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타임라인
성경 속 사건, 교회사, 한국 기독교사를 한 줄에 놓았습니다. 각 사건이 오늘날 무엇으로 이어지는지도 함께 적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연대는 학설이 갈린다고 표시했습니다.
연대 추정 방식 자체가 입장에 따라 갈림 (문자적 6일~수백억 년 전, 아래 참고) · 성경
성경의 첫 책 창세기는 하나님이 세상과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창조는 역사적 연대를 매길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서 있는 신학적 출발점으로 다뤄진다.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6일간의 사건으로 보는 입장과, 오랜 시간에 걸친 과정을 신앙 언어로 압축해 서술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 갈린다.
오늘날에는오늘날 창조와 진화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교단과 개인마다 차이가 크며, 이 문제는 지금도 결론 나지 않은 논쟁으로 남아 있다.
BC 2000년경~BC 1800년경 (약 4천 년 전, 연대 폭은 학설에 따라 다르다) · 성경
[[인물: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 증손자 요셉으로 이어지는 네 세대의 이야기가 창세기 12~50장에 담겨 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를 '한 조상에게서 나온 백성'으로 여기게 되는 뿌리 이야기다. 성경에 구체적 연대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학자마다 다른 시기를 제시한다.
오늘날에는오늘날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가 모두 아브라함을 공동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 계통 종교'라는 분류가 여기서 비롯됐다.
BC 15세기 또는 13세기 (학설이 갈린다, 약 3천3백~3천5백 년 전) · 성경
[[인물:모세]]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연대를 두고 열왕기상의 기록을 근거로 BC 15세기로 보는 입장과, 이집트 유적과 지명 등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BC 13세기 람세스 시대로 보는 입장이 갈린다.
오늘날에는오늘날 유대교는 유월절을 이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 지키고, 기독교는 유월절과 예수의 죽음·부활을 연결해 이해한다.
BC 1200년경~BC 1050년경 (약 3천1백 년 전) · 성경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왕 없이,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사사'들을 통해 다스려지던 시기다. 기드온·삼손·드보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사사기에 담겨 있다.
이 시기는 백성이 신앙을 저버리고 억압당하다 사사가 등장해 구원하고 다시 저버리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으로 그려지며, 이 혼란이 훗날 백성들이 왕정을 요구하는 배경이 된다.
오늘날에는'리더가 없으면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사사기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리더십의 필요성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다.
BC 1050년경(통일)~BC 930년경(분열) (약 3천 년 전) · 성경
사울, [[인물:다윗]], [[인물:솔로몬]] 세 왕을 거치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됐다가, 솔로몬이 죽은 뒤 북쪽 이스라엘(10지파)과 남쪽 유다(2지파)로 갈라졌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이 수도가 되고 성전이 세워지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때로 그려진다. 분열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강경한 통치에 북쪽 지파들이 반발하며 일어났다. 이 시기 왕국의 실제 규모와 국력을 두고는 성경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과, 고고학 증거의 한계를 근거로 신중하게 보는 입장이 있다.
오늘날에는예루살렘은 오늘날에도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모두에게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고, 신약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것도 이 왕조에 뿌리를 둔다.
BC 722년 (약 2천7백 년 전) · 성경
앗수르 제국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키며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했다.
성경은 이 멸망을 우상숭배와 언약 파기에 대한 결과로 서술한다. 앗수르는 정복지 주민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썼고, 북이스라엘 주민 상당수가 흩어졌다.
오늘날에는이때 흩어진 지파들은 흔히 '잃어버린 열 지파'로 불리며, 그 땅에 남아 다른 민족과 섞인 주민들의 후손이 신약 시대 사마리아인과 연결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BC 586년 (약 2천6백 년 전) · 성경
바벨론 제국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무너뜨리고 남유다 왕국의 지도층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이 활동한 배경이 이 시기다. 성전과 왕조를 한꺼번에 잃은 이 경험이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을 성전 제사에서 율법 낭독과 공동체 모임으로 옮기는 계기가 됐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
오늘날에는오늘날 유대교 회당 중심의 예배 전통이 이 포로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BC 538년(귀환)~BC 1세기(중간기, 약 400년) · 성경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칙령을 내려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후 신약이 시작되기 전까지 성경에 직접 기록이 없는 약 400년의 '중간기'가 이어진다.
에스라·느헤미야서는 귀환 이후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을 다룬다. 중간기 동안에는 지배 세력이 페르시아에서 그리스, 다시 로마로 바뀌었고, 유대교 안에서 바리새파·사두개파 같은 분파와 회당 제도가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는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사두개인·헤롯 같은 배경은 모두 이 중간기에 형성됐고, 이 시기에 지중해 세계 공용어가 된 코이네 그리스어로 신약이 기록됐다.
BC 4년경~AD 30년경 (학설이 갈린다) · 성경
[[인물:예수]]의 탄생, 공생애 사역,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신약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탄생 연도는 헤롯왕이 죽은 BC 4년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 오늘날 쓰는 서기(AD) 기산과 실제 탄생 연도 사이에 몇 년의 오차가 있다고 본다. 십자가 처형 연도도 AD 30년 또는 AD 33년으로 학설이 갈린다.
오늘날에는오늘날 전 세계가 쓰는 BC/AD 연호 자체가 예수의 탄생을 기준점으로 삼고 있으며, 성탄절과 부활절은 이 사건들을 기념하는 절기로 지금도 지켜진다.
AD 30년경~ (사도행전 시대) · 성경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한 뒤,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사건을 기점으로 예루살렘에서 첫 신앙 공동체가 시작됐다. 이후 [[인물:바울]] 등을 통해 이 공동체가 지중해 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유대교의 한 흐름으로 시작된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며 독립된 신앙 공동체로 자리 잡는 과정이 이 시기에 일어난다.
오늘날에는오늘날 전 세계 교회는 이 시기의 공동체를 자기 신앙의 출발점으로 여기며, 오순절은 성령강림절이라는 절기로 지금도 지켜진다.
AD 1세기~AD 313년 (약 1천7백~2천 년 전) · 교회사
로마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국가가 정한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발적인 박해를 받았고, 베드로·바울을 비롯한 많은 신자가 처형됐다고 전해진다.
박해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강도가 달랐지만, 이 시기 신자들이 겪은 순교의 기억은 이후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오늘날에는오늘날에도 여러 교단이 이 시기 순교자들을 신앙의 본보기로 기념하며, 정교회·천주교 등 일부 교단은 이들을 성인으로 공경한다.
313년 (약 1천7백 년 전) · 교회사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신앙의 자유를 공식 인정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던 종교에서 합법적인 종교로 지위가 바뀌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여러 특혜를 제공하며 그리스도교와 로마 제국의 관계를 밀착시켰다.
오늘날에는국가와 종교가 밀접하게 결합되는 이후 유럽 역사의 출발점으로 이 사건이 자주 언급되며,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은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첫 단계로 다뤄진다.
325년~451년 (니케아 공의회~칼케돈 공의회) · 교회사
여러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예수의 신성과 인성, 삼위일체 교리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정리한 회의들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가 하나님과 같은 본질임을 확정했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함께 지닌다고 결론지었다.
이 시기 논쟁의 핵심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였다. [[개념:삼위일체]]와 [[개념:위격적 연합]] 교리가 이 과정에서 다듬어졌고, 그 결과가 오늘날까지 쓰이는 [[개념:니케아 신경]]에 담겼다.
오늘날에는개신교·천주교·정교회 대부분이 이 공의회들의 결론을 공통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이며, 예배 때 니케아 신경을 함께 고백하는 교회들이 지금도 있다.
1054년 (약 1천 년 전) · 교회사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가 서로를 파문하며 공식적으로 갈라섰다.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지, '필리오케'(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온다는 구절)를 신경에 넣을지를 둘러싼 신학적 차이와, 오랜 정치적·문화적 갈등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오늘날에는이 분열은 오늘날의 천주교(로마 가톨릭)와 정교회(동방 정교회)가 서로 다른 교단으로 존재하는 직접적 뿌리이며, 두 전통은 지금도 완전히 재통합되지 않았다.
1096년~13세기 (약 900년 전) · 교회사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를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벌였다.
십자군은 종교적 명분과 함께 정치적·경제적 동기가 뒤섞인 사건으로 평가되며, 원정 과정에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심지어 동방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폭력도 있었다.
오늘날에는십자군은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권 관계에 남은 역사적 앙금으로 자주 언급되며, 여러 교단이 이 시기의 폭력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바 있다.
12세기~13세기 (약 800년 전) · 교회사
중세 유럽의 대학을 중심으로, 이성과 논리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한 '스콜라 신학'이 발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 인물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신학과 결합해 방대한 신학 체계인 『신학대전』을 남겼으며, 이 시기 신학은 신앙과 이성이 대립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전개됐다.
오늘날에는오늘날 천주교 신학교에서는 여전히 아퀴나스의 사상을 핵심 교재로 다루며, '신앙과 이성'이라는 주제는 지금도 신학 논의의 한 축으로 남아 있다.
1517년 (약 500년 전) · 교회사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면벌부(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붙였다.
면벌부는 벌을 면제받기 위해 헌금하는 관행이었는데, 루터는 이를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문제 삼았다. 이 문제 제기가 곧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의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번졌다.
오늘날에는오늘날 루터교·장로교(칼뱅주의)·감리교·침례교 등 대부분의 개신교단이 이 사건을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며, 10월 31일은 여러 개신교회가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키는 날이다.
1545년~1563년 (약 470년 전) · 교회사
로마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에 대응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어 자신들의 교리를 재정비하고 내부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공의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개신교 주장에 맞서 믿음과 함께 행위도 중요하다는 입장을 재확인했고, 성직자 교육 강화 같은 내부 개혁도 함께 결정했다.
오늘날에는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구원관 차이(오직 믿음 vs 믿음과 행위)는 이 시기에 각자의 입장으로 굳어진 것이다.
17세기~18세기 (약 250~300년 전) · 교회사
영국의 청교도들은 국교회에 남아 있던 가톨릭적 요소를 없애고 성경대로 살고자 한 개혁 운동을 벌였고, 이 흐름은 이후 북미 대륙으로 이어졌다. 18세기에는 영국과 북미에서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부흥 운동인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로 이주해 미국 개신교 문화의 기틀을 놓았고, 대각성 운동은 조지 휫필드·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설교자를 중심으로 개인의 신앙 결단을 강조하며 여러 교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는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개인적 회심 강조 전통과 '부흥회' 형식의 예배가 이 시기 대각성 운동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1784년 (약 24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그해 겨울 동료들과 함께 조선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
특이하게도 한국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가 아니라 조선의 학자들이 스스로 서학(西學) 서적을 통해 신앙을 접하고, 세례를 받으러 직접 베이징에 다녀오면서 시작됐다.
오늘날에는오늘날 한국 천주교는 이 자발적 시작을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정체성으로 강조하며, 이승훈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로 기억된다.
19세기 (약 150~200년 전) · 교회사
영국의 윌리엄 캐리를 비롯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유럽과 북미를 넘어 아시아·아프리카 등지로 조직적인 선교 활동을 확장한 시기다.
이 시기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함께 병원·학교 설립 같은 의료·교육 사업을 함께 벌였다. 이 방식이 여러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와, 서구 제국주의 팽창과 얽혀 있었다는 비판이 함께 제기된다.
오늘날에는한국을 포함해 오늘날 세계 여러 지역의 개신교 교회와 미션스쿨·미션병원 상당수가 이 시기 선교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01년 (약 22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탄압한 신유박해가 일어나 이승훈을 포함한 많은 신자가 처형됐다.
조선 왕조는 천주교가 유교적 제사 의례를 거부하고 신분 질서를 흔든다고 보아 국가 차원에서 단속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박해가 19세기 내내 반복됐다.
오늘날에는이 시기의 순교자들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가 시성(諡聖)한 성인들 가운데 다수를 이루며, 절두산 순교성지 같은 곳이 이 역사를 기리는 장소로 남아 있다.
1866년 (약 16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프랑스 선교사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처형된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이 시기는 조선이 서양 세력에 문을 닫아걸던 쇄국 정책과 맞물려 있었고, 이 박해는 곧이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오늘날에는이 박해로 숨진 신자들 다수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인 또는 복자로 공경받고 있다.
1885년 (약 14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와 북감리회의 아펜젤러가 각각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며 개신교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이 시기 조선은 서양 종교의 자유로운 포교를 공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교육 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오늘날에는오늘날 한국 장로교와 감리교 다수가 이 두 인물을 자기 교단의 첫 선교사로 기억하며, 이들의 도착일 전후로 여러 교단이 기념 행사를 연다.
1885년~1886년 (약 14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선교사들이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1885)과, 배재학당(1885~1886)·이화학당(1886) 같은 근대식 학교를 잇달아 세웠다.
선교가 자유롭지 않던 상황에서 의료와 교육은 선교사들이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통로였고, 그 결과 근대 의학과 근대식 학교 교육이 한국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
오늘날에는제중원은 오늘날 세브란스병원으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각각 배재대학교·배재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1907년 (약 12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시작된 대규모 부흥 운동이 평양을 넘어 전국으로 퍼졌다.
이 부흥은 신분과 남녀의 자리를 나누던 관습이 예배 안에서 옅어지는 계기가 됐고, 이후 한국 개신교의 새벽기도회·통성기도 같은 기도 문화가 자리 잡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오늘날에는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새벽기도, 통성기도, 부흥회 문화의 원형으로 이 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1930년대~1945년 (약 9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했고, 주기철 목사 등 일부 신자와 교회는 이에 저항하다 옥고를 치르거나 순교했다.
신사참배를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 의례로 볼 수 있는지를 두고 교단 안에서도 입장이 갈렸다. 총회 차원의 수용과 개별 신자들의 저항이 함께 존재했던 시기다.
오늘날에는오늘날에도 주기철 목사 같은 저항자들은 순교자로 기념되며, 이 시기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 교회가 자신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되짚을 때 자주 다뤄지는 주제다.
1945년~ (약 8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북한 지역의 교회와 신자 다수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월남한 신자들 가운데는 목회자와 신학생이 많아, 이후 남한 개신교의 성장에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됐다는 평가가 있다. 북한에서는 이후 종교 활동이 국가 통제 아래 크게 제한됐다.
오늘날에는오늘날 서울 영락교회를 비롯해 실향민 출신 신자들이 세운 교회들이 이 시기 이주의 흔적으로 남아 있고, 북한 선교와 통일은 지금도 한국 교회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1970년대~1980년대 (약 40~50년 전) · 한국 기독교사
이 시기 한국 개신교는 신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폭발적 성장을 경험했다.
산업화·도시화로 인한 이촌향도, 새벽기도와 부흥회 중심의 신앙 문화, 대형 전도 집회 등이 이 성장의 배경으로 꼽힌다. 이 시기에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들이 여럿 한국에서 나타났다.
오늘날에는이때 세워진 대형 교회들 다수가 오늘날에도 한국 개신교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 시기의 급성장 방식이 이후 세대 교체 과정에서 여러 과제를 남겼다는 지적도 있다.
2000년대~현재 · 한국 기독교사
200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는 교회 세습, 청년 세대의 이탈, 사회적 신뢰도 하락 같은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담임목사직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교회 세습은 일부 교회에서 논란이 됐고, 여러 조사에서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다른 종교에 비해 낮게 나타나는 경향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을 교회의 본질적 위기로 보는 시각과, 한국 사회 전반의 종교 이탈 흐름 속 한 부분으로 보는 시각이 함께 있다.
오늘날에는이 문제들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 안에서 교단과 교회마다 계속 논의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