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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 예언

스바냐 모든 것을 쓸어 내는 날에서, 남은 사람들의 노래로

성전에 다녀온 그 발로 집 옥상에 올라가 별에게 절하던 도시가 있었다. 그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말은 신을 욕하는 말이 아니라, 어차피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낮은 혼잣말이었다.

저자(전승)
스바냐. 이 책 첫 문장은 그의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를 지나 히스기야라는 이름까지 4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 히스기야를 유다 왕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이해이며, 그렇다면 스바냐는 왕가의 후손이자 도시 안쪽 사정을 아는 사람이 된다. 세 장 전체가 그의 발언 모음이라고 본다.
저자(학계)
책의 핵심부, 특히 1장과 2장의 심판 신탁을 BC 7세기 요시야 시대의 실제 예언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적다. 논쟁은 회복을 말하는 3장 후반이다. 흩어진 사람들을 데려오겠다는 표현이 나라가 무너지고 강제 이주를 겪은 뒤의 상황을 전제한 듯하다는 이유로, 이 단락을 포로기 또는 그 이후의 편집층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논의된다. 반대로 회복 신탁이 예언서에서 심판 신탁과 짝을 이루는 것은 흔한 형식이므로 후대 부가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견해도 유지된다. 표제의 히스기야를 왕으로 볼 수 있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왕이라면 보통 그렇게 명시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연대
스바냐가 활동한 시기는 요시야 왕 재위기인 BC 640~609년 사이, 대체로 BC 630년 전후(약 2천 6백여 년 전)로 본다. 기록 시기는 전승에 따르면 스바냐 당대이고, 학계 다수는 1~2장의 핵심부가 그때 나온 뒤 3장 후반을 포함한 최종 형태가 포로기 전후(BC 6세기, 약 2천 5백 년 전)까지의 편집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본다. 어느 쪽이든 이 책은 예루살렘이 실제로 함락되는 BC 586년보다 앞선 세대의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장 수
3

3막 요약

  1. 상황

    스바냐는 아주 오래전 사람이에요. 임금님 집안 사람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도시 안쪽 사정을 잘 알았어요. 그가 본 도시는 겉으로는 멀쩡했어요. 사람들은 성전에 잘 다녔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는 옥상에 올라갔어요. 거기서 하늘의 별에게 절을 했어요. 힘센 사람들은 약한 사람 것을 빼앗았어요.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들은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하신다고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안 하신다고요. 스바냐는 그 말이 제일 무서웠어요.

    이 책은 저자 소개부터 이상하다. 보통 예언서는 아버지 이름 하나만 적고 넘어가는데, 스바냐는 4대를 거슬러 올라가 히스기야라는 이름에 닿는다. 이 히스기야가 유다 왕이라면 그는 왕가의 후손이다. 즉 바깥에서 돌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안쪽에서 무너지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가 활동한 때는 요시야 왕 시대다. 요시야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오래된 율법책이 나온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벌인 왕이다(BC 622년경). 우상을 부수고 제사를 예루살렘으로 모으는, 유다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정비였다. 그런데 스바냐가 그리는 예루살렘은 개혁 성공담과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한쪽을 버리지 않은 채 양쪽을 다 잡고 있었다. 낮에는 성전에 가고, 밤에는 자기 집 지붕에 올라가 별과 천체에 절했다. 관리들은 백성을 뜯어먹고, 재판을 맡은 자들은 남기는 것 없이 삼켰다. 스바냐가 가장 견디지 못한 것은 그중에서도 냉소였다. 술독 바닥에 오래 앉아 굳어 버린 앙금에 빗대어 그는 한 부류를 지목한다. 신은 어차피 상을 주지도 벌을 주지도 않는다고 속으로 정리해 버린 사람들이다. 신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신이 있든 없든 달라질 게 없다는 태도다.

    표제(습 1:1)는 구약 예언서 가운데 가장 긴 계보를 앞세운다. 구시-그다랴-아마랴-히스기야로 4대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통상 한 대만 적는 관행에서 벗어난 이례적 형식이다. 이 히스기야를 BC 8세기 유다 왕으로 보아 스바냐를 왕족으로 읽는 견해가 오래 우세했다. 반론도 분명하다. 왕을 조상으로 들었다면 '유다 왕'이라고 명시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 아버지 이름 '구시'가 구스(오늘날 수단·에티오피아 일대)를 연상시키는 낱말이라는 점 때문에, 긴 계보가 오히려 그의 혈통에 대한 의심을 반박하려는 장치였다는 해석도 제시된다. 어느 쪽도 확증되지 않았다. 표제는 활동 시기를 요시야 재위기(BC 640~609년)로 못 박는다. 문제는 이 안에서 어느 지점이냐다. 열왕기하 22~23장은 율법책 발견(BC 622년경)을 계기로 개혁이 시작된 것처럼 서술하고, 역대하 34장은 그보다 앞선 재위 8년과 12년부터 단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서술한다. 두 기록의 배열이 다르기 때문에 스바냐의 위치도 갈린다. 습 1장 4~5절이 여전히 살아 있는 바알 제의와 지붕 위 천체 숭배를 현재 진행형으로 묘사한다는 점을 근거로 개혁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고, 개혁이 표면에서만 이루어져 실제 생활은 바뀌지 않았음을 고발한 것으로 보아 개혁 이후로 두는 견해도 있다. 습 1:5의 지붕 위 천체 숭배는 열왕기하 23장 12절이 요시야가 철거한 대상으로 언급하는 옥상 제단과 겹친다. 같은 절에 나오는 신명 표기는 사본과 번역본에 따라 암몬의 신 '밀곰'으로도, 왕이나 주인을 뜻하는 낱말로도 읽혀 왔다. 자음이 같아 모음 붙이기에 따라 달라지는 대표적 예다. 습 1:12는 이 책의 심리 진단이 가장 날카로운 지점이다. 여기서 쓰인 이미지는 포도주를 오래 걸러 내지 않아 앙금 위에서 굳어 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개입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는 태도, 곧 연구자들이 '실천적 무신론'이라 부르는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읽는다. 국제 정세도 이 감각을 뒷받침한다. 백여 년간 이 지역을 짓눌러 온 앗수르 제국이 눈에 띄게 흔들리던 시기였고, 큰 힘이 물러난 자리에서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기 쉬웠다.

  2. 사건

    스바냐가 사람들 앞에서 말했어요. 곧 아주 무서운 날이 온다고요. 그 그림은 이상했어요. 물고기가 없어져요. 새도 없어져요. 짐승도, 사람도 없어져요. 처음에 만들어진 것이 거꾸로 사라지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 편이 이기는 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스바냐는 아니라고 했어요. 그 날은 우리도 서야 하는 날이라고 했어요. 그다음 그는 나라 이름을 하나씩 불렀어요. 서쪽 나라, 동쪽 나라, 남쪽 나라, 북쪽 나라. 사방을 다 불렀어요. 아무도 빠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자기 도시로 돌아왔어요.

    스바냐가 전면에 내세우는 말은 '여호와의 날'이다. 원래 이 말은 사람들에게 좋은 뜻이었다. 신이 나서서 우리 편에 서고 적을 정리해 주는 날, 그러니까 기다릴 만한 날이었다. 스바냐는 그 기대를 정반대로 돌려세운다. 그 날은 우리 편이 이기는 날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재판대에 서는 날이라는 것이다. 1장의 도입은 규모가 무섭도록 크다. 사람과 짐승,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가 차례로 사라진다는 이미지다. 창세기 첫 장에서 만들어진 순서를 되감기하듯 거꾸로 지우는 배치로 읽힌다. 한 도시의 몰락이 아니라 세계가 처음 상태로 되돌려지는 그림이다. 그 뒤로는 그 날을 묘사하는 시가 이어진다. 어둠, 짙은 구름, 나팔 소리, 황폐 같은 이미지를 층층이 겹쳐 쌓는 방식이다. 이 대목의 라틴어 번역 첫 문구에서 중세의 진혼곡 '디에스 이레(진노의 날)'가 나왔고, 그 노래는 훗날 모차르트와 베르디의 레퀴엠까지 이어진다. 서양 음악에서 죽음과 심판을 뜻하는 선율의 출처가 이 세 장짜리 책이다. 다만 그 어둠 한가운데 딱 한 번,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권하는 자리가 있다(습 2:3). 대상이 눈에 띈다.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결과도 장담하지 않는다. '혹시'라는 말이 붙어 있다. 2장은 시야를 사방으로 넓힌다. 서쪽 해안의 블레셋, 동쪽의 모압과 암몬, 남쪽의 구스, 북쪽의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까지 네 방향의 나라들이 차례로 호명된다.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배치다. 그리고 3장 앞부분에서 시선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사방을 한 바퀴 돈 뒤 마지막에 남는 피고석이 자기 도시라는 구조다.

    '여호와의 날'(욤 YHWH)은 스바냐의 창작이 아니다. 이미 한 세기 앞선 아모스 5장 18~20절이 이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그 날이 빛이 아니라 어둠일 것이라고 뒤집은 전례가 있다. 스바냐는 그 뒤집기를 책 전체의 뼈대로 확장한다. 이 개념은 이후 요엘, 이사야 후반부, 나아가 신약의 종말 어휘로 이어지며 구약 예언 전통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표현 가운데 하나가 된다. 습 1:2~3의 소멸 목록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의 대응이 오래 지적되어 왔다. 다만 정확한 역순은 아니어서, 의도적 역행 구성으로 보는 견해와 관용적 열거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함께 있다. 3절 후반부는 히브리어 본문이 난해해 사본과 번역본마다 처리가 갈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습 1:7~9은 그 날을 제사 장면으로 은유한다. 제사가 준비되고 손님이 초대되는데, 정작 제단에 올려지는 것이 초대받은 쪽이라는 반전 구조다. 이어지는 8절은 외국 옷을 입은 관리와 왕자들을 지목하는데, 이를 외국 의례의 유입이나 종주국 문화 추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1:14~18의 시가 라틴어 불가타에서 'dies irae, dies illa'로 옮겨졌고, 13세기 라틴어 시 '디에스 이레'가 그 첫 행을 따왔다. 이 시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로마 미사 전례의 진혼미사에 편입되었고, 그 결과 모차르트·베르디·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을 거쳐 오늘날 영화 음악의 죽음 모티프에까지 흔적을 남긴다. 성경 본문의 수용사가 문학이 아니라 음악사에 굵게 남은 드문 사례다. 습 2:3은 이 책 전반부에서 유일한 권고 단락이자, 조건성이 뚜렷한 본문이다. 히브리어 '울라이'(아마도, 혹시)는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 표현이며, 여기서 호명되는 대상 '아나윔'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낮음, 그리고 태도로서의 겸손이 겹쳐 있는 낱말이라 한 단어로 옮기기 어렵다. 이 낱말은 3장 12절에서 다시 등장해 책의 결말과 이어진다. 2:4~15의 민족 신탁은 서(블레셋)-동(모압·암몬)-남(구스)-북(앗수르)의 지리적 사방 구조로 배열된다. 예언서의 민족 신탁 모음 가운데서도 구성이 유난히 정연한 편이다. 마지막에 놓인 니느웨 단락은 그 도시가 폐허가 되어 들짐승과 새가 깃든다는 그림으로 끝나는데, 여기 등장하는 동물 이름 일부는 정확한 종을 특정하기 어려워 번역본마다 다르게 옮겨진다. 니느웨는 BC 612년에 실제로 함락되었고, 이 단락을 그 이전의 예고로 볼 것인지 이후의 회고로 볼 것인지가 본문 연대 논의의 한 축이 된다.

  3. 결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마지막 부분에서 갑자기 말투가 바뀌어요. 잘난 척하던 사람들이 사라져요. 그리고 누가 남을까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남아요. 그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남을 속이지도 않아요. 밤에 무서워하지 않고 잠들어요. 마지막 장면이 제일 놀라워요. 그렇게 무섭게 말하던 하나님이 노래를 불러요. 남은 사람들 한가운데 서서요. 기뻐하면서 노래한다고 해요. 무너진 자리에서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그게 이 책의 마지막이에요.

    세 장 가운데 두 장 반이 어둡다. 그런데 이 책이 기억되는 이유는 대개 마지막 몇 절 때문이다. 3장 9절부터 어조가 통째로 바뀐다. 먼저 나오는 것이 말의 회복이다. 갈라져 있던 말이 정돈되어 한 목소리로 모인다는 그림인데, 바벨탑에서 언어가 흩어진 장면을 되돌리는 배치로 읽는 해석이 있다. 그다음이 이 책의 핵심 문장이다. 교만한 사람들이 걸러진 뒤 남는 것은 누구인가. 답은 강한 자가 아니다.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이다(습 3:12~13). 그들의 특징도 능력이 아니라 태도로 적힌다. 거짓말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밤에 겁내지 않고 잠든다. 이 '남은 자'라는 표현은 이후 유대 신앙의 핵심 어휘가 된다. 전멸이 결말이 아니라는 것, 무너짐이 끝이 아니라 걸러 냄이라는 것, 그리고 걸러진 뒤에 남는 것이 힘 있는 쪽이 아니라는 순서다. 이 논리는 이후 성경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마지막 장면은 뜻밖이다. 1장에서 세상을 쓸어 내겠다고 선언하던 존재가, 남은 백성 한가운데서 기뻐하며 노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습 3:17). 심판자로 등장한 쪽이 노래하는 쪽으로 끝나는 이 전환이 스바냐서의 결말이다. 실제 역사는 스바냐의 경고 쪽을 따라갔다. 요시야는 BC 609년 므깃도에서 전사했고, 개혁은 그와 함께 사실상 끝났다. 예루살렘은 BC 586년에 함락된다. 그가 말한 파국은 그의 사후에 현실이 되었고, 이 책의 마지막 몇 절은 그 파국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남겨졌다.

    3장 9~20절은 이 책에서 편집사 논쟁이 가장 집중되는 단락이다.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아 데려오겠다는 3장 19~20절의 언어가 강제 이주와 귀환을 이미 겪은 공동체의 어휘에 가깝다는 점, 어조와 시야가 앞의 심판 신탁과 뚜렷이 다르다는 점이 후대 부가설의 주요 근거로 제시된다. 반면 심판 신탁과 회복 신탁의 교차 배치는 아모스·호세아·미가 등 다른 예언서에서도 확인되는 형식이므로 그것만으로 후대층을 단정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결론은 나 있지 않으며, 후대층으로 볼 경우 이 책은 파국을 예고한 세대와 그 파국을 통과한 세대의 목소리가 한 권 안에 겹쳐진 형태가 된다. 3장 9절의 '순결한 입술' 모티프를 창세기 11장 바벨 서사의 반전으로 읽는 해석은 널리 언급되지만, 본문이 그 연결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어휘 차원의 직접 인용이 없다는 이유로 신중한 접근을 권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3장 12절의 '아니 와달'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힘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낱말 조합이다. 이를 사회경제적 계층으로 읽을 것인지, 태도로서의 겸손으로 읽을 것인지를 두고 해석이 갈려 왔다. 두 층위가 히브리어 안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2장 3절에서 이미 같은 계열의 낱말이 쓰였다는 점이 함께 지적된다. 이 어휘군은 이후 시편의 '가난한 자' 신학, 나아가 신약 마태복음 5장의 팔복 첫 구절로 이어지는 계보 안에서 논의된다. 3장 17절은 본문비평이 결말의 인상을 바꾸는 사례다. 마소라 본문은 사랑 안에서 잠잠하다는 뜻으로 읽히는 동사를 두고 있으나, 70인역과 시리아어역은 자음이 유사한 다른 어근으로 읽어 '새롭게 하다'에 가까운 뜻을 전한다. 한국어 번역본들도 이 지점에서 갈린다. 어느 쪽을 택하든 뒤이어 나오는 노래하며 기뻐한다는 표현은 공통이며, 심판을 선포한 신을 감정의 주체로 그리는 이 구절은 구약 안에서 손꼽히게 드문 표현으로 다루어진다. 3장 18절은 히브리어 구문이 심하게 난해해 고대 역본들 사이에서도 처리가 크게 갈리는 구절이다. 번역본을 비교하며 읽을 때 문장이 서로 달라 보이더라도 역자의 실수가 아니라 본문 자체의 문제인 경우다.

구조 나누기

  1. 1:1-64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저자 소개와, 창조를 되감듯 쓸어 내는 도입
  2. 1:7-18'여호와의 날' — 기다리던 날이 재판의 날로 뒤집히는 구간, 진노의 날 시
  3. 2:1-3책 전반부에서 유일한 권고 — 대상은 낮은 사람들이고, 결과는 '혹시'로 남는다
  4. 2:4-15서·동·남·북 사방 민족 호명 — 블레셋에서 니느웨까지
  5. 3:1-8다시 예루살렘으로 — 관리·재판관·예언자·제사장을 차례로 지목한다
  6. 3:9-20어조가 통째로 바뀌는 결말 — 남은 자들, 그리고 노래하는 신

핵심 구절 (자체 풀이)

  • 습 1:2-3사람과 짐승,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가 차례로 사라진다는 이미지로 책이 열린다. 창세기 첫 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을 거꾸로 지워 나가는 배치로 읽는 해석이 오래 제시되어 왔다.
  • 습 1:12등불을 들고 도시를 뒤져 찾아내는 대상이 큰 악행을 저지른 자가 아니라, 오래 걸러 내지 않아 앙금 위에서 굳어 버린 포도주에 빗대어진 사람들이라는 대목. 이들의 속마음은 신이 상도 벌도 내리지 않는다는 체념으로 요약된다.
  • 습 1:14-16'여호와의 날'을 어둠과 짙은 구름, 나팔 소리, 황폐 같은 이미지를 층층이 겹쳐 묘사하는 시 구간. 이 대목의 라틴어 번역 첫 문구에서 중세 진혼곡 '디에스 이레'가 나왔다.
  • 습 2:3책 전반부에서 유일하게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권하는 자리. 부르는 대상이 권력자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고, 결과도 장담이 아니라 '혹시'라는 조건부 표현으로 남겨 둔다.
  • 습 3:9갈라져 있던 말이 정돈되어 한 목소리로 모인다는 전환. 바벨탑에서 언어가 흩어진 장면을 되돌리는 배치로 읽는 해석이 있으나, 본문이 그 연결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 습 3:12-13끝까지 남는 사람의 조건을 정의하는 대목. 기준이 힘이나 재산이 아니라 가난하고 낮음이며, 그들의 특징도 능력이 아니라 거짓과 속임이 없고 겁 없이 잠든다는 태도로 적힌다.
  • 습 3:17책의 마지막 전환점. 1장에서 세상을 쓸어 내겠다고 선언하던 존재가, 남은 백성 한가운데서 기뻐하며 노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본 계열에 따라 동사를 다르게 읽어 번역본마다 표현이 갈리는 구절이기도 하다.

등장인물

zephaniahjosiahhezekiah

이 책의 가르침

  • 기다리던 '그 날'의 방향을 뒤집는다. 신이 개입하는 날이 곧 내 편이 이기는 날이라는 기대를 정면으로 깨고, 그 날의 피고석에 자기 도시를 앉힌다.
  • 가장 무겁게 다루는 문제가 노골적인 악행이 아니라 냉소와 무관심이다. 신이 있든 없든 달라질 게 없다고 정리해 버린 태도를, 신을 부정하는 말보다 더 깊은 지점에 놓는다.
  • 심판의 범위를 유다 안에 가두지 않는다. 사방 네 방향의 나라를 차례로 호명해, 기준이 소속이 아니라 행위라는 관점을 구조로 보여준다.
  • 파국을 최종 결말로 두지 않는다. 무너짐을 끝이 아니라 걸러 냄으로 배치하고, 걸러진 뒤 남는 것을 '남은 자'라 부른다.
  •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강한 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심판을 선언하던 존재가 노래하는 쪽으로 그려진다.

흔한 오해

'여호와의 날'은 신이 우리 편에 서서 적을 물리치는 승리의 날이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이 품고 있던 통념이었고, 스바냐는 정확히 그 통념을 뒤집는다. 그 날은 유다 자신도 함께 서야 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 뒤집기는 한 세기 앞선 아모스에게서 이미 시작되었고, 스바냐가 그것을 책 전체의 뼈대로 확장했다.

스바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판만 말하는 어두운 책이다.

3장 9절부터 어조가 통째로 바뀐다. 남은 사람들과 노래하는 신으로 마무리되는 이 전환이 오히려 이 책이 기억되는 이유인 경우가 많다. 앞의 어둠과 뒤의 밝음이 맞붙어 있는 대비 자체가 이 책의 구조다.

스바냐는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뒤에 쓰인 책이다.

예루살렘 함락(BC 586년)보다 수십 년 앞선 요시야 시대가 배경이다. 다만 회복을 말하는 3장 후반의 성립 시기는 학계에서 논쟁 중이다. 포로기 이후의 편집층으로 보는 견해와, 심판과 회복의 교차 배치가 예언서의 일반적 형식이므로 그것만으로 후대층을 단정할 수 없다는 견해가 함께 있다.

요시야가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한 시대이니, 스바냐는 잘 정비된 신앙을 칭찬한 책일 것이다.

이 책에는 요시야도 개혁의 성과도 언급되지 않는다. 표제에 '요시야 시대'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본문이 묘사하는 예루살렘은 성전에 다니면서 동시에 지붕에서 별에 절하는, 양쪽을 다 쥔 도시다. 그래서 스바냐의 활동을 개혁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고, 개혁이 겉으로만 이루어졌음을 고발한 것으로 보아 개혁 이후로 두는 견해도 있다.

'디에스 이레(진노의 날)'는 성경에 그대로 들어 있는 노래다.

13세기에 만들어진 라틴어 시이고, 그 첫 행이 스바냐 1장 15절의 라틴어 번역 문구에서 왔다. 이후 로마 가톨릭의 진혼미사에 편입되면서 모차르트·베르디의 레퀴엠을 거쳐 서양 음악에서 죽음과 심판을 뜻하는 대표 선율이 되었다. 성경 본문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서 파생된 후대 작품이다.

읽는 요령

세 장뿐이라 앉은자리에서 30분이면 다 읽는다. 문제는 길이가 아니라 온도다. 1장은 처음 읽으면 압도적으로 어둡고, 여기서 책을 덮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읽기 전에 하나만 알고 시작하면 좋다. 3장 9절부터 어조가 완전히 뒤집힌다. 거기까지만 가면 이 책의 모양이 보인다. 솔직히 말해 2장 4~15절의 민족 목록은 처음엔 건너뛰어도 된다. 낯선 지명과 나라 이름이 줄줄이 나와서 대부분 여기서 지친다. 지금은 '사방을 한 바퀴 돌아 아무도 빼놓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도 충분하고, 지도가 실린 성경으로 나중에 다시 보면 그때 구조가 보인다. 배경이 잡히지 않는다면 열왕기하 22~23장을 먼저 읽는 편이 빠르다. 요시야가 성전에서 나온 율법책을 계기로 개혁을 벌이는 대목이다. 그 장면과 스바냐가 그리는 도시 풍경을 나란히 놓으면, 제도가 바뀌어도 사람이 그대로일 수 있다는 이 책의 문제의식이 선명해진다. 나훔·하박국과 함께 읽어도 좋다. 세 권 모두 같은 시기에 같은 파국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기록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오늘 던지는 질문 하나. 스바냐가 가장 위험하다고 본 사람은 신을 반대한 사람이 아니라, 어차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사람이었다. 지금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은 현실 감각일까 아니면 이 책이 지목한 그 굳어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