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비즈

신약 · 서신

로마서 유죄 판결받은 피고인에서, 값없이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으로

바울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도시의 교회에,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앞으로 편지를 썼다. 1500년도 더 지나 한 수도사가 이 편지의 한 문장을 다시 읽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 여파로 유럽 교회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다.

저자(전승)
사도 바울. 편지 자체가 첫 문장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자기소개로 시작한다(1:1). 16장 22절에는 이 편지를 실제로 받아 적은 서기 더디오의 이름도 직접 등장해, 바울이 구술하고 다른 사람이 받아 적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음을 본문 스스로 알려준다.
저자(학계)
로마서는 신약학계에서 바울의 저작임이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이른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바울 서신' 일곱 편(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저자 자체보다는 본문의 통일성이 논쟁거리다. 16장은 로마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바울이 보내는 편지치고 지나치게 많은 개인 인사(26명)를 담고 있어, 원래 다른 교회(주로 에베소가 거론된다)로 보낸 별도의 짧은 편지가 후대에 합쳐졌다고 보는 견해와, 바울이 여러 도시를 오가며 그만큼 폭넓은 인맥을 쌓았을 뿐이라고 보는 견해가 함께 있다. 사본에 따라 마지막 송영(16:25-27)의 위치가 14장 뒤, 15장 뒤, 16장 끝 등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이 논쟁의 근거로 제시된다.
연대
AD 56~57년경(약 1,970년 전)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다.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말미, 그리스 고린도에 머물며 예루살렘에 전달할 헌금을 모으던 시기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15:25-26 및 16장에 언급된 인물들을 근거로 한 재구성). 다만 바울의 전체 연대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학자마다 AD 55~58년 사이에서 1~2년씩 차이가 난다.
장 수
16

3막 요약

  1. 상황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었어요. 로마라는 큰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어요. 그런데 바울은 그 도시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부터 소개했어요.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어요. 사람이 어떻게 신과 다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바울은 먼저 어려운 질문을 던졌어요. '사람은 왜 자꾸 잘못을 저지를까?'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마찬가지래요. 어느 나라 사람이든, 누구도 스스로 완전히 착하게 살 수는 없대요.

    바울은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도시, 로마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다른 편지들 대부분이 자신이 세운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과 달리, 이 편지는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사도로 부름받은 사람으로 소개하며 인사를 연다. 로마 교회는 그가 세운 곳이 아니었고, 유대인 출신 신자와 이방인 출신 신자가 함께 모인 공동체였다. 로마 교회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순례자나 상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퍼졌을 것으로 보는 학자가 많고, 몇 해 전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을 도시에서 내쫓았다가 다시 들인 사건을 겪은 뒤라 두 집단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남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견해도 있다. 편지 서두에서 그는 여러 차례 로마를 방문하려 했지만 길이 막혔다고 말하며, 언젠가 이 도시를 거쳐 더 먼 곳까지 가고 싶다는 뜻을 살짝 비친다. 이 계획은 15장에서 다시 자세히 등장한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울은 이 편지 전체를 압축하는 한 문장을 내놓는다.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신의 능력이며, 그 안에서 사람과 신 사이를 바로잡는 '의'가 나타난다는 선언이다. 이어서 그는 정반대 방향에서 논증을 시작한다. 해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문제를 진단하는 것이다. 신을 알면서도 등지고 다른 것을 예배한 이방 세계의 모습을 길게 묘사하고, 이어 율법을 가졌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여기던 유대인의 위선을 짚는다. 겉모습만 다를 뿐 두 집단 다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요지다. 결국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 재판정 같은 논증 앞에서 스스로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론으로 첫 세 장이 마무리된다.

    로마서는 신약학계에서 바울의 저작임이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이른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바울 서신' 일곱 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저자가 누구인가보다 오히려 이 편지가 왜,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가를 둘러싼 논의가 훨씬 활발하다. 크게 세 가지 설명이 함께 제시된다. 첫째는 바울이 아직 방문하지 못한 교회 앞에 자신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려 했다는 '신학적 자기소개서'설이다. 둘째는 로마 교회 안에 실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유대인·이방인 신자 사이의 긴장 — 몇 해 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AD 49년경,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사건으로,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 소요를 이유로 든다)과 그 이후 귀환 과정에서 불거졌을 법한 갈등 — 을 겨냥한 목회적 편지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14~15장에서 다뤄지는 음식과 절기를 둘러싼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논쟁은 이 갈등의 흔적으로 자주 해석된다. 셋째는 15장 후반부에서 스스로 밝히듯,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서쪽 끝 스페인 선교를 계획하며 로마 교회를 그 여정의 후원 기지로 삼으려 했다는 실용적 목적이다. 이 세 설명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대다수 주석가는 이 편지가 여러 목적을 동시에 담고 있다고 본다. 편지의 논증은 1장 16~17절에서 스스로 요약된다. 복음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신의 구원 능력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선언과 함께, 구약 하박국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로 뒷받침한다. 이 두 절은 신약 전체에서 손꼽히게 큰 역사적 무게를 지니게 된 문장이다. 16세기 초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사이자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오랫동안 이 구절의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두려움으로 읽었다고 회고했다. 그에게 이 말은 죄인을 심판하는 신의 응징적 정의를 뜻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의'가 인간이 갖춰야 할 조건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값없이 '받는' 것이라는 이해에 이르렀다고 그는 훗날 서술했으며, 이 재해석의 순간을 흔히 '탑의 체험'이라 부른다. 이 통찰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로 정리되었고, 1517년 이후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신학적 축을 이뤘다고 평가된다. 다만 이 일화의 세부 연대와 정황은 루터 자신의 후대 회고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아, 역사적 재구성에는 학자마다 온도차가 있다. 1장 18절부터 이어지는 진단은 먼저 이방 세계를 겨냥한다. 창조 세계를 통해 신을 알 만한 여지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저버리고 다른 형상을 예배하게 된 인간이, 결국 몸으로 서로를 욕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묘사가 이어지며(1:24-27), 그 목록의 끝에는 다양한 악덕의 나열이 붙는다(1:29-31). 이 대목 가운데 특히 26~27절, 동성 간의 성적 행동을 묘사하는 부분은 오늘날 신학과 교회 안에서 가장 뜨겁게 다뤄지는 논쟁 구절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이 페이지에서는 이를 별도의 '다입장' 항목으로 구분해 다룬다. 2장부터는 화살이 방향을 튼다. 남을 심판하면서 정작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 곧 율법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우월함의 근거로 삼던 유대인 청중을 겨냥한다. 할례가 마음의 문제이지 몸의 표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주장(2:28-29)이 이 구간의 정점이다. 3장 초반은 그렇다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에 아무 이점이 없느냐는 스스로의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결국 3장 9~20절에서 시편과 이사야서를 촘촘히 엮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법정 비유(모든 입이 다물어지고, 온 세상이 신 앞에 정죄받는다는 3:19의 표현)로 이 구간이 마무리되는 것은 이 편지 전체가 즐겨 쓰는 법률적·재판적 언어 체계를 예고하는 장치로 읽힌다.

  2. 사건

    바울은 계속 이야기해요. 사람은 스스로 착해질 수 없지만, 신은 다른 방법을 마련해 두었대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를 없던 일로 해준다는 거예요. 돈을 내고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선물처럼 받는 거래요. 바울은 아주 오래전 사람 아브라함 이야기를 꺼내요. 아브라함도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그냥 믿어서 신과 가까운 사이가 됐대요. 그다음엔 이렇게 말해요. 이제 죄에 매인 종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이 된 거라고요. 힘든 순간에도 신의 영이 함께 있어서 도와준대요. 그러다 바울은 어려운 질문을 하나 던져요. '그럼 원래 신을 믿던 유대 민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 바울은 슬퍼하면서도, 신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고 말해요.

    3장 21절에서 논증은 방향을 튼다.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전환구와 함께,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난 신의 의가 소개된다. 이 의는 유대인이 지켜온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4장은 이 주장을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 뒷받침한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도 전에, 율법이 주어지기도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5장은 이 의롭다 하심이 가져오는 결과를 그려낸다. 신과의 평화,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 그리고 한 사람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와 죽음이 한 사람 그리스도를 통해 뒤집힌다는 대비다. 6~8장은 질문을 하나 던지고 답하는 데서 시작한다. 은혜가 죄를 덮어 준다면 계속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바울은 아니라고 답하며, 신자는 이미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에 대해 살아난 존재라고 주장한다(6장). 7장에서는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마는 인간 내면의 갈등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8장에서는 이 갈등에 대한 해답으로 성령이 등장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어떤 것도 신의 사랑에서 자신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확신으로 이 장이 마무리된다. 그런데 여기서 풀리지 않는 질문이 남는다. 신이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맺어 온 약속, 율법과 할례를 중심으로 한 그 관계는 이제 어떻게 되는가. 9~11장은 이 질문 하나에 통째로 할애된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이 대부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깊은 슬픔을 토로하며(9:1-3), 신의 선택이 혈통이 아니라 부르심에 달려 있었다는 점을 이스라엘 역사 자체에서 찾아낸다. 그러면서도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서는 원래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일 뿐이니 뿌리를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11장). 이 세 장은 개인 구원의 논리를 민족과 역사의 차원으로 확장하며, 신의 약속이 끝내 무효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 구간을 닫는다.

    3장 21절부터 펼쳐지는 이 편지의 중심 논증은 그리스어 원어 차원에서도 여러 논쟁을 품고 있다.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 테우, dikaiosynē theou)라는 표현을 두고, 이를 신이 지닌 속성(공의로우심)으로 읽을지, 신이 사람에게 값없이 나눠 주는 지위(의롭다 인정하는 신분)로 읽을지가 오랜 해석사의 쟁점이었다. 루터의 재해석은 후자 쪽으로 크게 기울었고, 이후 개신교 주류 해석도 대체로 이 흐름을 따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3:22 등)라는 구절의 소유격 해석도 논쟁적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읽는 전통적 다수설과, '그리스도 자신의 신실함'(주격적 소유격)으로 읽어 그리스도가 십자가까지 신실하게 순종한 사건 자체가 의의 근거라고 보는 소수설이 20세기 후반 이후 활발히 논의되어 왔다. 4장의 아브라함 논증은 창세기 15장 6절('아브라함이 신을 믿으니 이것을 그의 의로 여겼다'는 취지의 구절)을 근거로 삼는데, 이 구절이 원래 맥락에서 갖는 의미와 바울의 재해석 사이의 관계도 유대교-기독교 해석사에서 오래 논의된 주제다. 5장의 위치는 이 편지의 구조를 둘러싼 대표적인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5장을 3~4장의 결론부(칭의가 가져오는 열매)로 묶어 '1~5장: 죄와 칭의'로 보는 편성과, 5장을 6~8장의 도입부로 보아 '5~8장: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묶는 편성이 갈린다. 여러 주석가가 5장을 사실상 경첩 구실을 하는 전환부로 다뤄 왔으며, 어느 쪽에 붙이느냐는 정답이 있다기보다 각 주석가가 편지의 논리 전개를 어떻게 읽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에 가깝다. 이 페이지의 '구조 나누기'는 다수 학자가 동의하는 편성(3:21-5:21을 한 단락으로) 하나를 소개할 뿐, 이 경계 자체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7장의 '나'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대표적인 미해결 논쟁이다.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고 토로하는 이 '나'를 바울 자신의 회심 이전 경험에 대한 자전적 고백으로 읽는 전통적(특히 아우구스티누스·루터 계열) 해석과, 이를 율법 아래 놓인 인간 일반을 대변하는 수사적 장치로 읽는 해석이 있다. 후자는 20세기 후반 이른바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 E. P. 샌더스·제임스 던·N. T. 라이트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학자들 사이에서 특히 힘을 얻었는데, 이들은 1세기 유대교를 '행위로 구원받으려 한 율법주의'로 단순화해 온 전통적 독법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 논쟁은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9~11장은 이 편지에서 정치적으로도 예민하게 다뤄져 온 구간이다. 바울은 신의 선택이 이스라엘의 일부를 지나쳐 간 것처럼 보이는 현실 앞에서 신정론에 가까운 질문(신은 자신의 약속을 어겼는가)과 씨름한다. 이 구간, 특히 감람나무 비유(11:17-24)와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11장 26절의 문장은 후대에 정반대 방향으로 쓰였다. 한편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이른바 '대체신학'(supersessionism)의 근거 본문으로 오랫동안 인용되어 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확히 같은 본문이, 신이 이스라엘을 저버리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지위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읽힌다. 특히 11장 29절('신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취지의 구절)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소명이 취소되지 않았다고 강조하는 해석은, 20세기 홀로코스트 이후 서구 신학이 대체신학을 반성적으로 재검토하는 흐름(가톨릭 교회의 1965년 선언 '노스트라 애타테' 등)과 맞물려 힘을 얻었다. '온 이스라엘'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전체인지, 역사를 통틀어 구원받는 유대인 전체인지,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영적 이스라엘' 전체인지)를 둘러싼 논쟁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이 페이지는 이 가운데 어느 해석이 옳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3. 결과

    편지 뒷부분에서 바울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해요. 몸을 산 제물처럼 신에게 드리며 살라고 해요. 서로 사랑하라고, 나라의 법도 지키라고 말해요. 믿는 것이 다른 사람끼리도 서로 미워하지 말라고 부탁해요. 그러고는 자기 계획을 말해요. 예루살렘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모은 돈을 전달하러 갈 거래요. 그다음엔 로마를 거쳐서 더 먼 곳까지 가고 싶다고 해요. 편지 맨 끝에는 여러 사람에게 인사를 전해요. 뵈뵈라는 여성이 이 편지를 직접 들고 로마까지 갔을 거라고 짐작해요.

    12장부터 어조가 완전히 바뀐다. 앞선 9~11장이 신학적 논증이었다면, 12~15장은 그 논증이 실제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룬다. 몸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으로 이 구간이 열리고,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한 몸처럼 협력해야 한다는 비유, 진심 어린 사랑에 대한 권면이 이어진다. 13장에서는 국가 권력에 순종하라는 요청이 등장해 오래도록 논쟁을 낳았고, 뒤이어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선언이 붙는다. 14~15장은 음식과 특별한 날을 지키는 문제로 갈라선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 사이의 논쟁을 다룬다. 바울은 어느 쪽이 옳은지 판정하기보다, 서로를 비판하지 말고 자기 확신을 강요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15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이 편지를 쓴 실질적인 이유를 스스로 밝힌다. 지금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이방인 교회들이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에게 전하러 가는 길이며, 그 일이 끝나면 로마를 거쳐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서쪽 끝 스페인까지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로마 교회가 그 여정의 중간 기착지이자 후원자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숨기지 않는다. 16장은 인사말로 이루어진 짧은 장처럼 보이지만,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 뵈뵈를 추천하는 문장으로 시작해 스물여섯 명에 이르는 이름을 나열한다. 이 편지를 실제로 로마까지 들고 간 사람이 뵈뵈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편지는 마지막으로, 오래 감춰졌다가 이제 드러난 신비를 찬양하는 송영으로 마무리된다.

    12장부터 편지는 신학 논증에서 실천적 권면으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몸을 살아 있는 제사로 드리라는 12장 1~2절의 권면은 제사가 성전에서 짐승을 드리는 행위였던 시대에, 예배의 자리를 일상 전체로 넓히는 선언으로 읽힌다. 13장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구절은 이후 역사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인용되어 온 대표적인 본문 가운데 하나다. 국가 권력에 대한 순응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인 시기가 있었던 반면,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나치 독일에 저항한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무조건적 복종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권위에 대한 존중을 다룰 뿐이라고 읽었다. 이 구절 하나로 정치권력에 대한 태도 전체를 결정지을 수 있는지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4~15장의 '강한 자와 약한 자' 논쟁은 흔히 로마 교회 안의 유대인·이방인 신자 갈등의 실제 흔적으로 해석된다. 음식 규정과 절기 준수를 둘러싼 이 갈등에서 바울은 어느 쪽이 신학적으로 옳은지 판정하지 않고,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공동체의 화합을 우선하라고 요청한다. 15장 20~24절에서 바울은 이 편지의 숨은 동기를 직접 밝힌다. 이미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는 선교 원칙에 따라, 이미 여러 사도가 활동 중인 예루살렘이나 안디옥이 아니라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지목한 다음 목적지는 지중해 서쪽 끝, 로마 제국의 변경에 해당하는 스페인(히스파니아)이었다. 문제는 그가 그 지역에 아는 사람도, 그 지역 교회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로마 교회는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그 여정의 자연스러운 중간 기지가 될 수 있었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자신을 그토록 길게 소개하고 자신의 복음을 그토록 체계적으로 설명한 데는, 아직 만난 적 없는 이 교회로부터 재정적·인적 지원을 얻어 서방 선교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 실용적 동기가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다만 그가 실제로 스페인에 도착했는지는 신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도행전은 그를 로마 가택 연금 상태에서 멈춰 세우고, 이후 1세기 말 초기 교회 문헌(클레멘스1서 등)에 그가 '서쪽 끝까지' 갔다는 짧은 언급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스페인 방문의 실현 여부는 정황적 추정의 영역에 머문다. 16장은 인사말만 모아 둔 부록처럼 보이지만 여러 논쟁거리를 담고 있다. 첫머리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디아코노스, diakonos)으로 소개되는 뵈뵈를 추천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이 단어를 훗날의 직분인 '집사'로 옮길지, 좀 더 일반적인 '섬기는 사람'으로 옮길지는 번역과 해석에 따라 갈린다. 이 편지를 실제로 로마까지 들고 간 사람이 뵈뵈였을 것이라는 데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7절에는 '유니아'라는 이름이 등장해 안드로니고와 함께 '사도들 가운데서 두드러진다'는 취지의 평을 받는데, 이를 유니아가 여성 사도였다는 근거로 읽는 해석과, '사도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는 뜻으로 읽어 그가 사도 자신이었다고 단정하지 않는 해석이 함께 있다. 이 두 구절은 오늘날 여성의 교회 직분을 둘러싼 논쟁에서 양쪽 모두가 근거로 삼는 본문이다. 22절에는 이 편지를 실제로 받아 적은 서기 더디오가 자기 이름으로 직접 인사를 남기는 보기 드문 장면도 있다. 편지의 마지막 송영(16:25-27)은 사본에 따라 위치가 14장 뒤, 15장 뒤, 16장 끝 등으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 불안정성은 앞서 언급한 16장 자체의 형성 과정(로마 교회를 위한 원편지에, 다른 수신지를 위한 인사말 목록이 후대에 합쳐졌을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와 함께 다뤄진다. 이 편지가 남긴 역사적 영향은 저자 자신의 생애를 훌쩍 뛰어넘는다. 4세기 말, 훗날 신학자가 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원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집어 아무 곳이나 펼쳤는데, 그 페이지가 13장 13~14절, 방탕과 다툼을 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는 권면이었다고 자서전 《고백록》에 남겼다. 그는 이 순간을 회심의 결정적 계기로 회고한다. 앞서 언급한 루터의 재해석(1장 17절)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데 더해,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는 런던의 한 모임에서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이 낭독되는 것을 듣던 중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기록했으며, 이 사건은 훗날 감리교 운동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0세기 초에는 스위스 목사 카를 바르트가 쓴 로마서 주석(1919년, 개정판 1922년)이 당대 자유주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이 책은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될 만큼 이후 20세기 신학의 흐름을 바꾼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한 편지가 이렇게 반복해서 신학사의 전환점에 놓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서가 기독교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많다.

구조 나누기

  1. 1:1-3:20인사와 선언, 그리고 모든 인류가 유죄라는 진단
  2. 3:21-5:21율법과 상관없이 얻는 의 — 믿음으로 얻는 무죄 판결
  3. 6-8죄와 은혜 아래서의 삶 — 죄에서의 자유, 성령 안의 삶
  4. 9-11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 — 신은 자기 백성을 버렸는가
  5. 12-16일상으로 착지하는 신학 — 사랑, 관용, 그리고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핵심 구절 (자체 풀이)

  • 롬 1:16-17복음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신의 능력이며, 그 안에 사람과 신 사이를 바로잡는 '의'가 나타난다는 이 편지 전체의 논제. 구약 하박국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 뒷받침한다.
  • 롬 1:26-27창조주 대신 다른 것을 예배하게 된 인간이 결국 몸으로 서로를 욕되게 하는 성적 행동에까지 이르렀다고 묘사하는 대목. 오늘날 동성 관계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신약 본문 가운데 하나이며, 이 페이지의 '다입장' 항목에서 별도로 다룬다.
  • 롬 3:23-24모든 사람이 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대가를 대신 치른 예수를 통해 아무 조건 없이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선언.
  • 롬 5:1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았으니, 이제 신과 다투는 사이가 아니라 평화로운 사이가 되었다는 결론.
  • 롬 8:1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의 심판이 없다는 선언 — 6~8장 논증 전체가 도달하는 결론.
  • 롬 8:38-39죽음도 삶도, 어떤 세력도 이 사랑에서 자신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이 편지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확신의 고백.
  • 롬 11:29신이 한 번 준 은사와 부르심은 다시 거두지 않는다는 문장. 이스라엘의 미래를 둘러싼 오늘날의 신학적 논쟁에서 자주 소환되는 근거 구절이다.
  • 롬 15:20-24이미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며,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려는 계획을 처음 밝히는 대목. 이 편지의 실질적인 집필 동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롬 16:1-2겐그레아 교회의 일꾼 뵈뵈를 추천하며 편지를 맺는 대목. 이 편지를 실제로 로마까지 전달한 사람이 뵈뵈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등장인물

paulphoebepriscillaaquila

이 책의 가르침

  • 인간의 문제를 개별적인 잘못들의 목록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처한 근본적인 상태(죄 아래 있음)로 진단한다.
  • 그 상태를 해결하는 길이 규정을 지켜 얻는 성취가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 '이신칭의' 교리의 성경적 근거로 가장 널리 인용되는 본문이다.
  • 신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이라는 질문을 이스라엘 민족 차원까지 확장해, 개인 구원과 공동체·역사의 문제를 함께 붙든다.
  • 마지막 다섯 장에서 이 모든 논증을 일상 윤리(사랑, 권위에 대한 태도, 신념이 다른 신자 간의 관용)로 착지시켜, 교리와 실천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흔한 오해

로마서는 다른 신약 문헌이나 구약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읽어도 충분하다.

실제로는 아브라함(창세기 15장), 아담(창세기 2~3장), 하박국의 한 구절(1:17), 시편과 이사야의 인용(3장) 등 구약 본문을 계속 전제하고 논증을 쌓아 올리는 편지다. 유대교의 율법·할례·언약 개념을 모르면 3~4장, 9~11장의 논증을 따라가기 어렵다. 로마서는 유대교라는 토양 위에서, 그리고 유대교와의 관계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로서 읽어야 이해되는 문서에 가깝다.

로마서 1장(26~27절)에 대한 해석은 하나뿐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는 이를 시대를 초월한 규범적 금지로 읽는 입장과, 고대의 특정한 착취적·제의적 관행에 한정된 서술로 읽는 입장이 함께 존재하며, 교단과 신학자 사이에서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 페이지의 '다입장' 항목을 참고.

로마서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라는 개인 문제만 다루는 책이다.

1~8장은 개인의 칭의를 다루지만, 9~11장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신의 약속이라는 공동체·역사적 질문으로, 12~16장은 국가 권력에 대한 태도부터 식사 예절까지 아우르는 일상 윤리로 논의를 확장한다. 개인 구원론으로만 이 책을 요약하면 절반 이상을 놓치게 된다.

16장은 이름만 잔뜩 나열된, 건너뛰어도 되는 부록이다.

이 장에는 편지를 실제로 로마까지 전달한 것으로 보이는 뵈뵈에 대한 추천, 여성 사도 여부를 둘러싼 논쟁의 근거가 되는 '유니아'라는 이름, 편지를 받아 적은 서기 더디오의 육성 인사까지 담겨 있다. 짧지만 이 편지가 어떻게 쓰이고 전달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정보가 압축되어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순수하게 신학을 정리하고 싶어서 쓴, 상황과 무관한 신학 논문이다.

본문 곳곳에는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난다. 아직 방문한 적 없는 교회에 자신을 소개해야 했던 사정,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 사이의 긴장으로 짐작되는 갈등(14~15장), 예루살렘에 전달할 헌금과 스페인 선교 계획을 위해 로마 교회의 지지가 필요했던 사정(15장)이 함께 얽혀 있다. 신학과 실용적 목적이 나뉘지 않는 편지다.

보는 관점

로마서 1장(26~27절)이 오늘날 동성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어떻게 읽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시대를 초월한 규범적 금지로 읽는 입장

이 본문이 성별과 무관하게 동성 간 성적 관계 전반을 신이 정한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규정하며, 이 판단은 특정 시대의 관행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도덕적 원칙이라고 본다.

  • 바울이 이 대목에서 남녀 창조 질서를 소환하는 언어(타고난 결 그대로/그것을 거스르는 방향으로)를 사용해, 특정 관행이 아니라 관계 형태 자체를 문제 삼는 것으로 읽을 여지가 있다는 점
  • 본문 자체에 '이러한 경우에 한해서'라는 시대적·상황적 한정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 레위기 18장·20장의 금지 규정과 이어지는 유대교-기독교 해석 전통 속에서 이 본문이 오랫동안 함께 읽혀 왔다는 점

로마가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 동방정교회, 다수의 복음주의 및 보수 개신교단(예: 남침례교단, 여러 보수 장로교단)

당대의 특정 관행에 한정된 서술로 읽는 입장

이 본문이 겨냥하는 것은 오늘날 이해되는 상호적이고 헌신적인 동성 관계 일반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 실재했던 착취적이거나 우상숭배 제의와 결합된 특정 성적 관행이라고 본다.

  • 당시 지중해 세계에 성인 남성과 소년 사이의 관계(패더러스티), 노예에 대한 성적 착취, 신전 제의와 결합된 성적 행위가 실제로 널리 존재했다는 역사적 정황
  • 이 목록 전체가 1장 18절 이하에서 '우상숭배가 낳은 결과들'의 예시로 제시된 문맥에 놓여 있다는 점
  • 바울이 쓴 그리스어 표현이 상호적 애정에 기반한 오늘날의 '동성 관계' 개념과 정확히 대응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언어학적·역사적 지적

일부 주류·자유주의 개신교단(예: 미국 성공회 관할구 일부, 미국 연합그리스도의교회UCC, 스웨덴 등 일부 북유럽 루터교단), 퀴어 신학 및 일부 진보 성서학자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이 본문이 이방 세계 전반을 겨냥한 목록의 일부이며, 뒤이은 2장 1절에서 바로 '남을 판단하는 너도 마찬가지'라는 방향 전환이 이어져, 특정 집단만을 골라 정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3장의 결론으로 나아가는 더 큰 논증의 일부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흔히 '거스르는 방향으로'로 옮겨지는 그리스어 표현(파라 퓌신, para physin)이 시대를 넘어서는 창조 질서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스토아 철학 등 당대에 널리 쓰이던 '타고난 결'이라는 수사적 표현(바울 자신도 고린도전서 11장 14절에서 머리카락 길이를 두고 비슷한 표현을 쓴다)에 가까운지는 여전히 해석자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다.

읽는 요령

1~8장은 논증이 촘촘해 처음 읽으면 벅찰 수 있다. 낯선 개념(칭의, 율법의 행위, 은혜)이 처음부터 쏟아지니,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일단 끝까지 흐름만 따라가 보는 편을 권한다. 9~11장은 이스라엘의 미래라는, 앞뒤 맥락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주제로 느껴질 수 있는데, 처음 읽을 때는 이 세 장을 가볍게 훑고 넘어간 뒤 나중에 다시 돌아와도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반대로 12~15장은 훨씬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라 상대적으로 쉽게 읽힌다. 16장의 긴 인사 목록도 지루하게 느껴지면 빠르게 훑어도 되지만, 뵈뵈와 유니아 대목만큼은 짧으니 놓치지 않는 편이 좋다. 사도행전을 먼저 읽었다면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시점(3차 선교여행 말미, 예루살렘행 직전)이 어디쯤인지 지도가 잡혀 훨씬 수월하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