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 예언
하박국 — 따져 묻는 항의에서, 답 없이도 버티는 노래로
법은 힘 있는 쪽으로 굽었고, 억울한 사람이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한 사람이 하늘을 향해 따졌는데, 돌아온 대답이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 저자(전승)
- 책 첫머리에 이름이 적힌 예언자 하박국. 이 세 장이 그의 항의와 기도를 그대로 옮긴 기록이라고 본다. 다만 그가 어디 사람인지, 어느 집안인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는 본문이 전혀 밝히지 않는다. 3장 끝에 붙은 악기·지휘 지시를 근거로 그를 성전에서 노래를 맡던 사람으로 추정하는 전승도 있다.
- 저자(학계)
- 1~2장의 항의·응답 부분과 3장의 기도시를 서로 다른 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사해 근처 쿰란에서 나온 하박국 주석서가 1~2장만 다루고 3장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반면 3장도 처음부터 한 작품의 결말이었고, 주석서가 3장을 뺀 것은 그 공동체의 관심사 때문이라고 보는 입장이 함께 유지된다. 2장 후반의 탄식 목록을 뒷 세대의 확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어느 쪽도 결론이 난 문제가 아니다.
- 연대
- 바벨론이 새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유다가 그 그늘에 들어가던 BC 609~598년경(약 2천 6백 년 전)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다. 책 안에서 바벨론(갈대아)이 '이제 일으킬' 세력으로 그려지고 아직 유다를 삼키지는 않았다는 점이 근거다. 다만 앗수르가 아직 강했던 BC 7세기 중반으로 올려 잡는 견해, 3장만 훨씬 뒤에 붙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 학설이 갈린다. 확실한 것은 유다가 실제로 무너지기 전, 파국을 미리 내다본 자리에서 나온 글이라는 점이다.
- 장 수
- 3장
3막 요약
상황
아주 오래전에 하박국이라는 사람이 살았어요. 그 나라에는 나쁜 일이 많았어요.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혔어요. 억울한 사람이 울어도 아무도 돕지 않았어요. 하박국은 그 모습을 보고 참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하늘을 보고 크게 물었어요. 왜 보고만 계시냐고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요. 성경에는 신의 말을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하박국은 반대로 시작했어요. 사람이 신에게 먼저 따진 거예요.
이 책은 성경에서 보기 드문 방향으로 시작한다. 예언자는 보통 신의 말을 사람에게 전하는 쪽이다. 그런데 하박국은 첫 문장부터 신에게 따진다. 그가 살던 때의 사정은 이렇다. 바깥에서는 오랫동안 이 지역을 짓누르던 앗수르 제국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좀 나아지려나 싶었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바벨론이 채웠다. 지금의 이라크 남부에서 일어난 나라인데, 앗수르보다 더 강했다. 곧 유다를 두 차례 침공하고 결국 예루살렘을 불태우게 되는 세력이다. 나라 안쪽도 성하지 않았다. 재판은 힘 있는 쪽으로 굽었고, 법은 있으나 마나 했다. 억울한 사람이 소리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박국의 첫 항의는 바로 이 국내 문제를 겨눈다. 언제까지 소리쳐야 들으시겠느냐, 왜 이 폭력을 보고만 계시느냐는 물음이다. 예의를 갖춘 질문이 아니라 화가 난 사람의 말투다. 그리고 그 말투가 그대로 성경 본문이 되었다.
하박국 1장 1절은 이 책을 '마사'(mᵃśśāʾ), 곧 '짊어진 짐' 또는 '선포'로 소개한다. 나훔·말라기 등 다른 예언서 표제에도 쓰이는 용어이지만, 뒤이어 나오는 것이 신탁 선포가 아니라 예언자 본인의 항의라는 점에서 이 책의 형식은 예언서 안에서 이질적이다. 형식 비평에서는 1~2장을 예언 신탁이 아니라 시편의 개인 탄식시(complaint) 양식이 예언서 안으로 들어온 사례로 분류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1장 2절의 '어느 때까지'(ʿad-ʾānâ)는 시편 탄식시의 정형 어구다. 연대 문제의 핵심은 1장 6절의 '갈대아 사람'(카스딤)이다. 이 표현을 바벨론 신바빌로니아 제국으로 읽는 것이 압도적 다수이며, 그럴 경우 앗수르의 니느웨가 함락된 BC 612년과 갈그미스 전투 이후 바벨론이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장악한 BC 605년 전후, 곧 요시야 사후 여호야김 치세(BC 609~598)가 유력한 배경으로 지목된다. 19세기 말 두름(B. Duhm)은 본문을 '깃딤'(그리스·마케도니아)으로 수정해 알렉산드로스 시대로 내려 잡자고 제안했으나, 오늘날 이 수정안을 따르는 학자는 거의 없다. 1장 2~4절이 고발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논의가 갈린다. 유다 내부의 부패한 지배층으로 보는 독법이 다수이지만, 이미 침입한 외세로 보는 독법도 있다. 전자를 따르면 1장 5~11절의 응답, 곧 '그 문제를 바벨론으로 처리하겠다'는 답이 왜 예언자를 더 곤란하게 만드는지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예언자 이름 '하바쿠크'의 어원도 확정적이지 않다. 히브리어 동사 '하바크'(껴안다)와 연결하는 전통적 설명과, 아카드어의 식물 이름 '함바쿠쿠'에서 왔다고 보는 설명이 함께 제시된다.
사건
놀랍게도 대답이 돌아왔어요. 아주 무서운 나라를 보내겠다는 말이었어요. 그 나라 이름은 바벨론이에요. 하박국은 더 놀랐어요. 바벨론은 훨씬 더 나쁜 나라였거든요. 그래서 다시 물었어요. 나쁜 사람을 벌하려고 더 나쁜 사람을 쓰시냐고요. 그물로 물고기를 쓸어 담듯 사람들을 잡아가는 나라인데요. 이번에는 그냥 기다리지 않았어요. 높은 망대에 올라가 섰어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안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 대답이 왔어요.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말이었어요. 하지만 정해진 때가 있다고 했어요. 조금 늦어 보여도 꼭 온다고 했어요.
대답은 온다. 그런데 그 대답이 문제를 더 키운다. 돌아온 답은 바벨론을 일으켜 이 일을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하박국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되받는다. 나쁜 쪽을 벌하겠다면서 더 나쁜 쪽을 쓰시느냐는 항의다. 그는 바벨론을 어부에 빗댄다. 그물을 던져 사람들을 물고기처럼 쓸어 담고, 그 그물 앞에 절하며 제 힘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답이 그를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책은 질문이 한 번에 정리되는 구조가 아니다. 답을 듣고 더 답답해진 사람의 기록이다. 그다음 장면이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다. 하박국은 성벽 위 망대에 올라가 선다. 무슨 말이 오는지 보겠다는 것이다. 항의하고 돌아서는 대신 자리를 지키겠다는 태도다. 두 번째 답은 즉각적인 해결이 아니었다. 크게 써서 누구나 달려가며 읽게 하라는 지시가 먼저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이 환상에는 정해진 때가 있고, 더뎌 보여도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이 나란히 놓인다. 자기 힘에 기대는 쪽은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흔들리지 않는 신뢰에 의지하는 쪽은 살아남는다(합 2:4). 이 짧은 한 문장이 뒷날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 구절 중 하나가 된다. 2장 후반은 착취로 부를 쌓은 자들을 향한 다섯 개의 탄식으로 이어진다. 남의 피로 도시를 세운 자, 이웃을 취하게 만들어 망신 주는 자, 나무와 돌로 만든 것 앞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자가 차례로 호명된다. 심판의 도구로 쓰인다는 바벨론도 결국 이 목록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 대목의 논리다.
1장 5~11절의 응답은 예언자의 문제 제기를 해소하지 않고 오히려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서사적으로 계산된 배치다. 1장 12~17절의 두 번째 항의는 신정론의 고전적 형태를 취한다. 악을 차마 보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존재가 어떻게 더 악한 세력이 덜 악한 쪽을 삼키는 것을 잠잠히 보고 있느냐는 물음(1:13)이다. 어부와 그물의 은유(1:14~17)는 제국이 자기 군사력 자체를 숭배 대상으로 삼는 상황을 겨냥하며, 앗수르·바벨론 왕실 비문의 자기 과시 수사와 대비해 읽히기도 한다. 2장 1절의 망대(미쉬메레트) 장면은 예언자의 자기 이해를 보여 주는 구절로 자주 다뤄진다. 파수꾼 이미지는 이사야 21장, 에스겔 3장·33장에도 나타나며, 여기서는 응답을 받는 수동적 위치가 아니라 응답을 기다려 붙드는 능동적 태도로 그려진다. 2장 2~4절이 이 책의 신학적 중심으로 꼽힌다. 2절의 '판에 새겨 달려가며 읽게 하라'는 지시는 공적 게시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독법이 일반적이나, '읽는 자가 달려가게 하라'로 옮겨 전령의 전달을 가리킨다는 독법도 있다. 3절은 '모에드', 곧 지정된 때라는 개념을 제시해 즉각적 응답 대신 시간의 지평을 도입한다. 4절의 수용사는 성경 해석사에서 손꼽히게 두껍다. 히브리어 '에무나'는 '믿음'뿐 아니라 '신실함·꾸준함·믿을 만함'을 함께 담는 낱말이어서, 원 문맥에서는 신뢰의 자세와 그것을 유지하는 지속성 양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그리스어 70인역 계열 사본 일부는 이 대명사를 1인칭으로 옮겨 '나(=신)의 신실함으로'라는 뜻이 되게 하며, 히브리서 10장 38절은 이 계열을 따른다. 쿰란의 하박국 주석서(1QpHab)는 이 구절을 그 공동체의 스승에 대한 충실함으로 재해석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과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서 이 구절을 인용해 '피스티스'(믿음/신실함)를 자기 논증의 축으로 삼는데, 히브리어 문장에서 '에무나'가 '의인'에 걸리는지 '산다'에 걸리는지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진다는 통사 논쟁이 남아 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이 구절을 읽어 낸 방식이 종교개혁의 출발점 중 하나로 이야기되며, 이후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은 이 구절을 각각 다른 무게로 읽어 왔다. 2장 6~20절의 다섯 '호이'(화 있을진저) 탄식은 예언서에 정형화된 장례 애가 양식을 차용한 고발 형식이다. 각 단락이 대체로 세 절씩 대칭을 이루는 구성이라 후대의 정돈된 편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14절은 이사야 11장 9절과 거의 같은 문구를 공유하며, 20절은 소란한 항의로 시작한 책이 침묵의 요구로 방향을 트는 전환점 역할을 한다.
결과
마지막 3장은 노래예요. 하박국은 옛날 이야기를 떠올려요. 힘센 분이 오시는 무서운 장면이 나와요. 그걸 그리면서 하박국은 몸이 떨렸다고 적었어요. 무섭지 않은 척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주 이상한 말로 끝을 맺어요. 나무에 열매가 하나도 없어도 좋다고요. 우리 안에 양이 한 마리도 없어도 괜찮다고요. 그래도 나는 기뻐하겠다고요. 일이 잘 풀려서 한 말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거든요. 바뀐 건 하박국의 마음이었어요. 이 책은 문제가 풀리지 않은 채로 끝나요. 그게 이 책의 특별한 점이에요.
3장에서 책은 갑자기 시로 바뀐다. 형식도 달라진다. 노래 제목처럼 보이는 표시가 붙고, 중간에 쉼표 같은 기호가 들어가고, 마지막에는 악기와 지휘에 대한 지시까지 붙는다. 예배에서 부르던 노래의 흔적이다. 내용은 옛일을 불러오는 장면이다. 산이 흔들리고 강이 갈라지는 이미지로, 과거에 이 백성을 건져 냈다고 전해지는 일들을 소환한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 장면 앞에서 자기가 떨었다고 적는다. 담대해졌다는 보고가 아니다. 무서워하면서도 그 자리에 남았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절이 온다. 수확도 가축도 하나도 남지 않은 최악의 상황을 조목조목 늘어놓은 뒤, 그래도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상황이 좋아져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책 어디에도 문제가 해결됐다는 보고는 없다. 부패한 지배층은 그대로고, 바벨론은 여전히 오고 있다. 바뀐 것은 화자의 태도뿐이다. 실제 역사에서 그가 두려워한 일은 일어났다. 바벨론은 유다를 침공했고, BC 586년경 예루살렘과 성전은 무너졌다. 그리고 그 바벨론도 반세기 남짓 뒤 페르시아에게 무너진다. 2장이 말한 '심판의 도구도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문장은 그렇게 확인된 셈이다. 이 책이 성경 안에서 하는 일은 분명하다. 답이 오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정리하지 않은 채로 남겨 둔다. 답답한 사람의 말이 그대로 실려 있다는 점에서 욥기, 그리고 시편의 탄식시들과 같은 계열에 놓인다.
3장은 형식상 독립된 기도시다. 표제(3:1)에 '시기오놋에 맞춘'이라는 음악 용어가 붙는데, 같은 계열의 낱말이 시편 7편 표제에도 나온다. 본문 중간에 '셀라'가 세 번 등장하고, 마지막 절(3:19)에는 지휘자와 현악기에 대한 지시가 붙는다. 모두 시편 표제·본문에서 익숙한 요소이며, 이 시가 예배에서 실제로 사용됐음을 시사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내용상으로는 '신현 현현'(theophany) 양식에 속한다. 남쪽 데만·바란 산지에서 등장하는 신의 이미지는 신명기 33장 2절, 사사기 5장 4~5절, 시편 68편과 어휘·구도를 공유하며, 시내산 전승과 연결된 고대 시 계열로 분류된다. 그래서 3장을 하박국 당대의 창작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오래된 찬가를 가져다 쓴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대로 앞 두 장의 문제 제기에 대한 의도된 응답으로 배치된 결말이라고 보는 견해도 유지된다. 본문 상태는 구약에서도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 3장 여러 곳의 히브리어 본문이 훼손되었거나 이해가 어려워 번역본마다 차이가 크며, 70인역의 하박국 3장은 마소라 본문과 상당히 다른 형태를 보인다. 3장 2절과 13절의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가 왕을 가리키는지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지도 논의가 갈린다. 16절과 17~19절의 관계가 이 책의 결론이다. 예언자는 자기 몸이 떨리고 힘이 빠졌다고 진술한 뒤, 침략자가 올라오는 날을 조용히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마지막 세 절은 농경·목축 경제가 완전히 붕괴한 상태를 여섯 항목에 걸쳐 열거한 뒤 기뻐하겠다는 선언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사용된 구문은 조건절('비록 ~할지라도')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며, 상황의 개선이 아니라 상황과 무관한 태도의 전환을 명시한다. 신정론 논의에서 이 결말은 흔히 '해답 없는 해결'로 규정되며, 욥기 38~42장의 신적 발언이 질문의 틀 자체를 바꾸는 방식과 자주 비교된다. 두 책 모두 제기된 물음에 논리적 답변을 제공하지 않은 채 화자의 위치 변화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같은 계열로 다뤄진다. 한편 외경 '벨과 용'에는 하박국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사자굴에 갇힌 다니엘에게 음식을 옮겨다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의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후대의 전설적 확장이며, 하박국서 본문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구조 나누기
- 1:1-4장첫 번째 항의 — 언제까지 보고만 계십니까
- 1:5-11장뜻밖의 대답 — 바벨론을 일으키겠다
- 1:12-2:1장두 번째 항의와 망대 — 더 나쁜 쪽을 쓰신다고요, 답을 들을 때까지 서 있겠습니다
- 2:2-5장두 번째 대답 — 정해진 때가 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
- 2:6-20장다섯 개의 탄식 — 착취로 쌓은 부를 향한 연속 고발
- 3:1-19장기도시 — 떨면서도 남는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아도
핵심 구절 (자체 풀이)
- 합 1:2-3책의 첫 발언이 찬양도 신탁도 아닌 항의라는 점이 이 대목의 핵심이다. 얼마나 더 소리쳐야 들어 주느냐, 왜 이 폭력과 다툼을 그냥 보고 계시느냐고 예언자가 정면으로 따진다.
- 합 1:6돌아온 첫 대답이 놓인 자리.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갈대아 사람, 곧 바벨론이라는 사납고 성급한 세력을 일으키겠다는 통보다. 예언자가 기대한 종류의 답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이 뒤이어 드러난다.
- 합 1:13두 번째 항의의 핵심 문장. 악을 차마 보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존재가, 어떻게 더 악한 쪽이 덜 악한 쪽을 삼키는 장면을 잠자코 보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신정론이라는 주제가 성경 안에서 가장 날카롭게 제기되는 지점 중 하나로 꼽힌다.
- 합 2:1항의한 사람이 돌아서지 않고 성벽 위 망대에 올라가 서는 장면. 무슨 대답이 오는지, 자기 항의에 뭐라고 하실지 보겠다는 태도다. 질문을 던지고 자리를 지키는 이 자세가 이 책의 형태를 결정한다.
- 합 2:3즉각적인 해결 대신 시간의 관점이 주어지는 대목. 이 환상에는 정해진 때가 있고, 더뎌 보여도 그때가 되면 온다는 답이다. 지금 고쳐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 합 2:4두 종류의 사람을 나란히 세우는 한 문장이다. 한쪽은 자기 힘과 성공에 기대다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다른 한쪽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에 의지해 살아남는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낱말은 '믿음'과 '신실함·꾸준함'을 함께 담고 있어서, 이 문장을 어느 쪽으로 읽느냐가 뒷날 신약과 종교개혁을 관통하는 논쟁의 출발점이 된다.
- 합 2:12-14남의 피와 죄로 도시를 세운 자를 향한 탄식 뒤에, 언젠가 바다가 물로 가득하듯 온 땅이 신에 대한 앎으로 채워지리라는 전망이 붙는다. 고발 한복판에 놓인 이 그림이 2장의 방향을 바꾼다.
- 합 2:20나무와 돌로 만든 것 앞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일을 지적한 뒤, 온 땅이 잠잠할 것을 요구하며 2장이 닫힌다. 소란한 항의로 시작한 책이 침묵 쪽으로 방향을 트는 전환점이다.
- 합 3:16-19예언자가 자기 몸이 떨리고 힘이 빠졌다고 먼저 적은 뒤에 오는 결말. 수확도 가축도 하나 남지 않은 최악의 상황을 조목조목 열거하고서도 기뻐하겠다고 선언한다. 상황이 나아졌다는 보고가 아니라, 나아지지 않아도 버티겠다는 말이라는 점이 이 책 전체의 결론이다.
등장인물
이 책의 가르침
- 신에게 따지는 말이 불경으로 처리되지 않고 성경 본문 자체가 되었다. 이 책은 항의와 의심을 신앙 바깥의 일로 밀어내지 않는 전통이 성경 안에 있다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 '왜 악한 자가 잘 되는가'라는 물음에 즉답 대신 시간의 관점이 주어진다. 지금 고쳐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정해진 때가 있으니 기다리라는 쪽에 가깝다.
- 심판의 도구로 쓰인 세력도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바벨론을 향한 다섯 탄식이 그 논리를 보여 준다.
- 항의한 사람이 돌아서지 않고 망대에 올라가 기다린다. 질문을 던지고 자리를 지키는 태도 자체가 이 책이 제시하는 한 가지 답이다.
- 마지막 고백은 상황 개선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상황과 무관하게 버티겠다는 선언이다. 문제가 풀리지 않은 채로 끝나는 결말이 이 책의 특징이다.
흔한 오해
❌하나님께 따지고 원망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박국은 항의로 책을 열고, 답을 듣고도 다시 되받아친다. 그 항의가 편집으로 다듬어지지 않고 그대로 성경에 실렸다. 시편의 탄식시들과 욥기도 같은 계열에 놓인다. 성경 안에 항의와 탄식의 전통이 뚜렷하다는 것이 이 책을 다루는 연구에서 널리 지적되는 점이다.
❌하박국의 질문은 마지막에 시원하게 해결된다.
⭕부패한 지배층 문제도, 바벨론이 오고 있다는 사실도 책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다. 3장의 마지막은 모든 것이 텅 빈 상태를 열거한 뒤에 나오는 말이다. 바뀐 것은 상황이 아니라 화자의 태도다.
❌하박국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뒤에 쓰인 책이다.
⭕유다가 아직 서 있던 시기, 바벨론이 새 강대국으로 떠오르던 무렵의 글로 보는 견해가 다수다. 본문에서 바벨론은 '이제 일으킬' 세력으로 그려지며 아직 유다를 삼키지 않았다. 파국 이후의 회고가 아니라, 파국을 앞두고 미리 내다본 자리에서 나온 글이다.
❌합 2:4는 처음부터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쓰인 문장이다.
⭕히브리어 원문의 낱말은 '믿음'과 '신실함·꾸준함'을 함께 담고 있어, 본래 문맥에서는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태도 쪽에 무게가 실린다는 이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이 문장에 새로운 무게가 실린 것은 신약의 바울이 인용하면서부터이고, 16세기 종교개혁이 이를 다시 읽으면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약 구절 중 하나가 됐다. 오늘날 개신교는 대체로 이 구절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진다는 교리와 연결해 읽고, 로마가톨릭은 믿음을 출발점으로 보되 그 믿음이 삶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함께 강조해 읽는다. 유대교 전통은 원 문맥의 '신실함' 쪽으로 읽는다. 이 책 자체는 어느 해석이 옳은지 판정하지 않는다.
❌하박국은 사자굴에 갇힌 다니엘에게 밥을 날라다 준 사람이다.
⭕그런 장면은 하박국서가 아니라 외경 '벨과 용'에 나온다. 후대에 덧붙여진 전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하박국서 세 장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이 책의 하박국에 대해 본문이 알려 주는 개인 정보는 사실상 이름뿐이다.
읽는 요령
세 장뿐이라 20분이면 다 읽는다. 이 책은 통독할 때 오히려 손해를 보는 쪽이니, 짧다고 대충 넘기지 말고 '누가 말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며 읽는 편이 낫다. 1~2장은 사람과 신이 주고받는 대화 구조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 대부분은 화자가 바뀌는 지점을 따로 표시하지 않아서, 처음 읽으면 누가 하는 말인지 헷갈린다. 순서만 기억하면 된다. 항의(1:2-4) → 대답(1:5-11) → 다시 항의(1:12-17) → 기다림(2:1) → 대답(2:2-5). 이 다섯 덩어리에 연필로 표시해 두고 읽으면 책이 갑자기 또렷해진다. 2장 6~20절의 다섯 탄식은 비슷한 문장이 반복되는 구간이라, 처음 읽을 땐 훑고 지나가도 줄거리가 끊기지 않는다. 다만 12~14절은 흐름이 한 번 뒤집히는 자리라 그 부분만 챙겨 두면 좋다. 솔직히 3장은 처음 읽으면 당황스럽다. 앞의 대화와 문체가 완전히 다르고, 산이 흔들리고 강이 갈라지는 이미지가 설명 없이 쏟아진다. 번역본마다 문장이 꽤 다른 것도 원문 상태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처음이라면 3장은 16~19절만 읽어도 된다. 앞부분은 나중에 각주가 달린 성경으로 다시 보면 그때 보인다. 고통이나 답 없는 상황이 지금 자기 문제인 사람이라면, 욥기와 나란히 읽기를 권한다. 두 책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지고, 두 책 모두 그 질문에 논리적인 답을 주지 않은 채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