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 서신
골로새서 — 뭔가 더 필요하다는 불안에서, 이미 다 가졌다는 확신으로
골로새라는 작은 도시의 교회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특별한 규칙과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예의를 더 갖추라는 것이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이 도시에, 바울은 편지 한 장으로 그 불안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 저자(전승)
-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보내는 편지로 전승된다. 편지 곳곳에서 발신인 자신이 지금 옥에 매인 처지임을 여러 차례 밝힌다(1:1, 4:3, 4:10, 4:18). 빌레몬서와 인명 목록(오네시모, 아킵보, 아리스다고, 마가, 에바브라, 누가, 데마)이 거의 그대로 겹쳐, 두 편지가 같은 시기에 함께 쓰였다는 근거로 오래 받아들여져 왔다.
- 저자(학계)
- 친서로 보는 견해는 빌레몬서와의 인명 일치, 그리고 정체가 불분명한 특정 가르침을 겨냥한 매우 구체적인 상황 설정을 근거로 든다. 반면 제2바울서신(바울 사후 그의 이름으로 제자가 썼다고 보는 편지)으로 보는 견해는 다른 확실한 바울 서신들과 다른 긴 문장 구조, 그리고 신학적 차이 — 특히 신자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존재라고 단언하는 3장 1절의 어조가 이른바 실현된 종말론에 가깝고, 이는 로마서 등이 유지하는 '아직'과 '이미' 사이의 균형과는 결이 다르다는 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는 방식이 고린도전서의 지체(肢體) 비유보다 훨씬 우주적으로 확장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에베소서와의 문장 단위 유사성도 어느 쪽이 먼저인지, 혹은 제3의 저자가 둘 다 참조했는지를 두고 계속 논의된다. 어느 쪽 근거도 결정적이지 않아 논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 연대
- 친서로 보면 AD 60~62년경(약 2천 년 전) 로마 감옥에서, 혹은 그보다 이른 시기 에베소 감옥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제2바울서신으로 보는 학계 일부는 AD 70~80년대(약 1,950년 전)로 늦춰 잡는다(학설이 갈린다).
- 장 수
- 4장
3막 요약
상황
바울이라는 사람은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그런데도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썼어요. 이번 편지는 골로새라는 작은 도시의 교회에 보내는 거예요. 바울은 이 도시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어요. 대신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그 교회를 세웠고, 바울에게 소식을 전해 줬어요. 소식은 이랬어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고 다녀요.' 특별한 규칙을 지키고, 눈에 안 보이는 존재들에게도 예의를 갖춰야 진짜라는 거였어요. 바울은 그 말이 걱정됐어요. 그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이 편지를 쓴 사람은 감옥에 갇힌 채로,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도시의 교회에 편지를 쓴다. 그 도시는 골로새, 오늘날 튀르키예 내륙에 있던 작은 도시다. 한때 모직물 교역로의 요지였지만 이 편지가 쓰일 무렵에는 이미 이웃 도시들에 밀려 쇠퇴한 상태였다. 바울이 이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다. 그의 동역자 에바브라가 이 지역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 에바브라가 바울에게 걱정스러운 소식을 가져왔다. 소식은 이랬다. 교회 안에 그럴듯한 새 가르침이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르침의 정확한 정체는 편지 안에서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여러 단서로 미루어, 유대교의 절기·음식 규정과 금욕적인 몸 다스리기, 천사 같은 영적 존재들에 대한 경외가 뒤섞인 것으로 추정된다. 핵심은 하나였다.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를 더 지키고, 더 참고, 더 경외해야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메시지다. 이제 막 신앙을 시작한 작은 도시의 교회에게 이런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을 것이다. 더 진지하고 더 깊어 보이니까.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이 편지는 1장 1~2절에서 바울과 디모데를 공동 발신인으로 밝히며 시작한다. 수신지 골로새는 소아시아 내륙, 리쿠스(Lycus) 강 유역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인근 라오디게아·히에라볼리와 함께 한때 모직 교역으로 번성했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두 이웃 도시에 밀려 쇠퇴해 있었다는 것이 지리·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이 지역은 AD 60년대 초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게서 확인되는데, 이 지진과 편지의 정확한 선후 관계는 불확실하다). 바울은 이 도시에 직접 가 본 적이 없다고 스스로 밝히며(2:1), 대신 자신의 동역자 에바브라가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으로 서술된다(1:7-8). 에바브라가 바울에게 가져온 소식이 이 편지의 직접적인 집필 동기다. 문제가 된 가르침의 정체는 신약학계에서 흔히 '골로새의 철학' 문제로 불리며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지만, 정작 바울은 그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반박하는 방식으로만 그 윤곽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재구성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학자들이 본문(특히 2:8, 2:16-23)에서 뽑아내는 단서는 대략 이렇다.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속은 텅 빈 사변에 사람들이 휩쓸릴까 경계하는 대목(2:8), 음식·절기·초하루·안식일 규정(2:16), 천사 숭배와 신비 체험(환상으로 본 것을 근거로 내세우는 태도를 문제 삼는 구절로 번역이 갈린다, 2:18), 그리고 몸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식의 세세한 금지 규정들(2:21)이다. 이를 근거로 제안된 정체는 다양하다. 유대교 신비주의(천상 숭배 전통)와 결합된 혼합 사조로 보는 견해, 초기 영지주의적 요소(물질을 열등하게 보고 특별한 지식을 통한 구원을 주장하는 흐름)의 원형으로 보는 견해, 프리기아 지역의 토착 신앙과 중기 플라톤주의적 우주론이 뒤섞인 지역색 강한 혼합주의로 보는 견해가 함께 제시된다. 어느 쪽도 결정적 증거를 갖고 있지 않으며, '골로새 이단'을 단일하고 정합적인 체계로 재구성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가르침이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전제를 공유했다는 점이며, 바울의 논증 전체가 이 전제를 정면으로 겨냥한다는 사실이다.
사건
바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부터 다시 알려줘요.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먼저 있었고,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만들어졌대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전부요. 그러니까 예수님보다 더 크거나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바울은 이렇게 말해요.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해요. 다른 규칙이나 다른 존재를 더 섬길 필요가 없어요.' 몸을 힘들게 하는 규칙들도 실은 진짜가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라고 설명해요.
1장 15~20절에서 편지는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에 이른다. 흔히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리는 이 시적인 구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낸 존재가 그리스도이며 모든 피조 세계보다 그리스도의 존재가 시간·서열상 앞선다고 선언한다. 하늘과 땅, 눈에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 어떤 이름의 권세나 통치 체계든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생겨났고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삼아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앞서 있고, 만물은 그 안에서 하나로 붙들려 있다는 것이다. 이 선언이 왜 중요한지는 뒤이은 2장에서 분명해진다. 바울은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속은 텅 빈 사변에 사람들이 사로잡히지 않도록 경계하고(2:8), 그런 가르침 대신 신의 본질 전체가 축소나 매개 없이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 실제로 담겨 있으며 신자 역시 그 안에서 이미 결핍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맞선다(2:9-10). 논리는 이렇다. 이미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와 이어져 있다면, 그 아래 있는 규정이나 영적 존재들을 따로 달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음식과 절기, 안식일 규정을 두고 누구도 함부로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며, 이런 규정들은 앞으로 올 실체를 미리 어렴풋이 비춰 준 밑그림일 뿐이고 그 실체 자체가 그리스도라고 정리한다(2:16-17).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금욕 규정에 대해서도 바울은 냉정하다. 겉으로는 지혜로워 보여도 실제로는 육체의 욕망을 이기는 데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2:23).
1장 15~20절의 문학적 형태(균형 잡힌 두 연 구조, 반복되는 접속사와 관계대명사, 산문이라기보다 시나 찬송에 가까운 리듬)를 근거로, 많은 주석가는 이 단락이 바울이 그 자리에서 새로 지은 문장이 아니라 초기 교회에서 이미 예배 때 쓰이던 찬송이나 신앙고백 자료를 바울이 가져와 편집해 넣은 것으로 본다(빌립보서 2장 6~11절과 자주 비교된다). 이 찬가는 두 연으로 나뉘어 읽히곤 한다. 앞 연(1:15-17)은 창조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위를, 뒤 연(1:18-20)은 새 창조, 곧 교회와 부활을 통한 화해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위를 다룬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 파세스 크티세오스, prōtotokos pasēs ktiseōs, 1:15)라는 표현의 '먼저 나신 이'(장자)는 이후 교회사에서 격렬한 논쟁의 진앙이 되었다. 4세기 아리우스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가 창조된 존재라는 근거로 인용했고, 이에 맞서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니케아 정통파는 '먼저 나신 이'가 태어난 시점이 아니라 상속과 서열상의 지위(장자권)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가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나신 것'이라는 신조로 일단락되지만, 본문 자체의 그리스어 표현이 두 방향으로 다 읽힐 여지가 있다는 점은 해석사에서 계속 언급된다. 2장의 반박도 원어 차원에서 여러 논쟁을 품는다. '충만'(플레로마, plērōma, 2:9)은 당대 그리스-로마 철학, 그리고 훗날 영지주의 문헌에서 신적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쓰였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가져와 그 충만이 다른 어떤 중개 단계 없이 '육체로'(소마티코스, sōmatikōs)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못박는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확한 방식으로 축소하려는 흐름 전반에 대한 반박으로 읽히며, 훗날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성을 부정한 가현설(그리스도가 실제 몸을 입지 않고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견해)에 대한 반박 본문으로도 자주 인용된다. 2장 14~15절의 '빚 문서'(케이로그라폰, cheirographon, 손으로 쓴 채무 증서를 뜻하는 법률 용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지워 버렸다는 표현, 그리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의 무장을 해제해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는 표현은 로마의 개선 행진(전쟁 포로를 사슬에 묶어 거리에서 행진시키던 의식) 이미지를 빌려 온 것으로 널리 해석된다. 이 구절들이 겨냥하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아르카이 카이 엑수시아이, archai kai exousiai)이 인간 권력을 가리키는지, 별과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어졌던 영적 세력을 가리키는지도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의되는 문제다.
결과
바울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요. 낡은 옷을 벗듯이 나쁜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착한 마음을 입으라고 해요. 서로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래요. 가족들도 서로 존중하며 살라고 말해요. 편지 끝에는 여러 사람 이름이 나와요. 그중에는 오네시모라는 사람도 있어요. 이 사람은 다른 짧은 편지, 빌레몬서에도 나오는 사람이에요. 바울은 이 편지를 옆 도시 라오디게아 교회와도 바꿔 읽으라고 부탁해요.
3장부터 편지는 실천으로 방향을 튼다. '위엣 것을 찾으라'는 권면과 함께, 낡은 옷을 벗듯 옛 습관(분노, 악의, 거짓말)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듯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인내를 입으라는 비유가 이어진다(3:1-14). 특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다'라는 구절이 이 구간을 정리한다. 이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루는 '가정 규례'가 나오는데(3:18-4:1), 에베소서에 나오는 비슷한 본문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해석이 크게 갈리는 대목이다. 4장은 기도에 대한 권면과 함께, 편지를 전달할 사람들을 소개하며 마무리된다. 두기고가 이 편지를 전할 사람으로, 오네시모가 그와 동행하는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소개된다(4:7-9). 오네시모는 같은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빌레몬서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다. 편지 끝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이 편지를 서로 바꿔 읽으라는 이례적인 지시가 나온다(4:16). 그 이웃 교회의 지도자로 보이는 아킵보에게는 '맡은 직무를 다하라'는 짧은 당부가 따로 전해진다(4:17).
3장 18절~4장 1절의 가정 규례는 에베소서 5장 22절~6장 9절과 같은 형식(그리스·로마 세계에 이미 널리 퍼져 있던 문학 장르)을 공유하지만, 분량과 신학적 근거 제시는 훨씬 간결하다. 에베소서가 남편의 사랑을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것'에 견주는 확장된 신학적 논증을 덧붙이는 데 비해, 골로새서는 각 항목을 짧게 명령형으로 나열할 뿐이다. 이 차이는 두 편지의 선후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자주 인용된다. 골로새서가 더 짧고 상황적이라는 점에서 먼저 쓰였고 에베소서가 이를 확장·정교화했다고 보는 다수 견해와, 반대 방향의 의존을 주장하는 소수 견해가 있다. 종과 상전에 대한 언급(3:22-4:1)은 특히 논쟁적인데, 이 페이지의 '보는 관점' 항목에서 별도로 다룬다. 4장의 인사말은 짧지만 여러 인물사적 단서를 담고 있다. 두기고와 오네시모가 이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언급되는데(4:7-9),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 너희 중 한 사람'으로 부르는 이 짧은 문장은 같은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빌레몬서 전체와 맞물려 읽힌다. 빌레몬서는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하라'고 부탁하는 개인 편지인데, 골로새서의 이 짧은 언급은 그 이야기가 실제로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흔치 않은 외부 단서로 취급된다. 이어지는 인사 목록에는 한때 바울과 갈라섰던 마가(사도행전 15장의 갈등), '사랑받는 의사' 누가, 그리고 훗날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고 디모데후서 4장 10절이 전하는 데마도 함께 등장해, 이 시점에는 아직 갈등이 봉합되었거나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자기 집을 교회 모임 장소로 내준 인물로 언급되는 '눔바'(또는 '눔바스')는 사본에 따라 여성형과 남성형 표기가 갈리고, 뒤따르는 대명사도 '그 여자의 집'과 '그들의 집'으로 사본마다 다르게 전해져, 초기 교회에서 여성이 가정교회를 이끄는 사례로 볼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의에서 종종 언급된다. 4장 16절의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라는 언급은 정체가 확정되지 않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오늘날 신약성경에는 '라오디게아서'라는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완전히 소실된 편지로 보는 견해, 에베소서가 원래 여러 교회를 도는 회람 서신이었다는 점과 연결지어 그 회람 경로 중 라오디게아를 거친 사본이 곧 에베소서였다는 견해가 함께 제시된다(2세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이 자신의 정경 목록에서 에베소서를 '라오디게아서'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후대에는 이 구절에 착안해 라틴어로 된 위작 '라오디게아서'가 만들어져 일부 중세 서방 성경 사본에 실리기도 했지만, 초기 교회의 정경 목록 어디에서도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구조 나누기
- 1:1-14장인사와 감사기도 — 에바브라를 통해 들은 소식
- 1:15-2:5장만물보다 먼저인 그리스도 — 우주적 찬가와 바울의 사역
- 2:6-23장거짓 가르침 논박 — 규정은 그림자, 그리스도가 실체
- 3:1-4:6장새 사람으로 살기 — 옷 비유와 가정 규례
- 4:7-18장끝인사 — 두기고와 오네시모,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환 지시
핵심 구절 (자체 풀이)
- 골 1:15-17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신의 형상이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 하늘과 땅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선언. 초기 교회의 찬송 자료를 바울이 가져와 편집했다는 견해가 많다.
- 골 1:18-20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난 이이며,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고 그를 통해 만물이 화해하게 되었다는 찬가의 뒷부분.
- 골 2:8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보적 원리를 따르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 — 이 편지가 반박하려는 가르침의 존재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구절.
- 골 2:9-10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며, 신자도 그 안에서 이미 충만해졌다는 선언. 무언가를 더 갖춰야 완전해진다는 주장에 대한 정면 반박.
- 골 2:16-17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 초하루,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며, 이런 규정들은 장차 올 것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정리하는 대목.
- 골 3:1-2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는 권면 — 교리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전환구.
- 골 3:12-14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인내를 새 옷처럼 입고,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는 권면. 사랑을 '온전하게 매는 띠'로 표현한다.
- 골 4:9두기고와 함께 편지를 전할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소개하는 대목. 같은 시기에 쓰인 빌레몬서 속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 이야기가 실제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짐작하게 하는 단서다.
등장인물
이 책의 가르침
-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먼저이고 만물의 머리라면, 그 아래 있는 규정이나 영적 존재들을 따로 달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 편지의 핵심 논증 전략이다 — 규정을 하나씩 반박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지위를 끌어올려 문제를 위쪽에서 해결한다.
- 금욕 규정과 절기 준수는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하며,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방식이 실제로는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 대안은 더 엄격한 규정 목록이 아니라 참음, 용서, 감사 같은 관계의 태도, 즉 '새 사람'을 입는 것이라고 제시한다(3장).
- 일상 전체(가정 관계, 노동 관계 포함)가 종교 활동과 생업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관점을 3장 후반~4장에서 제시한다.
흔한 오해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의 요약본이거나 축소판이다.
⭕두 편지가 여러 구절에서 거의 동일한 표현을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쪽이 먼저 쓰였는지, 같은 저자가 썼는지 자체가 학계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골로새서에는 에베소서에 없는 구체적인 논쟁 상황(그림자와 실체 논증, '철학'에 대한 경고)이 있고, 분량도 훨씬 짧다. '요약본'이라는 표현은 이 편지가 독자적인 집필 동기를 가진 문서라는 점을 가린다.
❌골로새서가 반박하는 '철학'은 정체가 정확히 밝혀진 특정 이단이다.
⭕본문은 그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반박하는 방식으로만 언급해, 정확한 정체를 확정할 수 없다. 유대 신비주의, 초기 영지주의적 요소, 지역 혼합 신앙 등 여러 재구성이 제시될 뿐 학계의 합의는 없다.
❌3~4장의 종과 상전에 대한 언급은 성경이 노예제를 승인한다는 뜻이다.
⭕이 대목은 역사적으로 노예제를 옹호하는 근거와 폐지를 요구하는 근거 양쪽에서 모두 인용되어 왔다. 같은 편지 3장 11절의 '거기에는 종이나 자유인이 없다'는 선언을 어떻게 함께 읽을지에 따라 평가가 갈리며, 이 페이지의 '보는 관점'에서 두 입장을 함께 다룬다.
❌1장 15~20절의 그리스도 찬가는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그 자리에서 새로 지어낸 독창적인 문장이다.
⭕문장의 리듬과 균형 잡힌 구조를 근거로, 많은 학자는 이 구절이 바울 이전부터 초기 교회에서 예배 때 쓰이던 찬송이나 신앙고백 자료를 바울이 가져와 편집해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만 이 역시 문체 분석에 근거한 다수 견해일 뿐,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보는 관점
골로새서 3:22-4:1(종과 상전 규례)을 노예제에 대해 어떻게 읽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당대 노예제를 전제하고 그 틀 안에서 상호 의무만 요청하는 상황적 권면으로 보는 입장
이 구절은 노예를 소유하는 것 자체의 정당성을 논하지 않으며, 이미 존재하던 그리스·로마 사회의 노예제를 그대로 전제한 채 종에게는 성실한 섬김을, 상전에게는 공정한 대우를 요구할 뿐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본문 자체를 노예제 폐지의 직접적 근거로 끌어오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본문이 '종들아 순종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며, 노예제 자체를 없애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는 점
- 당대 사회·경제 구조를 재편하기보다 그 구조 안에서 신자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루는 그리스·로마 '가정 규례' 장르의 일반적 특징
- 19세기 미국 남부에서 이 본문(과 유사한 에베소서 6장, 디모데전서 6장 구절)이 실제로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인용된 역사
이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는 다수의 현대 주석가·역사신학자, 본문의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는 여러 주류 교단
본문 안에 노예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원리가 이미 담겨 있다고 읽는 입장
3장 11절('거기에는 종이나 자유인이 없다', 자체 풀이)의 선언과,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부르는 빌레몬서의 논리를 이 규례와 함께 읽으면, 종과 상전이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동등하다는 원리가 이미 심겨 있었고 이것이 훗날 노예제 폐지 운동의 신학적 자원이 되었다고 본다.
- 3장 11절이 종과 자유인의 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선언한다는 점
- 상전에게도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상기시켜 대칭적 책임을 지운다는 점(4:1)
- 18~19세기 노예제 폐지 운동가(퀘이커교도, 윌리엄 윌버포스 등)들이 성경 전체에 담긴 이런 원리를 근거로 폐지 운동을 벌였다는 역사
노예제 폐지 운동의 신학적 뿌리를 강조하는 교회사 연구자, 이 본문을 해방적 방향으로 읽는 여러 현대 주석가
공통점 두 입장 모두 이 본문이 오늘날 노예제를 옹호하는 근거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본문 자체가 노예제 폐지를 능동적으로 명령했는지, 아니면 후대에 다른 성경 원리와 결합되면서 비로소 그런 방향으로 읽히게 되었는지에 대한 평가가 갈린다.
아직 논쟁 중인 부분 바울이 노예제라는 구조 자체를 잠정적인 것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당연한 사회 질서로 받아들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되지 않으며, 같은 저자가 쓴 것으로 보이는 빌레몬서를 어떻게 읽느냐와도 맞물린 문제다.
읽는 요령
1장 15~20절의 그리스도 찬가는 문장이 압축적이고 리듬을 타듯 쓰여 있어서, 처음 읽으면 뜻이 한 번에 안 잡힐 수 있다. 천천히 두세 번 읽어 보길 권한다. 2장에서 바울이 반박하는 '철학'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이건 정상이다 — 학자들도 확정하지 못했다. 3~4장은 에베소서의 해당 부분과 자매처럼 닮아 있어서, 두 편지를 나란히 놓고 읽으면 어느 쪽이 더 구체적이고 상황적인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빌레몬서를 함께 읽을 계획이라면, 이 책 4장 9절의 오네시모 언급을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면 두 편지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훨씬 선명하게 보인다.