튼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것 같던 도시였다. 그런데 그 도시는 무너졌다. 무너뜨린 쪽이 바로 니느웨였다. 나훔의 논리는 단순하다. 네가 부순 도시도 그랬는데, 너는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승전가가 아니라 조롱에 가깝다. 이 도시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이 손뼉을 칠 거라고 말한다. 슬퍼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제국이 얼마나 오래 미움을 쌓아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 셈이다. 실제로 니느웨는 BC 612년,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함락됐다. 앗수르는 몇 년 더 버티다 소멸했고, 도시는 다시 수도로 회복되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이 함락 전에 쓰였는지 직후에 쓰였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린다. 여기서 반드시 함께 놓아야 할 책이 요나서다. 요나서에서 니느웨는 경고를 듣고 태도를 바꿔 살아남는다. 나훔서는 백 년 넘게 지난 시점의 같은 도시를 다룬다. 한 번 유예된 것이 영원한 면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성경은 같은 도시에 대해 살 수 있었다는 기록과 끝내 무너졌다는 기록을 둘 다 남겨 두었다. 어느 한쪽만 읽으면 그림이 절반만 남는다.

    3장 8~10절이 거론하는 '노아몬'은 이집트 상류의 테베다. 앗수르바니팔이 이끄는 앗수르군이 BC 663년 이 도시를 함락하고 약탈했으며, 당대 세계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됐다. 나훔은 그 사건을 거울처럼 들이댄다. 논증 구조가 명확하다. 지리적 방어와 동맹이라는 조건에서 테베가 니느웨보다 못하지 않았고, 결과는 함락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이 책의 하한 연대를 BC 663년으로 고정해 준다. 3장 4~6절은 현대 독자에게 가장 불편한 구간이다. 니느웨를 유혹하는 여성에 빗대고, 그 옷을 벗겨 사람들 앞에 세우는 수치 형벌의 이미지를 쓴다. 이를 두고 두 갈래 논의가 있다. 한쪽은 고대 근동에서 도시를 여성으로 의인화하는 것이 널리 쓰인 관습이었고, 여기서 겨냥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남을 유혹해 착취한 제국의 교역·외교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쪽은 그 설명과 무관하게 본문이 사용하는 이미지가 성폭력의 언어이며, 해방을 말하는 책이 억압의 언어를 재생산한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고 본다. 후자는 20세기 후반 이후 여성주의 성서 해석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오늘날 주석서들은 대체로 두 논의를 함께 소개한다. 이 책 전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해석이 갈린다. 첫째, 억압당한 쪽에서 나온 정의 요구의 시로 읽는 독법이다. 화자는 승자가 아니라 백 년 넘게 제국의 군대에 시달린 소국 사람이며, 가해자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는 견딜 수 없다는 감정이 이 글의 동력이라고 본다. 20세기 이후 피억압 공동체의 성서 읽기에서 널리 지지된 관점이다. 둘째, 민족주의적 복수시로 보아 비판적 거리를 두는 독법이다. 19세기 이래 일부 학자들은 나훔이 자기 민족의 원한을 신의 뜻으로 승격시켰다고 평가했고, 원수를 향한 태도에서 요나서나 예레미야와 대비된다고 지적한다. 셋째, 정경 전체의 배치 안에서 읽는 독법이다. 요나서와 나훔서를 함께 남긴 편집 자체가 하나의 진술이며, 자비와 결산 어느 한쪽만으로는 성경의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본다. 넷째, 니느웨를 특정 도시가 아니라 폭력적 제국 권력 일반의 상징으로 읽는 독법이다. 이 관점은 신약 요한계시록의 바벨론 심상과의 연속성을 함께 지적한다. 이 앱은 어느 독법이 옳다고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화자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어느 쪽으로든 오독하기 쉽다는 점은 네 입장이 대체로 공유한다. 해석사에서 눈여겨볼 자료로 사해문서 가운데 나훔 주석(4QpNah)이 있다. 쿰란 공동체는 나훔서의 사자굴 이미지를 자기 시대의 정치 세력에 적용해 읽었다. 고대 독자들 역시 이 책을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당대의 권력을 향한 텍스트로 다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구조 나누기

  1. 1:1-8폭풍처럼 다가오는 신 — 산이 흔들리고 바다가 마르는 도입부
  2. 1:9-15수신자가 둘인 구간 — 한쪽에는 끝, 다른 쪽에는 산을 넘어오는 소식
  3. 2:1-10함락 실황 중계 — 붉은 방패, 달리는 전차, 열린 성문과 흩어지는 보물
  4. 2:11-13텅 빈 사자굴 — 먹이를 물어다 채우던 굴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5. 3:1-7피의 도시라는 고발 — 약탈로 쌓은 번영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구간
  6. 3:8-19테베라는 거울, 그리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마지막 문장

핵심 구절 (자체 풀이)

  • 나 1:1책의 수신자와 성격을 첫 절에서 못박는 표제. 이 글이 니느웨를 향한 것임을 밝히고, 자기 자신을 '책'이라고 부르는 드문 예언서 표제이기도 하다.
  • 나 1:3무서운 진노 묘사가 쏟아지기 직전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쪽이라는 오래된 성품 표현을 먼저 놓는 자리. 요나서 4장 2절이 같은 계열의 문구를 불평의 근거로 뒤집어 쓴 것과 정확히 반대 방향이다.
  • 나 1:7심판시 한복판에 피난처 이미지가 한 절 끼어드는 대목. 이 책의 실제 독자가 니느웨가 아니라 니느웨에 시달려 온 쪽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 나 1:15산을 넘어 좋은 소식을 들고 달려오는 전령의 발을 그리는 절. 같은 사건이 한쪽에는 파국이고 다른 쪽에는 해방이라는 구도가 압축되어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2장 1절에 해당한다.
  • 나 2:11-12니느웨를 사자굴에 빗대는 대목. 먹이를 물어다 굴을 채우고 새끼를 먹이던 짐승의 그림으로 약탈이 떠받친 번영을 겨냥한 뒤, 그 굴이 비게 되리라고 말한다. 사자는 앗수르 왕실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데 즐겨 쓰던 상징이었다.
  • 나 3:8니느웨 자신이 무너뜨렸던 이집트 도시 테베를 거울처럼 들이대는 자리. 강이 둘러싸고 방벽이 튼튼했던 그 도시와 비교하며, 너는 무엇이 다르냐고 되묻는 구조다.
  • 나 3:19책을 닫는 마지막 절. 이 제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슬퍼하기는커녕 손뼉을 칠 것이라고 말한다. 오래 쌓인 미움의 총량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결말이다.

등장인물

nahum

이 책의 가르침

  • 폭력을 쓰고도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는 힘은 없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제국의 몰락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오래 미뤄졌던 결산으로 그려진다.
  • 진노를 감정 폭발이 아니라 오래 참은 끝의 결과로 배치한다. 무서운 이미지가 쏟아지기 전에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표현이 먼저 놓이는 순서 자체가 이 책의 논리다.
  • 위로의 대상이 누구인지가 분명하다. 이 글은 강자에게 회개를 권하는 설득문이 아니라, 짓밟힌 쪽을 향해 이 상태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는 글이다.
  • 요나서와 나란히 놓일 때 비로소 균형이 생긴다. 같은 도시에 대해 살아남은 기록과 무너진 기록을 둘 다 보존한 편집 자체가 하나의 진술로 읽힌다.
  • 힘의 정점에 있을 때 몰락이 시작될 수 있다는 역사 감각을 보여준다. 이 글이 쓰일 무렵 니느웨는 여전히 당대 최강의 도시였다.

흔한 오해

요나서와 나훔서는 서로 모순된다. 한쪽은 니느웨가 용서받았다고 하고 다른 쪽은 멸망한다고 하니 둘 중 하나는 틀렸다.

두 책은 같은 도시의 서로 다른 시점을 다룬다. 요나서의 배경과 나훔의 시점 사이에는 백 년 이상의 간격이 있다. 한 번 유예된 것이 영원한 면제는 아니었다는 구도로 읽는 독법이 일반적이다. 성경 편집자들이 두 기록을 모두 남겨 둔 것 자체를 하나의 진술로 보는 견해도 널리 받아들여진다.

나훔은 유다의 멸망을 예고한 책이다.

이 책의 심판 대상은 앗수르, 그중에서도 수도 니느웨다. 유다를 향해서는 오히려 곧 풀려난다는 쪽으로 말한다. 유다 자신의 파국을 다루는 것은 다음 세대인 하박국과 스바냐다.

적국의 파괴를 노래하는 책이니 읽을 가치가 없거나, 반대로 원수를 향한 미움을 그대로 정당화해 주는 책이다.

이 책의 독법은 하나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억압당한 쪽에서 나온 정의 요구의 시로 읽는 관점, 민족주의적 복수시로 보아 비판적 거리를 두는 관점, 요나서와 짝으로 놓고 정경 전체에서 균형을 잡는 관점, 니느웨를 폭력적 권력 일반의 상징으로 읽는 관점이 모두 유지되고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화자가 승자가 아니라 백 년 넘게 그 군대에 시달린 쪽이라는 위치 확인이 먼저라는 점은 대체로 공유된다.

나훔 시대에도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가 아니었다.

요나서의 배경 시기에는 수도가 아니라 대표적 대도시였지만, 나훔이 말하는 BC 7세기에는 니느웨가 실제 제국의 수도였다. 산헤립이 BC 700년 무렵 이곳을 확장해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두 책 사이에 도시의 지위가 달라졌다는 점을 놓치면 배경이 흐려진다.

나훔은 요나처럼 니느웨에 직접 찾아가 외쳤다.

본문에는 그가 니느웨로 갔다는 서술이 없다. 이 글은 유다에서 니느웨를 향해 쓴 시이며, 실제로 읽고 들은 쪽은 제국에 눌려 살던 유다 사람들이었다고 보는 이해가 일반적이다.

니느웨는 그 뒤에도 계속 큰 도시로 남았다.

BC 612년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에 함락된 뒤 니느웨는 수도로 회복되지 않았다. 앗수르 제국도 몇 년 안에 소멸했다. 이 함락은 바벨론 쪽 기록으로도 확인되는 사건이다.

읽는 요령

세 장뿐이라 30분이면 다 읽는다. 그런데 짧다고 쉬운 책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압축된 시라서, 설명해 주는 문장이 거의 없고 장면만 연달아 지나간다. 솔직히 말하면 1장 앞부분(2~8절)에서 많이 막힌다. 산·바다·불·바위 같은 이미지가 쉬지 않고 쏟아지는데 무슨 상황인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읽을 땐 이 구간을 훑고 넘어가도 된다. 2장부터 읽기 시작하면 함락 장면이 영화처럼 이어져서 훨씬 잘 붙는다. 그 뒤에 1장으로 돌아오면 그 이미지들이 무엇을 예고한 것이었는지 보인다. 요나서를 먼저 읽고 오기를 권한다. 네 장짜리라 금방 읽히고, 두 책이 같은 도시를 정반대 방향에서 다루기 때문에 나훔서의 무게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반대 순서로 읽어도 상관없지만, 둘 중 하나만 읽으면 그림이 절반만 남는다. 미리 알아둘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3장 8절의 '노아몬'은 이집트 도시 테베다. 각주가 없는 성경에서는 무슨 도시인지 알 수 없어 논리 전체가 안 잡히니, 그 대목만은 각주가 달린 판본으로 보는 편이 낫다. 둘째, 3장 4~6절은 도시를 여성에 빗대어 옷을 벗기는 수치 형벌의 이미지를 쓴다. 오늘 읽으면 불편할 수 있고, 그 불편함을 두고 실제로 해석이 갈린다. 미리 알고 읽는 편이 낫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다가 잔혹하다는 느낌이 들면 그 느낌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 그 지점이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논의된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